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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주석 성경말씀]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창 1:1-4)

복음의 능력 2024. 1. 2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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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주석 성경말씀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지 창조 사건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사건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수면 위에 운행하셨으며 성자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임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천지 창조 사건에 함께하신 하나님입니다.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창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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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어떤 학자들은 이 문구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시작할 때에"라고 한다. 이렇게 번역될 때에 이 문구는, 하나님께서 이 시점(時點)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의 창조 역사는 2절부터 시작할 터인데, 그 일을 여기서 서론적으로 말한 것뿐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번역은 문맥과 부합하지 않는다. 2절에 있는 "땅이"란 말의 히브리 원어"또 땅이"뜻인데, 여기 ""란 말은 그 번역(위에 소개된 1절에 대한 번역)과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1절의 번역은 우리 한역이 잘 되어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말한다. "창조"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빠라,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만 쓰는 말이다(G. Ch. Aalders, De Goddelijke Openbaring in De Eerste Drie Hoofdstukken Van Genesis, p. 207). 이 말이 여기서는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천지를 지으신 사실을 가리킨다.

1절 말씀에 있어서 중요한 말은, "하나님"(엘로힘)이란 말이다. 천지 만물 창조에 대하여 기록하는 모세의 목적은, 인간을 섭리하시며 구원하시며 벌하시는 이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알려 주려는데 있다. 성경은 구속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먼저 구속자(救贖者)가 누구이심을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구속자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자가 아니고서는 죄 때문에 멸망한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121:1-2 ; 4: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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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리- 이 말씀은, 땅이 본래 혼돈하지 않던 것이 그때에 새삼스럽게 혼돈하여졌다는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그렇다는 말이다. 스코필드(Scofield), 본래 좋게 창조되었던 땅이 천사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황폐되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해석에 의하면, 땅은 본래 천사들의 거할 곳으로 창조되었는데, 그들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저렇게 혼돈되고 공허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성경 다른 부분에서 볼 수 없는 그릇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혼돈하고 공허하며"란 문구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것이다. , 거기 있는 말 "하고", 혹은 "하며"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예다"되었다"(became)란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예다는 변천을 의미하지 않고 본래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 문구의 의미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땅이 아직 생물들이 살 만한 조직된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스코필드(Scofield)가 그의 이론 근거로 삼는 성구는, 사 14:9-13, 24:1, 45:18 ; 28:12-5 등이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그의 이론을 지지하여 주지 않는다. 이 구절들은 극히 비유적이요, 시적(詩的)인 표현들을 가지고, 바벨론 왕, 또는 두로 왕의 교만과 그 타락 상태를 보여 주는 것뿐이다.

"깊음"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테홈인데 깊은 물을 말함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바벨론 신화 티아맛(Tiamt-이란 뜻)이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하고, 따라서 성경의 창조 기사가 바벨론 신화에서 유래되었다고 까자 한다. 바벨론 신화에서, 말뚝(Mardoek)이란 신()이 원시적(原始的) 바다에 있었던 용(Tiamat)을 잡아 죽이고, 그 죽은 몸의 일부분으로 궁창을 지었고, 티아맛(Tiamt)의 군대 장관 킹구(Kingoe)의 피로써는 사람을 지었다고 한다(R. W. Rogers, Cunneiform Parallels to The Old Testament, Oxford 1912, pp. 3-44; A Jirku, Altorientalischer Kommenter Zum Alten Testament, Leipzig - Erlangen 1923, bldz. 2-12; Hugo Gressmann, Altorientalische Texte und Biklder, Berlin - Leipzig 1926, bldz. 109-129 ; Ungnad, Die Religion der Babylonier und Assyer, Jena 1921, bldz. 27-52).

그러나 창세기의 창조론이 바벨론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천만부당한 말이.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깊음"이란 말이 바벨론 말 티아맛(Tiamat)서 유래되었다고 할 것은 없다. "깊음"이란 말은 샘 근원, 혹은 바다를 의미할 뿐이고(7:11, 8:2, 49:25 ; 33:13 ; 51:10), 바벨론 신화에서 처럼 신화적 실존인 용()을 의미하지 않았다. 혹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라, 리워야단, 또는 큰 물고기로 더불어 싸우셨다는 말씀이 구약에 있다고 하면서, 사상은 바벨론 신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라함이나 리워야단은 신화적인 용을 의미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대적한 애굽과 같은 강국들을 비유하였다(30:7, 27:1, 51:9; 74:14, 87:10, 104:26). 그리고 구약에 있는 큰 물고기란 말도, 실제적으로 있는 보통 피조물로서의 바다 동물들을 말함이고(1:21; 7:9, 10, 12; 32:33; 7:12; 74:13, 91:13, 148:7; 27:1, 51:9; 51:34; 29:3, 32:2), 허황한 신화적인 용을 말함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어떤 괴물로 더불어 싸우셨다는 말은, 성경에 단 한 번도 없다. 그리고 바벨론 신화는 어디까지나 다신론(多神論) 사상인 반면자, 구약의 창조 기사는 어디까지나 유일 신론(唯一神論)이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그때에 창조된 땅이 물 가운데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또 다시 "하나님의 신"의 역사(役事)를 경유하지 않고는 생물이 살 수 있는 세계가 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신"이란 말은, 본 라드(Von Rad)에 의하면, 폭풍()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시 104:30의 말씀과 부합하지 않는다. 거기 말하기를,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하였다.

