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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장 강해설교] 안식일 논쟁을 하신 예수님(요 5:17-30)

복음의 능력 2024. 3. 13.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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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장 강해설교 말씀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가지고 유대인들과 논쟁한 말씀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종교인들은 이것을 가지고 논쟁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안식일에 소가 우물에 빠지면 건지면서 병자를 예수님이 고쳐주었다고 예수님을 박했습니다.

 

안식일 논쟁을 하신 예수님(요 5:17-30)

 

. 예수의 증거 5:17-30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을 안식일 파괴자라고 한 비난에 대하여 변론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대하게 된다.

(1) 예수께서는 하나의 원리를 내세우시고 그에 의해 안식일에 있었던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셨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17).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다른 모든 변명은 차치하고 그 전체적인 문제에 해당하는 사실을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12:8)이라는 이미 언급한 사실에 입각하여 주장하신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로 칭하심으로써 이를 명백히 하신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군이심을 주장하신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그러므로 나 역시 그 분과 더불어 일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의해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리스도에 의해 만물을 유지케 하시며 다스리고 계시다. 그 모든 일을 하시는 이는 그 모두의 주인이신 것이요, 이에 의당 안식일의 주인도 되시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주장은 유대인들을 더욱 격분케 만들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18). 그리스도의 변명은 그를 더욱 불리하게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는 그가 안식일 준수를 깨뜨렸기 때문이며 그가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 호칭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하여 열심인 척하며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취급하였다고 몰아세웠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 즉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말씀에서 올바르게 추론해 낸 것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취급하므로 범죄 하였다고 뒤집어 씌우는 것은 정당하지 못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셨으며 지금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목에 대한 답변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주장을 명백히 하셨으며 자신이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함을 증명하셨다.

(3) 그리스도께서는 이 구절에서 중보자로서의 자기의 사명을 해명하시며 확증하신다(19-30). 여기에서 그에게 부여된 영예는 그 어떤 피조물도 받기에 적합지 못한 종류의 것이며, 여기에서 그에게 맡겨진 사역 또한 그 어떤 피조물도 담당하기에 벅찬 일이므로 이러한 사실은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보여 준다.

1)개괄 : 그리스도 예수는 중보자로서 그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성부와 더불어 계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사실은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19)라는 서두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 말은 그 선포된 사실들이 매우 두렵고 큰 일이요, 매우 확실한 일이며, 그 외에는 그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없는 신적 계시에 전적으로 속한 것들임을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역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의 하나 됨을 다음 두 가지 사실로서 말씀하셨다.

성자는 성부를 따른다 :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19). 중보자로서 주 예수는 성부의 뜻에 순복하신다. 그리스도는 성부의 의지에 온전히 자기를 던져 넣으셨으므로 어떤 일이고 분리되어 행동하는 것이 불가능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계획을 엄수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께서 행하신 것을 본 것 외에는 결코 할 수도, 뜻하지도 않으신다. 세상 사람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할 수 없지만, 유일하신 독생자,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시는 바를 친숙하게 아시며 자기 앞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성부께서 자신의 경륜 안에서 행하신 바를 성자께서는 이제까지 보아 오셨으며 지금도 보고 계셨다. 그리하여 성자께서는 그 일 하시는데 일어서도 성부와 동등하시다. 그 이유는 성부께서 행하시는 그 일을 성자께서도 그와 같이 하시기 때문이요, 그와 똑같은 일을, 곧 그러한 종류의 일이 아니라 그와 똑같은 일을 하시며,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와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그와 동일한 에너지와 효력을 가지고 그 일들을 하시기 때문이다.

성부께서는 성자께 보이신다(20).

그 동기 :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그리스도께서는 당시 인간의 미움을 받으셨지만 자신의 아버지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이러한 사실에 의해 스스로 위로를 삼으셨다.

그 실례 : 성부께서 성자께 보이신다는 사실은 다음의 두 경우에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성부가 지금 현재 행하시는 일을 성자께 보이시는 속에서 '자기의 행하시는 일을 다 아들에게 보이사'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그 아들에게 보이시며 그를 통하여 이루신다. 왜냐하면 성자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성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하실 더 큰 일을 성자께 보이시는 속에서, 불구된 이를 온전케 하는 일보다 더 큰 사역으로서, 그것은 자신이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일이요, 직접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는 일을 가리킨다.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믿음에 이르지 못한 많은 이들이 그러한 그리스도의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로부터 영광을 거두실 것이요, 그들도 그것에 의하여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2)세부적 내용 :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행하시는 일들 중 어떤 일을 특별히 드심으로써 즉 하나님께 속한 독특한 사역을 예로 드시므로 자신과 성부의 동일성을 증명하신다. 이러한 내용이 21-30절에 걸쳐 상술되어 있다.

