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마태복음 산상수훈 강해설교] 황금률(마 7:12)

복음의 능력 2024. 3. 23.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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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장 산상수훈 강해설교 말씀은 황금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지 중에 손님을 대접하여 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천사를 대접하므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대접받기를 원하면 남을 대접해 주면 됩니다.

 

황금률(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너희도 그들에게 그대로 해 주라. 이것이 율법이요 대언자들이니라."(7:12)

황금률에 관한 주님의 논평은 "이것이 율법이요 대언자들이니라"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황금률은 율법과 대언자의 요약입니다. 황금률은 율법과 대언자들의 전() 목적이요 목표입니다. 주님께서는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산상설교에서 자주 사용하셨던 바와 같이,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율법이 오해를 받아온 비극적 태도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의 다른 예(例) 일뿐입니다. 아마도 주님은 여전히 율법 박사요 백성들의 지도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유의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옛 사람들이 말한 바,..., 한 것을 너희가 들어왔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말씀하셨던 많은 문제들에 관해 얼마나 장황하게 다루셨는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님의 지대한 관심사는 이 사람들에게 올바른 율법관을 주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은 다시 한번 이 문제로 돌아오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절반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의미와 참 성격과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단지 지켜야 할 수많은 규칙과 규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정신을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율법을 기계적으로 준수해야 할 어떤 것으로, 우리와 분리된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마치 기계가 발행한 규정집으로 간주합니다.

당신이 기계를 사고 그 기계를 사용하는 규칙과 규정을 얻으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 규칙과 규정대로 작동하는 것뿐입니다. 항상 우리는 삶에 관한 하나님의 율법을 다소 이러한 방법으로 간주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면, 위험은 항상 우리가 율법을 율법 그 자체로만 간주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그 규정을 지키는 것이며, 만약 우리가 규정을 지키고 그 규정으로부터 이탈하지 않거나 넘어서지만 않으면 만사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율법관입니다.

어쩌면 더 나아가 우리의 위험은 율법을 어떤 부정적인 것으로, 어떤 금지사항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율법에는 부정적인 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여기서 강조하시는 것은, 마태복음 5 장에서 장황하게 말씀해 주셨거니와,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들과 모세의 중보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주신 율법은 매우 긍정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결코 기계적인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모든 오류는, 본질적으로 영적이요 살아있는 것을 기계적인 것으로, 그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 축소시켰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실지로 사람을 살인하지 않은 한 살인에 관한 법을 지켰으며, 육체적인 간음을 범하지 않은 한 도덕적 의미에서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영적 취지를 보는 일에, 율법의 영적 특성을 보는 일에 완전히 실패하는 죄를 범했으며, 무엇보다도 율법을 주신 위대한 목적과 목표를 보는 일에 완전히 실패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황금률로 완전하게 요약하셨습니다. 율법은 어째서 이웃의 재물이나 소유물이나 이웃의 아내나 기타의 것을 탐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까? 율법은 어째서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라고 말합니까? 이것은 모두 무엇을 의미합니까? 단순히 여러분이나 제가 이러한 것들을 규칙과 규정으로, 또는 우리를 지배하고 통제하여 어떤 제한사항들 안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법의 항목으로 붙들도록 고안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결단코 그것은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율법의 이면에 있는 전() 목적과 참된 정신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며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단순히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합니다. 타락의 결과로 우리는 죄투성이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풀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자신이 너희 생명을 귀하게 여김같이 다른 사람도 자기 생명을 귀하게 여김을 기억하라. 그 사람에 대한 너희의 태도가 옳다면, 너희는 그 사람을 죽이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너희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그 사람도 자기 목숨을 귀하게 여김을 너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그 사람을 사랑하며 여러분이 그를 이해하며 여러분 자신의 행복을 원하는 만큼 여러분의 이웃의 행복을 원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율법이요 대언자입니다. 그것은 모두 이 말씀으로 귀착됩니다. 구약의 율법에 주어진 상세한 모든 규약, 곧 행하라고 말하는 바는, 예를 들면, 여러분이 이웃의 소가 길을 잃은 것을 볼 경우, 그것을 어떻게 이웃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는가, 또는 여러분이 그의 농장에서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것을 볼 경우, 어떻게 그에게 속히 알려주어야 하며, 그를 돕기 위해 어떻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가, 등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단지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인도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내 이웃의 소가 길을 잃은 것을 본다면 나는 그 소를 데려다주어야 한다고 율법은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율법은 오히려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 '이 사람은 나 자신과 같다.

