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장 성경말씀은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모퉁이 돌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특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어부들과 병자들과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행 4:1-14)
Ⅰ. 베드로와 요한이 옥에 갇힘 4:1-4
본문에서 우리는 제자들을 지지하려고 맞서는 악의 세력을 보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종들이 매우 담대해질수록 사단의 대리자들은 더욱 사악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단의 대리자들이 매우 사악해질수록 그리스도의 종들은 더욱더 담대해져야만 한다.
1.사도들의 활동(1-4)
사도들, 곧 베드로와 요한은 계속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복음전도자들은 신실하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1절). 그들은 백성들을 가르쳤다. 즉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또 믿는 이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기 위해 가르쳤다. 그들은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했다. 죽은 자의 부활 교리는 예수를 통해 확증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 근거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르쳤다. 부활의 교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든 믿는 이에게 보장되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그만을 통해서 이것을 얻을 수 있다고 전했다. 그들은 여러 일에 관여하지 않고 그들의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에게 하늘나라를 그들의 목표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유일한 길로 가르쳤다.
[2]말씀을 듣는 이들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4절). 전도자들은 핍박을 받았지만, 말씀은 널리 전파되었다. 때때로 교회의 고난의 시기가 교회의 성장의 시기가 되곤 하는데 특히 교회의 초창기가 그러했다.
2. 제사장들의 음모(2,3)
제사장들과 그들의 무리는 사도들을 억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손을 묶어둘 수는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조금도 변화시킬 수가 없었다. (1)사도들을 대적한 그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제사장들이었다. 거기에 성전 말은 자가 합세했는데 그들은 성전을 지키기 위한 로마의 관리였다. 여기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동조하였다. 사두개인들은 '영혼의 존재와 내세를 부인'했는데 그들도 열렬하게 사도들을 반대했다. (2)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어떻게 대적하였는가.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바를 싫어하였다(2절). 그들은 복음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도 싫었고, 백성들이 그 말씀에 모여드는 것도 싫었다. 그들은 복음이 사라지기는커녕 단단한 기반을 갖게 되는 것을 보고 애가 탔다.
그리스도 왕국의 영광이 고통이 되는 그들은 참으로 비참하다. 또한 그들은 사도들이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함을 싫어하였다. 특히 사두개인들은 부활의 교리가 전파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들은 그 교리를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제사장들도 그들이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를 전파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예수를 통해 입증되고 선포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중요한 교리를 포기하려고 하였다. (3)그들이 사도들을 어느 정도 핍박하였는가.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3절).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종들이 고난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훈련시키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비록 지금은 감옥에 갇힌 정도이지만 앞으로는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Ⅱ. 베드로와 요한이 심문 받음. 4:5-14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교 법정의 재판관들 앞에서 심문받는 기사이다.
1. 재판 광경(5,6).
본문에는 재판 광경이 묘사되고 있다. 아마도 사도들을 심문하기 위한 특별 재판이었던 것 같다. (1)재판이 열린 때는 이튿날 아침이었다(5절). 그들은 지체 없이 사도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단지 이튿날 아침으로 연기하였을 뿐이다. (2)재판이 열린 곳은 예루살렘이었다(6절). 그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구속을 고대하고 있었으나 막상 구속이 도래한 후에는 그것을 구속으로 여기지 않았다. (3)법정의 재판관들은 다음과 같은 자들이었다. ①그들의 일반적인 신분은 5절에 기록된 바대로 '관원들과 장로와 서기관들'이었다. 서기관들은 학식이 많은 사람들이었으며 관원과 장로들은 권세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의 학식 있는 자와 권세 있는 자들의 반대를 받았던 것이다. ②그들 중의 몇 사람은 유력한 인물들이었다. 여기에는 핍박의 주모자였던 안나스와 가야바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안나스는 산헤드린의 의장이었으며 가야바는 대제사장(본문에는 안나스도 그렇게 불리고 있지만)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다 같이 대적하였다. 또 대제사장의 문중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대제사장에게 의존하여 그가 말하는 바는 모두 지지하였다. 옳지 않은 일에는 아무도 지위가 높은 친척일지라도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
2. 죄수들이 법정에 끌려나옴(7)
재판관들은 사도들을 가운데로 세웠는데 당시 산헤드린은 원형으로 앉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즉 누가 너희에게 이 같은 교리를 가르치라고 명하였느냐? 누가 너희에게 이와 같은 기적을 행하도록 권능을 주었느냐?"라고 질문했다. 그들은 사도들이 예수에 대해서 가르쳤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2절). 그러나 그들은 사도들에게서 죄의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 질문하고 희롱하고 심문하였다.
3. 사도들의 항변(8-12).