여기에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며 생명을 주시는 중보자의 능력에 관해서 살펴보자.

그 일을 할 수 있는 그의 권위 :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살리느니라(21).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은 하나님의 대권에 속한 문제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다는 것은 평범한 자연적인 일도 아니요 자연력의 영역을 연구한 자들의 사고의 대상이 될 수 조차 없는 것이다. 부활이란 전적으로 신적 권능의 사역이요, 그에 대한 지식 역시 전적으로 신적 계시에 의한 것이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러한 대권을 부여받으셨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경로에 따라 자기 빛을 비추는 태양과 같이 자연적 필연성에 의해 만물에 생명력을 부여하시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신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속해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신적인 지혜와 주권도 마찬가지로 지니신다. 즉 중보자로서 그리스도께서는 무덤과 사망의 열쇠를 지니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시는 그의 능력 :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26). 성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확실한 일이다. 성부는 생명을 주권적으로 수여하시는 분이시다. 즉 성부께서는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하신다. 그리고 또한 모든 선한 것에 대해서도 그 처분권을 가지고 계시다. 성부께서는 모든 피조물에게 있어서 생명과 모든 선의 원천이 되신다. 이러한 성부께서 그 아들 안에 생명이 있도록 그 아들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 또한 확실하다. 구속자로서 성자는 모든 신령한 생명과 선의 기원이 되신다. 성부께서 온 세상에게 그러하듯이 성자는 교회에 대하여 그러하시다. 창조주의 손안에 섭리의 대상이 되는 권능의 왕국이 있듯이 은혜의 왕국과 은혜의 왕국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은 구속주이신 성자의 손안에 충만하게 절대적으로 놓여 있다.

이 권위와 능력에 따른 그의 행동 : 그분의 강력한 말씀에 따라 이루어지는 두 가지 부활이 있으며 양자는 여기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의 부활은 지금 이 때(29)의 부활로 죄의 심연에서 의의 생명으로 이행하는 부활이다.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25). 이는 이미 시작된 부활이다. 이 부활은 마지막 때에 있을 부활에 대한 언급과 명백하게 구별되어 있다. 혹자는 예수께서 기적으로 살려내신 사람에게서 이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보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권능에 속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권능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 다시 회복되었으며 생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2:1). 또한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죽었던 영혼들이 다시 살아날 때가 오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때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계셨던 그동안이었던 것이다.

그 부활은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복음이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던 모든 사건들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 때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며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죄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비참한 상태이지만 자기들의 비참을 느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상태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능력도 없는 것이다.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회심이야말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영혼의 부활인 것이다.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이켜 살기 시작할 때 그 영혼은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혼들이 신령한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에 의해서이다.

우리가 그 음성에 의해 살아나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만 한다. 또 하나의 부활은 장차 임할 부활로서 이에 대해서는 28,29절에 나타난다. 이 부활의 때는 다가오고 있다. 이는 아직 임하지 않았으므로 25절에서 말하는 '때가 오나니 곧 때라'의 그 때가 아니다. 이 부활의 때는 언젠가는 임할 것이요, 오고 있는 중이며 매일매일 점점 가까워 오고 있다. 그 부활의 때가 얼마나 다가왔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누가 부활하는가?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가 일으킴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 심판장 앞에 서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일으킴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덤은 죽은 자들의 육신을 가둬 놓는 감옥으로 거기에 그 육신들은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그 무덤을 다시 깨어나기 위해 잠들어 있는 침실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 자는 사람들은 어떻게 부활하게 되는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28). 여기에는 음성과 함께 그 사람들 속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 음성에 복종토록 하는 신적 권능이 함께 따라올 것이다. 이들은 그 무덤에서 나오게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정에 출두하게 될 것이다. 어디로 일으킴을 받게 되는가? 저들의 서로 다른 성격에 따라 행복과 슬픔이라는 다른 처지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

곧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이런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다시 살아나게 된다. 그 큰 날 생명의 부활은 선한 일을 행한 사람들에게만 유익이 될 것이다. 선한 일을 행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엄위 앞에 나아갈 수 있으니 그것이 곧 생명이요, 생명보다 더 좋은 것이다.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은 다시 살되 영원히 죽기 위해 다시 살아난다.