그가 그 소를 잃는다면 이것은 그에게 괴로운 일이 될 것이며, 손해가 될 것이다. , 그는 나 자신과 같다. 만약 다른 사람이 내 소를 되돌려주면 나는 얼마나 고마워할까. 그러므로 그를 위해서 이렇게 해야겠다'라고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여러분은 이웃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를 사랑해야 하며 그를 도와주기를 원해야 하며, 그의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로 이렇게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이 상세한 규정들은 단지 저 중심 원리에 대한 예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이요 율법의 목적임을 인식하는 것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아무런 소망도 없이 그 길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상은 율법에 대한 우리 주님의 해석입니다. 이것은 주님 당시에 매우 필요했습니다. 그러고 오늘에도 매우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살도록 명령하신 율법의 정신과 생명의 정신을 끊임없이 잊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모든 것을 현대 세계와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황금률을 듣고는 황금률을 놀랍고 신기한 것으로, 크고 복잡한 주제에 대한 하나의 완전한 요약으로 찬양합니다. 그러나 비극은 사람들이 황금률을 찬양하면서 이행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은 찬양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이나 제가 율법을 논평하도록 하기 위하여 산상설교를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율법을 실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자기 집을 바위 위에 건축한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나...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자기 집을 모래 위에 건축한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라고 말씀하실 때 기억나게 될 것입니다.

현대 세계는 이와 같습니다. 현대세계는 그리스도의 이 놀라운 말씀에 감탄하지만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중요한 의문점을 갖게 합니다. 사람들은 어째서 이 황금률을 저버리는가? 그들은 왜 황금률을 지키지 않는가? 그들은 왜 이 같은 방식으로 삶을 살지 않는가? 문젯거리와 분쟁이 어째서 국가들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국가들 내의 다른 계층 간에, 심지어 가정 안에, 심지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가? 분쟁과 다툼과 불행이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왜 우리는 항상 서로 대화를 하지 않으며 마주 보기를 피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일까? 어째서 시기와 험담이 있으며, 기타 모든 것들의 삶의 진상들이 어째서 다 이런가?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 대답은 신학적이며 성경적으로 깊은 것입니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학을 싫어하며 특히 사도 바울의 신학을 싫어한다고 자주 말해왔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복음을 좋아하며 특히 산상설교를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산상설교는 실제적이며 그 속에 신학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한 구절(황금률)이 입증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견해, 곧 오직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며, 그들이 해야 할 바를 말해주며, 그들 앞에서 황금률을 지키며, 그들에게 지적 훈련을 시켜서 그 결과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고 일어나 실행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거의 이천 년간 황금률이 인류를 대면해 왔으며 특히 지난 이 백 년간 사람들을 개선하기 위해 입법과 교육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으나, 여전히 사람들은 황금률을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렇습니까? 신학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복음의 첫 번째 진술은 인간이 죄투성이며(sinful) 비뚤어졌다(perverted)는 것입니다. 인간은 악에게 너무나 속박되고 지배를 받는 나머지 결코 황금률을 지킬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복음은 항상 이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신학의 첫 번째 원리는 인간의 타락과 인간의 죄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율법과 대언자의 요약인 황금률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대한 인간의 전()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인간은 율법을 미워합니다.

"이는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께 대적이 됨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치 아니할 뿐 아니라, 실로 할 수도 없느니라."(8:7).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들 앞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미워하며 율법을 원치 않습니다. 물론 그들이 안락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처럼 삶에 관한 추상적인 진술을 듣는 때에는, 율법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들에게 율법을 적용하는 경우, 그들은 즉시 율법을 미워하며 율법에 대하여 반발합니다. 율법이 그들에게 적용되는 순간, 그들은 율법을 싫어하며 분개해합니다.

왜 그들은 이와 같습니까?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본성적으로 이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율법을 싫어하기 이전에, 율법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었기에 이전에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의 표현입니다. 율법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의 표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싫어하는 것은 그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논증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과 대적이 되나니" 자연인은 타락의 결과로 근본 존재가 하나님의 대적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외인(外人)입니다. 자연인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는 자"입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싫어하며, 하나님과 그분께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미워합니다. 왜 이렇습니까? 궁극적인 대답은 자신에 대한 그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그리고 본성적으로 이 황금률을 실행하려 하지 않는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아(self)'라는 한 단어로 귀착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란 말씀으로 표현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가 행하지 않고 있으며 또 행하려 하지 않는 유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아를 너무나 그릇되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며, 결코 우리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타락의 결과로 죄 안에 있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자기중심적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 누구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습니다.

이것은 나의 의견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 대한 단순한 문자 그대로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조차도 이것이 자주 사실로 남아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우리 모두는 자기중심적입니다. 우리는 남이 우리에게 하는 말과 우리에 대해 생각하는 바에 대해 분개하면서도,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자아를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이 자아중심성과 자립성을 간섭하시는 분이시라는 이유로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완전히 자율적(自律的)인 존재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에 도전하시는 분이 계시며, 사람은 본성으로 그분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황금률에 따라 사는데 실패하고, 황금률을 지키는데 실패하는 것은 그가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어서 자기만족, 자기 방어, 자기 관심으로 이끕니다. 자아는 어느 때고 선두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무엇이든지 자신을 위해 원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러분의 노동쟁의의 문제의 실제 원인도 이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모두 이것에 귀착됩니다, 한편에서는 '나는 더 가질 권리가 있다'라고 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글쎄, 그가 더 가진다면, 나는 덜 갖게 되겠는데' 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에 대하여 반대하며 그 결과 싸움이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각자는 오직 자신들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특정한 분쟁의 특별한 공적을 다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질 자격이 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쓰라림은 항상 죄와 자아 때문에 들어옵니다.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경제적이든, 국가적이든 또는 국제적이든, 우리가 이러한 모든 문제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분석하는데 충분히 정직하다면, 모두는 이것으로 귀착됨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국가들 사이에서도 봅니다. 두 나라가 동일한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각자가 상대방을 지켜봅니다. 모든 나라들은 자신들을 단지 세계 평화의 수호자요 관리자로 보려고 애씁니다. 애국심에는 항상 이기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나라''나의 권리'입니다. 다른 나라도 동일한 말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자아 중심적이기 때문에 전쟁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 사이든, 사회의 각 분야 사이든, 각 국가 사이든, 국가 동맹 사이든, 모든 분쟁과 다툼과 불행은 결국 이것에 귀착될 뿐입니다. 오늘날 세계 문제들의 해결책은 본질적으로 신학적인 것입니다. 군비축소와 기타 모든 문제에 관한 모든 회담과 모든 제안은 개인과 그룹과 국가들을 통제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 죄가 있는 한 수포로 돌아갑니다. 황금률을 실행하는데 실패하는 것은 오로지 타락과 죄 때문입니다.