33:4에도 이와 유사한 말씀을 하였다. 물질 자체가 스스로 발전하여 정미로운 세계를 이룰 수 없었다. 하나님의 신()께서 거기 임재하셔서 역사하심으로만 정돈 된 세계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도 역시, 우리가 물질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믿어야 될 것을 보여 준다. 만물을 지으시고 또 완성하신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 "하나님이 가라사대"(와요멜 엘로힘)란 말씀은 본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나님이 가라사대"란 말씀이 초두부터 자주 나타나서 기독교가 말씀의 종교임을 보여 준다.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

(1) 무언 창조(無言創造)였더면, 범신론(汎神論)이나 진화론(進化論)의 세계관(界觀)에 언질(言質)을 줄 번하였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신()은 살아 계신 신이시. 말하는 것은 인격(人格)이다. 말하지 않고 무엇을 형성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유출(流出)이나 진화와 같은 일이 될 것이다. 성경의 창조론이 하필 말씀으로써의 창조를 고조한 것은, 유신론(有神論) 체계(體系)에 살깊이 부합하나니, 이것이 우연한 말이랴!

(2) 하나님이 말씀하신 때에 꼭 그대로 모든 좋은 것들이 창조되곤 한 것을 보면, 이것은 역시 약속 체계(約束體制)에 속하는 창조론이다. 그의 말씀은 진실하다. 에게는 무실(無實)한 발언(發言)이 전혀 없다. 55:10-11에 말하기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됨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는 말씀이면 그만이다. 말로써 만족하지 못할 세계는 인생의 세계이다. 그 세계에서는 언행()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행에 있어서는 나누어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는 언제나 이루어지고야 만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것을 사실과 같이 여기지 않는 심리는, 하나님의 말씀 대하기를 인생의 말 취급하듯 하는 데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다 이루신다.

말씀대로 전부 이루시되 그 성취의 대부분이 단시일 안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며, 그 이루어지는 형편도 반드시 다 나타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3)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없는 데서 만물을 있게 하시는 능력을 보여 준. 이 능력은 우리의 믿음을 일으켜 준다. 그러나 우연(偶然)에 의하여 만물이 되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은 어떤 빛을 의미하였을까?

(1)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태양 빛이 아니고 전기 빛과 같은 어떤 빛일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은 태양에 자리 잡고만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태양이 아니고라도 존재할 수 있는 빛이 빛이 창조되었을 것이다. (2) 또 다른 학자들은, 그때에 땅을 감싸고 있는 수증기와 구름을 통하여 비취어 오는 태양 빛을 가리킨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때에 태양은 아직 나타나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넷째 날에야 나타나 보인다(14-19). 모든 피조물 중에도 빛이 최초에 창조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 이유는, 빛이 있어야 모든 것이 구분되고 또한 생물들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1-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 여기 이른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란 말씀은 중요하다. 이 말이 본장에 여러 번 나온(4, 11, 13, 18, 20, 25, 31). 이 말씀을 보면, 물질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물질 개악설(物質皆惡說)은 성경과 위반된다. 우리가 물질을 바로 쓰기만 하면 유익하고 선을 이룬다. 맨 처음에 피조물이 좋았다 함은, 인류의 범죄 후에도 그것이 구원의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Barth), 여기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란 문구가, 은혜 계약의 외부적 근거로 하나님에게 좋게 보였다는 뜻이라고 한다(KD. III/1, p. 230). 바르트(Barth)에 의하, 여기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란 말은 피조물들이 그리스도의 속죄 역사의 대상으로 합당하게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은혜 계약은 창조 질서의 목표라고 힐 수 있는데, 그 의미는 본래부터 그러하고 추후에 해석적으로 그렇게 부가된 것이 아니다. 창조의 역사에 다른 역사(救贖史)가 후종(後從)하였다는 말은 옳지 않다. 구속 역사의 필연성은 창조 질서의 특징이며,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KD. III/1, p. 262). 그러나 바르트(Barth)의 이와 같은 창조관(創造觀)은 구속론에 대한 성경의 명문(明文)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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