심판을 행사하시는 중보자의 권세에 대하여 살펴보자(22-24, 27).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전능하신 권력을 쥐고 계시며 이와 같이 주권적인 재판권도 지니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자의 직임을 위임받으셨다는 사실이 여기에 두 번 언급되어 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 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22).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27).

성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시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통치권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창조했다는 권리만으로 우리를 지배하지는 않으신다. 우리를 만드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을 다루듯 맘대로 우리를 취급하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 따라서 그 심판의 문제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속죄하심으로 중보자에게 이양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통치 방식을 세우셨으니, 창조주의 율법 아래서가 아니라 구속주의 은혜 아래 다스림 받도록 하셨다.

성부께서는 심판을 다 성자에게 맡기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화목케 하시며 그리스도에게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줄 권한을 주셨다. 생명책은 어린 양의 책이다. 어린 양의 판정에 의해 우리는 서기도, 넘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날 있을 심판을 주관하도록 위임받으셨다. 종국적이며 우주적인 재판이 인자에게 위임되어 있는 것이다.

성자이신 중보자께서는 심판을 담당하실 권한 또한 부여받으셨다(27). 사람들에게 심판을 행하시는 그분이 바로 사람들을 위해 구원을 이루신 분이시다. 어떻게 그가 그런 권한을 가지게 되었는가? 성부께서 그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높여 주며 큰 확신을 가지고 그분의 손길에 담대히 모든 것을 맡기는 신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 두 가지 이유로 모든 심판을 위임받으셨다.

첫째, 그가 인자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지칭한다.

그의 수욕과 자비의 겸손 : 이같이 비천한 지경에까지 그리스도께서는 낮아지셨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기까지 낮아지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다(2:8,9). 그리스도의 우리와의 유사성 : 인자가 되시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다스릴 자들과 똑같은 본질을 지니시게 되었다. 약속된 메시야가 되셨다는 사실 : 그는 메시야이시다. 그러므로 메시아로서 이 모든 권력을 부여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보통 자신을 겸비한 명칭이었으며 그가 유대 민족만의 왕과 구주가 아니라 전 인류의 왕과 구주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 모든 사람으로 성자를 공경하게 하기 위하심이다(23).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을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요 인간의 가장 큰 의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 아들을 높여야 하고 주님으로서 고백해야 하며 그분을 경배해야 하고 우리를 위해 모든 명예를 버리신 그분께 명예를 돌려 드려야 한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23). 이 구절은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전제하며 우리에게 그 아들을 공경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이러한 법을 강화하기 위하여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느니라'는 말이 부기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구속자에 대해서는 불경스럽게 말하면서도 창조주께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는 체하며 공경스럽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주 예수께 대한 불손은 곧 하나님 그분께 대한 모독이다. 성부께서는 성자께 대한 것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신다. 이는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전권 대사에 대한 모욕은 당연히 그를 보낸 군주의 분노를 사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한 법칙이 나오는데 이에 준하여 성자께서는 이러한 위임권을 실행하신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24). 여기에서 우리는 전체 복음의 요체에 접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성격 :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24).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실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을 단지 듣기만 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듣고 순종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과 행함의 확고한 법칙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거해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성자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이시며 하나님은 우리의 안식이시다. 기독교인의 특허 곧 사면의 특허 :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들으면 살리라' '믿으면 살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담대히 우리의 영혼을 의지해야 할 말씀이다. 다음에는 이렇게 진행하는 데 있어 그의 의로움에 대한 것이다. 나의 심판은 의로우니라(30). 그리스도의 심판은 확실히 공정하다. 판결은 성부의 지혜에 의해 지시를 받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앞서 이미 말씀하신대로(19절) 그리스도께서는 들은 그대로 심판하신다. 성자께서는 성부께서 하시는 것을 본 것 이외는 결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 또한 듣는 대로 곧 성부께서 말씀하신 바를 듣는 그대로 행하신다. 하나님의 은밀하고 영원한 경륜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심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알고자 할 때 우리는 무엇에 근거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청종하라. 그리스도께서 결정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의 복사판이라 할 것이다.

구약 성경은 또한 예수님의 판단의 척도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을 성경의 관점에서 행하셨다. 경에 기록된 바 즉 성부의 뜻대로 행하셨다.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30). 그리스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결코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인간 본성의 자연적이며 순수한 감정, 고통과 쾌락에 대한 느낌, 생에 대한 애착, 죽음에 대한 혐오감 등을 가지고 계셨으나 자기를 기뻐하지 아니 하시고 성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셨다. 중보자로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은 자신의 독자적인 목적이나 계획의 결과가 아니었으며 성부의 뜻에 따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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