, 이것을 긍정적으로 설명해 봅시다. 어떻게 하면 황금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실제적인 질문은, 어떻게 우리의 태도와 행위가 여기 우리 주님의 말씀과 일치할 수 있을까?입니다. 복음의 대답은 여러분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둘째는 그와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22:37-40). 순서를 주목하십시오. 여러분의 이웃에서 시작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십시오.

개인 사이든, 국가 동맹 사이든,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기 전까지는 이 세상의 관계는 결코 올바르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는 결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과 이웃을 보기 전에는 결코 여러분 자신이나 이웃을 올바로 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둘을 바른 순서대로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하여 피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참되게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모든 다툼과 분쟁과 문제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거룩과 전능하심으로, 창조주의 권능으로 그분을 보기 시작하며, 그분 앞에서 겸손해집니다. 그분만이 홀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국가들조차도 메뚜기떼와 같고, "천칭의 작은 먼지"와 같음을 알고, 우리가 참되게 하나님을 볼 때 인간의 모든 자랑과 영광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자신을 죄인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전에 권리를 가졌던 사실을 잊은 악한 죄인으로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권리도 전혀 없음을 확실히 봅니다. 우리는 비참하고 더럽고 추합니다. 이것은 성경만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의 체험에 의해 충분히 확증된 것입니다. 이는 모든 성도의 체험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을 가치 없는 피조물로 본 적이 없다면, 과연 여러분이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나는 부정하다"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 존전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진정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정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를 먼지와 같이 낮춥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여러분은 자신의 권리와 위엄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자신이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다음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우리는 이제 그들을 볼 때, 더 이상 우리에게서 권리를 빼앗으려고 애쓰거나, 돈이나 지위나 명성을 위하여 경주에서 우리를 이기려고 애쓰는 미운 사람들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치 자신을 보듯이, 그들을 죄와 사탄의 희생자로, "이 세상 신"에게 잘 속는 자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서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는 동료 피조물로 봅니다. 우리는 그들에 관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견해를 갖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 자신과 똑같이 봅니다. 우리는 모두 무서운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필히 그리스도께로 함께 달려가서 그분의 놀라운 은혜를 이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은혜를 누리기 시작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우리가 원하는 만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자아의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으로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며,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기 시작합니다.

끝으로, 은혜는 당연히 이렇게 역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에 관한 진리와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인식할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의 공로에 따라 우리를 다루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앞 절에서 말씀하셨던 바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자기 아들이 빵을 구하는데 돌을 주고 생선을 구하는데 뱀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것은 논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함 그대로 우리를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떠함 그대를 우리를 보셨다면, 우리는 모두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떠함 그대로 우리를 보셨다면, 우리 각자는 모두 영원한 정죄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애로우신 아버지로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와 긍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우리의 어떠함 그대로 다루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다루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논증을 간직해 두셨다가 이 놀라운 기도 뒤에 놓으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주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 너희도 주변 사람들을 이와 같이 대하라. 불쾌하거나 까다롭거나 추한 것만 보지 말라. 이 모든 것의 이면(裏面)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영원히 정해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들을 바라봅시다. 이러한 새로운 방법으로, 이러한 신성한 방법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법을 배웁시다.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살펴본 것같이 너희도 그들을 바라보라. 그리고 너희를 위해 내 생명을 주기 위해 나를 하늘로부터 이곳에 오게 한 사실에 비추어서 그들을 바라보라".

이와 같이 그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렇게 행하는 순간 여러분은 황금률을 실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여러분은 자아와 자아의 무서운 횡포로부터 벗어나서 사람들을 새로운 눈으로 달리 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바울과 같이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후로는 아무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후 5:16). 여러분은 모든 사람을 영적으로 바라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죄와 자아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이 지점에 도달할 때에 비로소 율법과 대언자들의 이 놀라운 요약을 실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너희도 그들에게 그대로 해 주라"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심 받은 목적입니다. 우리는 황금률을 실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황금률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세상에 보여줄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교사와 대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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