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여호수아 1장에서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에게 임무를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임무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라면 여호수아는 복음의 대표다. 광야 2세대들이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천국을 상징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구원받은 백성은 예수님을 따라서 가나안 땅과 같은 천국에 들어간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여호수아 1장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자.
요단강을 건너라고 명령받은 여호수아(수 1:1-5)
[1]-[2]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1. 모세가 죽은 후에
시간은 흘러 40년, 세월도 사람도 간다. 애굽을 떠날 때 60만 대군은 다 어디 갔는가? 목표는 똑같이 요단 건너 가나안 이건만 겨우 여호수아, 갈렙 두 사람이 남았을 뿐, 그들의 고적함이 극하던 차에 위대한 통솔자 모세마저 모압(신 34:5)에서 죽고 마니 이스라엘의 운명은 심히 고달팠다.
가나안 입주는 포기해야 할 신세가 되어 그렇다면 거친 광야에서 영주 하느냐? 이런 절박한 경우를 당한 때이었다. 여호와를 신봉하는 자들에게는 왕왕이 절박함을 당할 때 모험적 신앙은 드러나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빌 4:13, 막 9:23)의 맛을 보게 된다.
옛날도 오늘날도 신령한 가나안을 향한 사람들은 적지 않았건만 끝까지 도달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이스라엘은 전민족적으로 절박한 때임에 틀림없거니와 한평생을 모세의 시종으로 있던 여호수아에겐 더 말할 나위가 없었던 것이다.
웃시야가 죽던 때에 이사야의 그 절박한 경우와 비길 바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때에 일하시기 시작하신다. 기드온을 따른 사람이 많았을 때 다 보내게 하시고 오직 300이란 보잘것없는 수로 미디안 대군을 물리치셨다.
이는 일이 하나님께 있고 사람들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비결을 알게 하심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모세의 한 것이 아니요, 가나안 정복이 여호수아의 작전 승리에 있을 것이 아니라는 공과를 여호수아는 배우는 것이다.
이 공과를 배우는 것이 쉬울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크게 쓰신 종들은 다 이 공과를 거치지 않고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사람들의 수고와 경성함이 무엇을 하지 못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 하나님께선 그를 쓰실 수가 없다. 인본주의 신본주의니 하거니와 이 공과에 졸업을 못하는 경우엔 하나님의 일을 맡는 데 문제가 된다. 여호수아는 아말렉 전쟁 때에(출 17장) 그 대 승전이 모세를 배경으로 해서라고 기억하고 있을 법하다.
이제 가나안 정복의 최대 일감이 앞에 있는데 모세는 죽었으니 일의 전망은 전연 암흑에 쌓이고 만 셈이다. 신앙이란 이 공과를 졸업하고 나서야 기본적으로 활발하게 운동하게 된다. 모든 일의 배경은 오직 여호와께만 있는 것이다. 모세를 의지하지 못한다. 모세는 죽을 것이다. 거의 전수의 동료는 벌써 광야에서 다 쓰러지고 말았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죽음으로 최종 공과에 진학한 셈이다.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졸업 때 주신 훈사에 방불한 말씀이기도 하다. 모세를 크나 큰 배경으로 삼아 오던 여호수아에게 그 배경으로 거두시고, 참 배경 여호와 신앙을 완전히 학습하게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시종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여호와의 종처럼 큰 지위는 없는 것이다. 종의 배경은 여호와이시다. 내 종은 죽었으나 나는 그대로 네 배경이 되신다는 말씀으로 받아 마땅하다. 내 종 모세는 내가 불러 갔으니 딴 종을 세우실 것이란 말씀이시기도 하다.
「이제 너는 」 세울 딴 종은 곧 너 여호수아라는 말씀이시다. 여호와께서 일의 주체이심을 확신하고 졸업하는 여호수아에게 「이제 너는」 나를 배경으로 하고 순종해서 여호와의 하시는 역사에 당하라는 말씀이시다.
여러 계단의 공과를 거쳐서 모세의 죽음의 공과까지 배운 여호수아에겐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이제부터 「너다」라는 말씀이시다. 하나님께서 지명해서 임명해 주신 것이다. 광고해서 모집하신 것이 아니요「이제 너로」 지적하여 일을 맡기신 말씀이다.
이런 소명이 있은 후에 사명을 감당함은 어렵고 쉬운 문제가 거기 게재하지 아니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지적해 주시었다. 하나님께서 이제 지적해 주시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추천서를 강요하는 식의 일감을 찾음은 마땅하지도 않고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강요를 당하셔서 추천도 안 하시고 자기 일을 맡기 시지도 않으신다.
오늘 우리 하나님의 종들이라면 확실히 이런 한 토막의 사실이 있어야 될 것이다. 「모든 백성으로... 일어나」 여호와께서 주신 일감은 여호수아에게 처음 일이 아님은 확실하다. 전에부터 이 백성들과 운명을 같이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 의의가 전과 같지는 아니하다.
