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고난주간 설교]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아리마대 요셉(마 27:57-66)

복음의 능력 2024. 3. 19. 16:09
반응형

마태복음 27장 고난주간 설교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난 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여 장사를 지내게 됩니다. 우리가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죽음이 자기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가 들어갈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 지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고난주간에 우리도 요셉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아리마대 요셉(마 27:57-66)

 

. 그리스도의 장사 지내심 27:57-66

이 본문에는 그리스도의 장사 지내심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 예수의 시체를 무덤에 넣어 둔 그의 친구들의 호의와 선의. (2) 예수의 시체를 무덤 속에 보존하고자 하는 그의 원수들의 악의.

(1) 그리스도의 친구들은 그를 '세 무덤'에 장사 지냈다(57-61).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사' 되셨다. 그의 고귀한 영혼이 천국으로 가자 그의 정결한 몸은 무덤 속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그의 죽음을 더욱 확실하게 나타내고 그의 부활을 더욱 빛내기 위하여 장사되었다. 그리고 빌라도는 그가 정말로 죽었다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그의 시체를 넘겨주어 장사도 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장사된 것은 무덤의 공포를 제거하고 우리를 안심시키며 또 그 싸늘하고 불쾌한 침상을 포근하고 향긋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와 함께 장사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장사와 관련된 세부적인 사건들

그가 장사된 시간(57) : 그것은 '저물었을 때'였다. 그가 장사된 시간은 그가 죽은 바로 그날 저녁 해가 지기 전이었다. 그리고 행악자들은 보통 이때에 장사되었다. 장사지내는 것이 더 연기되지 않았던 것은 그다음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장사를 치른 사람(57) : 그는 아리마대 요셉이었다. 그때 사도들은 모두 달아나고 없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랐던 여자들은 감히 그 일에 개입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선한 사람을 감동시켜 그 일을 하도록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해야만 할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할 수 있는 방편들을 찾아내신다. 요셉은 바로 그런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부자로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재력을 가졌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자로서 언제든지 재력을 필요로 하는 일에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상적인 부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특권이 될 뿐 아니라 기회를 주기도 한다. 게다가 만일 그 세상적이 부를 소유한 자들이 그 부를 사용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 한다면 그들은 그 부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둘째, 그는 우리 주 예수께 큰 감동을 받았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공개적으로 그의 제자라는 것을 고백하지는 않았다 해도 그는 그의 제자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체를 내주도록 한 빌라도의 허가(58) : 요셉은 '빌라도'에게 갔다. 그는 이런 경우가 닥칠 때 쓰이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시체를 성대하게 장사지내려는 사람에게 기꺼이 그 시체를 내주고자 했다. 요셉의 청원과 빌라도의 즉각적인 허락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을 받으셨으며 또한 그의 순결이 증거 되었다.

그의 시체에 수의를 입힘(59) : 그는 존귀한 공회원이었지만 그 수치스럽고 저주받은 십자가에서 직접 그 시체를 자기의 팔로 안아서 내렸다(13:29).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할 경우 그를 위해 자기를 낮추는 어떤 일도 천하게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쌌다. 그것은 세마포에 싸서 장사하는 것이 그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평범하게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낮추어야 기꺼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시체를 묘실에 넣어둠(60) : 그의 나라가 주목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사적으로 장사된 것은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의 시체는 빌린 무덤 즉 요셉의 무덤에 놓였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머리 둘' 자기의 집도 소유하지 않았던 것처럼 죽고 나서도 자기의 몸을 둘 만한 무덤조차 소유하지 않았다. 무덤은 죄인이 받는 특별한 유업이다. 우리가 진실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죄와 우리의 무덤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무덤으로 갈 때 우리의 무덤으로 간다. 그러나 아무 죄도 없는 우리 주 예수께서는 자기의 무덤을 소유하고 계시지 않으셨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그가 '빌어온' 무덤에 장사된 것은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는 아마도 요셉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준비했을 '새 무덤'에 넣어졌다. 그 무덤은 아주 빠른 시일 내로 부활하게 될 그의 몸이 누워 있기에 결코 더 나쁜 곳이 아니었으며 또한 무덤을 단 시일 내에 자기의 소유로 만든 곳 치고는 다른 곳보다 훨씬 더 훌륭한 곳이었다. 그것은 '바위 속에 판' 무덤이었다. 그리스도의 묘실은 견고한 바위 속에 있어야 했다. 그것은 그의 제자들이 그 묘실에 와서 그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의심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무덤을 묘사할 때 나타난 것처럼(11:38) 이 일 또한 죽은 자를 장사할 때 행해진 유대인의 관습을 따른 것이었다. 무덤이 그의 감옥이라면 이제 그 감옥 문이 잠겨서 자물쇠로 채워지게 된 것이다.

우리가 무덤을 채우는 것처럼 그들은 그 무덤의 입구에 돌을 굴려 놓았으며 또 그것으로써 그리스도를 장사 지내는 일은 끝났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친구들을 장사 지낼 때 그들의 몸을 어둡고 조용한 무덤 속에 넣어두고 그들을 뒤에 남겨둔 채 집을 향해 가는 것보다 더 우울한 일은 없다. 그러나 우리를 뒤에 남겨두고 더 좋은 집으로 가는 것은 그들이다.

