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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1장 주석 강해설교]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모압 이주(룻 1:1-22)

복음의 능력 2024. 3. 22.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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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1장 주석 강해설교 말씀은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모압으로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이주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베들레헴에 기근이 임하자 엘리멜렉 가족은 모압으로 갔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모압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베들레헴을 버리고 모압으로 갔는데 엘리멜렉은 죽고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도 죽었습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다니면서 어려움이 있다고 교회를 떠나고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면 더 힘든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룻기 1장을 보면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모압 이주(룻 1:1-22)

 

1,2-----------------------------------------------------------

사사들이 치리 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 보통으로 "흉년"은 사람들의 죗값으로 오는 하나님의 징벌이다. 이때의 흉년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 죗값으로 미디안 군의 침략을 당한 까닭이었다. 그때에 미디안 군대가 이스라엘의 토지 소산물을 모두 멸하였다(6:2-4). 이 일 외에도 자연적 흉년도 있었던 듯하다. 6절 참조.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 하였는데 - 이때에 흉년으로 인하여 유다 사람 "엘리멜렉" 이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거느리고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3,4,5-----------------------------------------------------------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거기 거한 지 십 년 즈음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 모압땅으로 이주한 나오미의 가정에는 환란이 그치지 않았다. 먼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그 뒤에 그의 "두 아들"도 죽었다. 나오미의 가정에 이런 환란이 임한 것은 신자들에게 교훈을 준다. 그것은, 나오미와 그 가족이 기근의 환란을 피하려고 모압으로 갔으나 거기서 더 큰 환란을 만난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1) 이 세상에는 그 어디나 안식이 없으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영적 평안을 구해야 될 것과, (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환란으로 인해서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 나오미와 그 가족이 모압에서 환란을 당했기 때문에 "룻"이 나오미를 따라서 유다 베들레헴으로 오게 되었고, 그녀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겔레만(Gillis Gerleman)은 탈굼역(Targum)에 의하여 말하기를, 엘리멜렉의 두 아들이 일찍 죽은 것은 이방 여자들과 결혼한 죄 때문이었다고 한다(Die Tage derbeiden Sohne wurden nach Tag. verkurzt als eine Strafe wegen ihrer Ehen mit denauslandischen Frauen.- Biblischer Kommentar Altes Testament,Ruth,Das Hohelied,1965, s.15). 그러나 성경에 그들의 죽은 원인이 명시되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단언하기는 어렵다. 모든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의 깊으신 행사를 사람이 다 알 수 없다. 나오미는 이렇게 외국 생활 10년 동안에 육신적으로 비참한 환란을 세 번이나 당하였지만 조금도 원망하거나 낙심하니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믿고 그를 의지하였다(13)

6,7,8,9-----------------------------------------------------------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 (6상반). 나오미는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문을 들었. 그는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믿었다. 이것이 성경적 인상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6:11). 그는 이제 그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두 자부와 함께" - 모압으로 떠났다. 그는 고향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돌아보시는 사랑("권고"의 뜻)을 느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이 끌린 것은 양식 그것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하나님의 선(選民)으로서 외지에서 환난만 겪고 외로워질 대로 외로워진 나오미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 외에 다른 것은 요구되지 않았다. 신자가 그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을 때에 인간의 위로나 도움으로는 치료되지 않는다. 그는 고요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 그의 치료를 받고자 갈망하게 된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사랑이 임한 베들레헴 땅으로 돌아가는 데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 (8절 상반). 나오미가 그 출발 당시에는 이런 말을 하니 않고 주 자부와 함께 우다 땅으로 향하여 길을 떠났던 것이다(6하반-7). 그런데 그가 길을 가던 도중에 두 자부에게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권면하였다. 왜 나오미는 이런 말을 하였을까?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나오미의 중심을 거의 확실하게 추측할 수 있. 그것은, 아마도 나오미가 두 자부의 개종(改宗)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알아본 것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일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은(6,8,9,13,21) 나오미는 이제 자기 고국을 떠나 멀리 우다로 가려는 두 자부에게서 확실한 여호와 신앙을 찾아보려고 했을 것이다. 15절 참조.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8하반-9상반). 나오미는 그 자부들이 모압에 돌아가서 거기서 축복받을 길도 여호와께만 있다는 의리로 강조하여 말한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굳게 믿은 신앙가였다.

10,11,12,13-----------------------------------------------------------

나오미의 두 자부 "오르바" - 와 "룻" - 은 울면서 어디까지나 그 시모와 함께 유다 땅으로 가기를 간절히 원하였. 그럼에도 불구하고(10) 나오미는 간곡한 말로 그들을 돌려보내려고 길게 말했. 이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의 결심을 시험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 나오미는 이 장면에 있어서 그들의 육신 생활과 관련된 남편 문제에 역점(力點)을 두고 말한다. 이 부분(10-14)"남편" - 이란 말이 네 번이나 나온다. 이 말이 사실상 그 두 여인에게는 중대한 결정을 하는 데 유일하고 절실한 시험건이 된 것이다. 그들이 외국 유다로 간다는 것, 남편보다도 여호와를 택하는 결단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나오미는 이렇게 말함으로 그 자부들로 하여금 각기 그들의 중점적인 소원대로 자유로이 결정하도록 만들었. 그 결과 남편 두는 것을 중점적으로 생각한 오르바는 결국 자기의 고국 모압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 두는 것을 중점적으로 생각하니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택한 룻은 그 시모를 떠나지 않았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 (14절 끝). 여기서 "붙좇았더라"란 말의 직(直譯)"다가섰다"이다. 룻은 그 시모를 끝까지 따르려는 결심이 견고함을 이렇게 행동으로 나타냈다. 이 부분(10-14)에 나타난 나오미의 이론은 율법에 기록된 계대 결혼(繼大結婚)근거한 것이다. 신 25:5-6 참조.