전에는 모세의 시종으로서 여호수아였으나 이젠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백성을 일으킬 사명이다. 「이 요단」 최후의 골인 요단을 건너서 「주는 땅으로 가라」 영원한 경륜 가운데서 경영한 대로 허락한 땅에 가라는 말씀이다. 허락한 땅은 요단을 건너야 한다. 애굽은 홍해를 갈라서야 성공적으로 나왔거니와 가나안은 요단을 건너서야 얻는다.
[3]-[5]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1. 아낌없는 허락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이는 벌써 죽은 모세에게 허락했었다. 변역함이 있을 수 없는 여호와께선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밟은 곳을 아낌없이 다 주신 것이다. 많이 밟으면 많이 얻고 적게 밟으면 적게 얻고 안 밟으면 못 얻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도 번번이 하신 말씀 중「믿는 대로」의 말씀을 많이 하셨다. 크게 믿으면 크게 받고 적게 믿으면 적게, 안 믿으면 못 받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믿기만 하면 또 말씀대로 순종만 하면 아낌없이 다 주시는 것이다.
주실 분은 아끼지 않으시는데 어찌하여 마음껏 밟지 못하는가? 큰 은혜를 받아 큰 힘을 얻어 크게 일하여야 할 것이다. 주님께선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자기 있는 사랑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그 생명이 다하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이다(요 13:1). 아끼지 아니하시는 것을 나도 아낌없는 믿음과 순종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2. 너희 지경
아낌없는 허락을 받았은 즉 그 지경이란 그들의 소원대로 된 것이며 밟은 대로 된 것뿐이다. 『네 장막 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사 54:2)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널리 밟지 아니하고 장막 터를 좁히며 휘장을 아끼어 좁게 펴고 살려고만 하는 것은 적게 믿는 까닭이다.
이스라엘 지경은 남으로는 광야, 북으로는 레바논, 동으로는 유브라데스, 서로는 지중해의 경계된 땅을 소유하였다. 서로 해지는 대해라 했으니 바다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하되 레바논 산을 넘어 밟았다면 그 아름답고 높은 산이 경내의 중앙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지경을 얻었거니와 오늘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우리 신앙 영역을 넓히고 지경을 아끼지 말아야 할 터이다. 신앙의 폭을 넓힌다고 해서, 아무 종교나 포용한다 든가 어디로 산에 올라도 꼭대기에 가선 똑같이 한 곳에서 만난다는 식의 종교 동일론에 나아간다는 착오를 범하여서는 크게 금물이다.
내 발바닥으로 밟기는 임의로 하려니와 주시기는「내」가 곧 여호와께서 주셔야 되는 것이니 여호와께서 주체이심을 잊지 말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인데 십자가를 둘러싸고 서로 시기 분쟁하여 주님의 몸을 찢는 것은 못할 일이다.
어찌하여 밟는 발바닥이 그리 편협할까? 북의 넘지 못할 레바논 때문일까? 서로는 더 나아가지 못할 대해, 해지는 곳까지 가서인가? 또 동으로 유브라데스 강 같이 긴 강이 가로놓여서인가? 우리 교계의 분리가 여기에 해당되고 있지나 않는가? 높은 산, 긴 강, 넓은 바다도 없는데 인위적으로 높은 산을 가공적으로 쌓는 데는 긴 강은 그림으로 그려 놓고 못 간다고 우기는 데는 아연할 일이다.
여호와의 허락하시는 범위에서는 마음껏 발바닥을 넓게 밟아보자. 장막 터를 좀 더 넓혀 휘장을 아끼지 말고 벌림 줄을 길게 또 장막 말뚝을 견고하게 박아야 하겠다.
3. 능히 당할 자
아낌없는 허락에 믿음의 지경을 넓히는 데 능히 당할 자가 없으리란 보장이 붙었다. 그 아낌없는 허락을 믿는 자는 누구냐(여호수아 뿐이리오) 그 한평생 당할 자가 없어 발로 밟는 곳은 다 그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히 13:6). 주께서 나를 도우시고 주께서 세상을 이기신 그 이김을 내게 붙여 주신지라 무엇을 두려워할 수가 없다. 그리하건만 왕왕 우리에게는 걱정도 적지 않다.
나의 한평생은 완전히 보장된 바인즉 더 나아가 주님의 몸 된 교회도 주님 친히 지키시는 것이니 지나친 노파심의 염려가 필요하지 않다. 자유주의 사조가 싫지 않은 것 아니나 이를 꺼린다고 마땅히 같이할 형제를 원수 시 함은 우리 교계의 큰 오점이다.
2천 년 교회 역사는 이를 우리에게 힘 있게 설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이단 사설이 시대에 따라 그 얼마나 넘쳤건만 그래도 복음주의의 기치는 드높이 휘날리고 있음이 신통한 일이다.
여호와께서 이 모세와「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은 것임이라」고 이만한 보장을 여호수아는 받았다. 참으로 보증수표로다. 부도의 우려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의 인을 쳐주신 것이다. 떠나 주시지 않으심은 하나님의 고마운 처사이거니와 혹 실수하여 버리실 조건이 생기시되 징계하실지언정 버리지는 아니하신다. 고마운 말씀이시다. 받은 징계를 원망하지 말 것이다. 버리시지 않는 은혜이다.
[출애굽기 6장 주석 강해 말씀] 이스라엘 백성 해방의 약속(출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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