장사하는 일에 참석한 사람들(61) : 그 장사는 매우 간단하고 초라했다. 그리고 그 장사에 참석한 몇몇의 선한 여자들은 진실로 슬퍼했다. 그들은 곧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있는 곳까지 갔던 것과 같은 마음으로 이 무덤까지 좇아온 것이다.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우리를 그를 끝까지 따라가게 된다. 죽음 그 자체가 하나님의 불길을 꺼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2) 그의 원수들은 온 힘을 기울여 그의 부활을 방해하려고 했다(62-66). 그들은 '예비일 다음 날''그 이튿 날' 이 일을 했다(62). 그 날은 한 주일 가운데 제 7일인 유대인의 안식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날 하루 종일 무덤 속에 죽은 채로 누워 계셨다. 그 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지은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했어야 했는데 묘실을 안전하게 지키는 일로 빌라도를 만나고 있었다.

1) 빌라도에 대한 그들의 청원 : 그들은 경비병이 묘실에 배치되기를 바랐다.

그들의 청원은 '저 유혹하던 자가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내용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63).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했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핍박자들은 그들의 분노와 악의를 유발하기 위하여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도록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되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죽음의 향기가 되었다.

그들의 청원은 그들의 시기심을 나타내고 있다(64). 그들은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 하여 가고 백성들에게 말하되 그가 살았다'하지 못하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그들이 실제로 두려워했던 것은 그의 '부활'이었다. 그리스도께 가장 큰 영광이 되고 백성들에게 가장 큰 영광이 되고 백성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되는 것이야말로 그의 원수들을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만일 그가 부활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취해온 조처들을 무산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해 놓고도 여전히 그 목적이 다시 허사가 될까 봐 두려워했다. 아마도 대제사장들은 두 명의 존귀한 공회원들인 요셉과 니고데모가 그리스도의 시체를 정중하게 대한 것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께 나사로를 '죽은 자'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사건을 잊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사건은 그들을 매우 당황케 했었던 것이다.

둘째, 그들을 두렵게 했던 것은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살아있을 동안 그를 시인할 용기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고 그렇게 소심한 사람들에게 용기가 생길 리 없는 것이다. 그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가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가 부활했다는 것을 믿게 한다고 해서 무엇을 기약할 수 있을까? 또한 자신들을 기만하고 그의 시체를 훔쳐가서 그가 살아났다'는 말을 한다 해서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대제사장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교리가 전파되어 백성들의 믿게 될 경우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하여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반대하는 자들은 그들의 방해 노력이 좌절될 뿐 아니라 그들의 입장이 비참하고 난처하게 되는 것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잘못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들의 잘못 보다 더 악하며 또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악한 잘못이라는 것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고려한 뒤 그들은 그가 죽고 나서 제 3일이 될 때까지 파수꾼이 그 묘실을 지키게 하도록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있다. 분부하여 그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하소서. 이 말을 대할 때 죽은 죄수들에게 달리 파수꾼이 필요없으며 또 무덤은 그 자체로서 안전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2) 그들의 청원에 대한 빌라도의 대답(65) :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친구들에게 그의 시체를 가져가도록 허락하고 또 그리스도의 원수들에게는 그 시체를 지키게 함으로써 양쪽 사람들을 다 만족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가진 쪽과 두려움을 느끼는 쪽을 똑같이 어리석게 여기고 있었다.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그는 마치 그 일에 관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처럼 그 일을 전적으로 그들에게 떠맡기고 있다.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이는 다음 중 하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후자 쪽이 더 가능성이 크다.

그들의 두려움 : 그들은 "죽은 사람에 대해 엄중한 감시를 하소서"라는 뜻의 말을 했었다. 그들의 소망 : 이로 말미암아 빌라도는 다음과 같은 뜻의 말을 했다. "멋대로 행하라. 그러나 만일 그가 하나님이라면 너희와 너희의 모든 파수꾼들이 지킨다 해도 그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터툴리안은 빌라도가 한 말에 대해 논평하기를 그의 양심을 볼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가 이 정도로 뉘우쳤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아그립바나 벨릭스 이상으로 철저하게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다.

3) 무덤을 지키고자 했던 자들의 놀랄 만한 조심성(66) : 저희가 …돌을 인봉하고. 그러나 그들은 그것도 믿을 수가 없어서 '파숫군'을 세워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 하러 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방해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 부활을 지켜볼 수 있게 했고 또 대제사장들에게 그들이 본 바를 말하게 함으로써 선을 이루셨다. 가난하고 연약한 제자들을 막기 위하여 묘실을 지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항하여 묘실을 지키려고 생각한 것도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한다 해도 무익할 뿐 아니라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주간 주일설교말씀] 십자가를 질 수 있나?(마 20:20~28, 요 3:14-17)

 

[고난주간 주일설교말씀] 십자가를 질 수 있나?(마 20:20~28, 요 3:14-17)

기독교에서는 해마다 오는 고난주간입니다. 우리가 한 해를 살아가면서 매년 당하는 고난주간이지만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변화되고 있기 때문에 올해의 고난주간은 하나님 앞에서 더 성숙한

skh12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