15-----------------------------------------------------------

나오미가 또 가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 여기 이른 바 "그 신"이란말은 모압신()을 의미하였다. 나오미의 말은 오르바이 행동을 좋게 여긴 것이 아니고 다만 오르바가 취한 행동의 결국을 말한 것뿐이다. 그가 룻을 향하여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라고 말한 것은, 룻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뿐이고 모압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꼭 옳다는 의미는 아니다.

16,17,18-----------------------------------------------------------

룻은 끝까지 굳은 결심으로 자기의 시모를 따르고자 한다. 그는 다섯 가지 조건을 들어가며 다짐하였다. (1) 어머니의 가는 곳에 자기도 가겠다는 것. (2) 어머니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겠다는 것. (3)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는 것 (4) 어머니와 같이 죽겠다는 것. (5) 자기의 만일 어머니를 떠나는 경우에는 여호와의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 등이다. 룻의 이와 같은 결단(決斷)은 어디까지나 자기를 희생하고 어머니에게로 동화된 처니를 취한 것이다. 룻이 그 시모를 따라 여호와 하나님과 및 그 택한 백성에게로 가는 것이 그의 축복을 받을 행동이다. 이 때문에 그는 다윗의 조상과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룻의 말 가운데서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 란 말과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 란 말(16절 하반)에 대하여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룻이 그의 결단을 나타낸 다섯 가지 조건의 핵심이요 또 이유이다. 그는 이제부터 동족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그의 이런 결심은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 - 서 살기를 원함이다. 2:12 참조. 룻은 이 결단에 있어서 여호와를 중심하고 생각한 것인 만큼 혈통적 인연보다 영적(靈的) 인연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스라엘 운동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영적 인연으로 모이는 운동이다. 신약의 구원 운동은 이 점을 명백하게 밝혔으니(6:15; 골 3:11) 더 말할 것도 없고,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운동도 본래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에 뱀, 곧 마귀에게 예언하시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고 하셨다(3:15). 이 말씀은 많은 비유를 포함한 것이니 이 말씀을 순전히 육적 의미로만 해석하면 안 된다. 이 말씀 중 ""은 마귀를 비유하며(20:2),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마귀의 후손, 곧 하나님의 원수)과 반대되는 백성을 비유한다. 그리고 "뱀의 후손"은 사상적으로 하나님의 원수 된 백성을 비유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운동은 "여자의 후손"된 자들을 불러 모으는 운동이다. "여자의 후손"은 후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이름과 바뀐다(15:5).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것은 아브라함의 혈통 중심으로 불려진 칭호가 아니고(3:8-9), 하나님이 메시아 약속을 중심하고 불려진 것이다. 4:11,16, 9:6-8,24-26; 갈 6:15 참조. 룻이 그때에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겠다고 말한 것은 "여자의 후손"(3:15), "아브라함의 자손"에 가담하려는 신앙적 결단이다. 그녀는 하나님을 위하여 민족을 초월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성도들)을 자기 민족보다 더 사랑한 것이다. 16:3-4에 말하기를,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다.

그 시모의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이 되신다고 한다. 사실상 그녀는 여호와의 "날개 아"서 보호받기를 원하며(2:12), 끝까지 그 시모를 따라 유다로 간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시모를 끝까지 따르지 않을 경우 자기는 여호와의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죄의(罪意識)마저 가졌던 것이다.

19,20,21,22-----------------------------------------------------------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 (20). 나오미가 "베들레헴" - 에 돌아왔을 때에 "온 성읍" - 이 그를 반가이 맞이하면서 "나오미"의 이름을 불렀다. 이때에 나오미는 그들을 향하여 자기의 이름을 고치며 말하기를,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라고 하였다. "나오미"란 이름(괴로움)라고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환란을 통과한 후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종(新從)하는 신앙 인격을 이루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나오미는 자기에게 환란을 주신 이가 여호와시라고 간증한다. 21절의 "나를 징벌하셨고" - 란 말, "나를 거슬러 증거 하셨고"라고 개역되어야 한다. 이 말에서도 그녀가 자기의 당한 환란이 여호와께로부터 왔음을 역설()하였으니, 그것이 그의 신앙 사상이다. 사람이 자기의 당한 환란을 우연에 붙여 생각한다면, 그는 환란 가운데서 기쁨을 얻을 수도 없고 소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란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임한다고 믿는 신자는 하나님이 그 환란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임한다고 믿기 때문에 소망 중에 기도와 간구로써 힘있게 살아가게 된다. 5:17-18에 말하기를, "불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라고 하였고, 6:1-3에는 말하기,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는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라고 하였다.

(2) 나오미는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가졌다. 그가 모압에서 사는 동안 괴로움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괴로움'을 자기 이름으로 취하겠다고 한 것은, 괴로움을 헛되게 여기거나 저주하는 마음에서 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기 이름을 새로이 취하게 되는 경우에는 아무쪼록 자기에게 보람 있는 것을 선택하고자 하는 법이. 그런데 나오미가 자기의 이름을 "괴로움"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한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일을 중요하게 여겨 그 섭리에 계속 순종하고자 하는 신앙 행위이다. 그는, 그 괴로움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모시게 된 것을 큰 보람으로 여겨서 그 고난을 잊어버리기도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자기의 이름으로 취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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