그들의 항변은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결백을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주님의 영광과 이름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1]이 항변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성령의 지시를 받은 것이었다. 사도들은 오직 그리스도만 전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마땅히 할 말을 그때에 그들에게 가르치시리라는 약속을 이행하셨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변호자들은 결코 어떠한 지시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막 13:11).
[2]누구에게 이 말씀이 주어졌는가. 베드로 자신이 백성의 지도자이며 이스라엘의 장로들인 법정의 재판관들에게 말하였다. 그는 권세가진 자들의 사악함을 지적하여 그들에게서 권력을 빼앗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있는 권세를 재고하게 하여 그들에게서 사악함을 제거하고자 했다.
[3]무엇을 항변했는가.
(1)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였다고 대답했는데 이것은 법정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이었다. "만일 병인에게 행한 이 착한 일에 대하여 그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9,10절).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가 앉은뱅이를 고친 일을 정당화시킨다. 그것은 착한 일이었다. 이제 우리가 이것을 착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로 인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이 부끄러워해야 한다.
선한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고난 받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베드로는 이 선한 행위에서 비롯된 찬양과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렸다. "이 사람이 병 고침을 받은 것은 주님의 능력이지 우리의 능력 때문이 아니다. 오직 주님만이 높임을 받을지어다. 우리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것도 없도다." 베드로는 재판관들이 예수의 살인자였다고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시킨다. "너희가 십자가에 목 박은 바로 그 분이시다."그는 그들의 죄 가운데서 가장 양심을 찌르는 죄인 그리스도를 죽게 한 죄를 그들에게 깨닫게 하려고 노력한다. 베드로는 그들로 깨닫게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위해, 또 자신의 핍박자에 대항하기 위해 가장 강력한 증거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장한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셨다. 그들은 그의 생명을 빼앗았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다시 생명을 주셨다. 그는 방청객들에게도 이 사실을 전해 준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즉 예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으며 그 때 이 이름은 주문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향하신 은총과 선한 의지에 대한 신의 계시로써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2)이러한 예수의 이름은 그것으로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이름이다. 사람들이 이 이름을 믿고 부르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 안에서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것을 행하여야 한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절). "너희들은 바로 백성의 통치자이며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며 마땅히 교회의 건축자가 되어야 할 자들이다. 여기에 너희에게 머릿돌이 주어졌으나 너희는 그것을 거절하고 내던져 쓸모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돌이 이제 머릿돌이 되었다. " 여기서 베드로가 이 인용문을 택한 것은 바로 얼마 전에 그리스도 자신이 이를 사용하셨기 때문인 것 같다(마 21:42). 우리의 영적인 투쟁에 있어 성경은 믿을 수 있는 무기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충실하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성경에 몰두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12절). 다른 이름으로 병든 육체를 치료할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이름으로는 죄 많은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최대 관심사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자신을 파괴할 뿐이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닌 명예로서 오직 이 이름으로만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이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이 이름을 선택하셨다. 그것은 하늘 아래로 주어졌다. 그는 하늘과 지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 그것은 구원이 필요한 인간 가운데 주어졌다.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구원받아야 하며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서 그 자신들의 지식에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 과연 어느 정도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랑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 덕분이며 오직 그를 위하여서인데 이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4. 법정의 반응(13,14).
[1]그들은 앉은뱅이에 대한 치료가 선한 일인 동시에 기적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들은 힐난할 말이 없었다(14절).
[2]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이것은 앉은뱅이에 대한 치료 못지않게 기적이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았다(13절). 그들은 통치자들을 겁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통치자들을 두렵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언자들의 용기는 종종 그들의 잔인한 핍박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1)그들의 놀람이 커졌다. 그들은 사도들을 그 본래 학분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 그들은 사도들을 심문하여 그들이 갈릴리 태생으로 나면서부터 어부인, 학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임을 알았다. 그런데 그 사도들이, 그들에게 메시아와 그의 나라에 대하여 질문하면 아주 적절하고 유창하게 성경을 인용하였다.
그래서 의자에 앉아 있던 학식이 풍부한 재판관도 그들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들은 범인들이었다. 즉 그들은 공적인 활동이나 관직을 맡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유롭게 처신하는 것을 보고 모두 놀랐던 것이다. (2)그들은 대단히 놀라서 사도들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13절). 심문자들은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던 줄을 깨닫게 되자 그들의 담대함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게 되었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은 매사에 스스로 행동하므로 그들과 대화를 나눠본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던 줄을 알게 된다. 즉 우리는 그들의 얼굴이 빛나는 것을 봄으로써 그들이 변화산에 머물렀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잠언 새벽 설교문] 말, 재물, 성공, 이웃을 통한 의인과 악인 비교(잠 1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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