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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4장 강해 설교문] 에스더의 결단(에 4:1-17)

복음의 능력 2020. 7. 6.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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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알쓸잡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은 에스더 4장 강해 설교문을 하는데 에스더의 결단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에스더의 결단

 

 

에스더 4:1-17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만이 어떻게 유대인을 전멸하기 위해서, 어떻게 왕의 허락을 받아서 127도의 각 도마다 파발을 보내서 공문을 하달하고, 1213일이 되면 유대인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이고 재산을 탈취하도록 명령했는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수산성에서부터 놀라운 동요가 일어났고, 유대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과 고통이 휩쓸고 지나가는 중이었습니다.

 

 

이때에 모르드개의 행동을 보세요. 그가 이 사실을 알고는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입던 옷을 벗어 버리고,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재를 무릅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대궐 문 앞에까지는 갔지만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베옷을 입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이런 소란을 일으킨 것은 어떻게 하든지 에스더와 접촉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에스더는 유대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왕비가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것을 공개하고, 그것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해진 마당에 쉽게 만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왕이 내린 그 포고문을 붙이는 동네 동네마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3절에 보면 크게 애통하고, 금식하고, 곡을하고,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웠다고 했습니다. 이 단어 하나하나를 따로 놓고 해석할 필요도 없이 얼마나 비통한 통곡소리가 진동했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즉 탄식과 기도가 함께 들어 있는 단어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탄식하고 울부짖다가 나중에는 금식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여 살려 달라는 일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아예 재에 드러누워서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한민족이 함께 재난을 당하고 멸망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에 느껴지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수난을 많이 겪은 우리 민족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상상은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로 생각하면 1910년의 한일합방 조약이 맺어지고 모든 나라의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갈 때의 충격과 고통을 이것과 비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일본의 깡패들이 우리나라의 대궐을 침입해서 왕비를 난자해서 죽였던 그 치욕을 비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당시의 일을 역사책을 통해서만 보니까 실감을 못 느낍니다만, 그때의 그 조상들이 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당한 고통과 자신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일이 하루아침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닥쳤다면 가슴을 치고라도 어떻게 견뎌 내겠지만, 이것을 앞으로 11달 동안을 자신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할 일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지금까지 함께 살고 가까이 지내던 페르시아 사람들이나, 바벨론 사람들도 유대인이 이제는 역적으로 멸족을 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에, 그 사람들을 동정한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비웃고, 조롱하고, 멸시하는 그 표정과 대우를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유대인에게 평소에 좋지 않은 감정이나 앙심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은 무턱대고 유대인의 재산을 공공연하게 빼앗아 가고, 폭행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말리지 않고 법적으로도 보호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도마 위에 놓인 생선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가 막힌 수욕을 앞으로 11개월 동안 당한 다음에 씨도 없이 멸족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고, 재에 않고, 통곡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에스라의 경우에 보면, 속옷을 찢었다고 했고, 수염과 머리를 쥐어뜯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탄식과 회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포로생활 70년에 고국에 돌아와서 예루살렘을 건축하려고 하는데 이방인의 방해로 중단해야 된다고 하니까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욥의 경우를 보면,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밀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욥이 자기의 모든 재산과 자녀들까지 잃어버린 다음의 행동입니다. 이것은 겸허의 자세를 말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이런 변칙행위들이 성경에 나오지만, 일반적으로 공통된 행위는 옷을 찢고-재를 뒤집어 쓰고-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행위는 크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할 때에 저는 3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슬픔을 표하는 것이요,

둘째는 회개를 표하는 것이요,

셋째는 간절한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행동으로 절실한 모습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와 같은 방법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욥은 유대민족도 아닙니다. 굉장히 오래전 사람입니다. 즉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시대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욥의 시대부터 유대인이 아니라도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이라면 슬픔을 당하든지 회개할 일이 있다든지, 특별히 하나님께 부르짖을 일이 있을 때는 이런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후대에 와서 유대인에게 와서는 종교적인 행위를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종교적인 행위로 반복이 되다 보니까 나중에는 그것이 외식으로 흘렀습니다. 제일 좋은 예가 요엘 2:13절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께 돌아올지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회개할 일이 있고, 잘못된 일이 있다 하면 옷은 잘 찢었어요. 사람들 앞에서 옷을 쫙 찢고 회개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잘 못했습니다는 말은 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심으로 회개하는 태도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 회개하는 행동을 보여 주지를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마음을 쏟아 회개하며 자기의 행동을 바꾸는 진실한 태도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가증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나중에 형식주의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중에 유대인들이 더 타락해지자, 형식적으로라도 찢던 옷도 안 찢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에 예레미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예언한 심판의 말씀을 예레미야의 비서 바룩이 여호야김 옆에서 읽어 주었는데, 그때에 여호야김과 그의 신하들은 말씀을 읽고 나면 한 조각씩 두루마리를 찢어 가지고는 불에다 집어넣어 태워 버렸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왕과 그 신하들이 그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옷을 찢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렇게 나중에는 옷 찢는 행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처음에는 옷을 찢으면서 마음도 찢는 진실한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형식적이 되다 보니까 옷은 찢으면서 마음을 찢을 줄 모른 태도로 바뀌었고, 그다음에는 사람들이 더 완악해 가지고 영적으로 캄캄해 지니까 나중에는 옷을 찢는 것 까지도 안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마땅히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베옷을 입을 때 비단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마땅히 내 생활을 돌아보아도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무릎을 꿇어야 할 일인데도 희희낙락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산다면 그 사람의 영혼은 캄캄한 영혼이라고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형통할 때가 언제며, 곤고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별할 줄 아는 태도, 이것은 영적으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분별력이 있는지 스스로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성도들 보면 분별력이 흐릿해진 것을 봅니다. 제가 볼 때에 분명히 저 사람은 저렇게 해서는 안되는데, 분명히 주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서야 되는데, 저 사람은 교회는 다니지만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데- 저렇게 해서는 안되는데 할 때에도 그 사람은 비단옷을 입고 다니고 희희낙락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이야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이 옷을 찢고, 금식하고, 재에 앉아 대성통곡하고, 부르짖는 것은 사람을 보고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만 통하는 이야깁니다. 신앙인에게만 통하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슬픔과 회개와 기도의 모습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와 같은 행해지던 관습이 신양 시대에도 그대로 행해지느냐? 고 물을 때에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슬픈 일을 만날 때에 옷을 찢어요? 안 찢습니다. 재를 머리에 뒤집어씁니까? 굵은 베옷을 입지도 않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하나 있어요. 금식은 합니다. 금식을 하나 신약시대에도 남겨 놓았는데도 주님께서 마 6:16절에 대단히 심각한 경고를 합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왜 슬픈 기색을 내지 말아야 하느냐? 슬픈 기색을 내면서 외적으로 표를 내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의식하는 금식이 아니고,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금식을 해도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오히려 어떻게 금식하는 것이 바른 금식이냐? 금식하는 티를 내지 말라, 그 말씀입니다. 그래서 금식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깨끗이 씻고, 기도를 해도 사람 앞에서 통곡하지 말고 어디를 가라고 했습니까? 18절에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가서 하나님만 보시는데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왜 주님께서 특별히 경고를 하십니까? 하나님 앞에는 외형으로 옷을 찢느냐? 수염을 잡아 뜯느냐? 재를 뒤집어쓰느냐? 하는 이런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실이 중요하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이런 진실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특별히 슬퍼할 일이 있다든지, 회개할 일이 있다든지 할 때에는 겉으로 어떤 티를 내지 말고 오히려 사람 눈에 가리도록 은밀하게 하면서,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 앞에 너의 중심을 쏟아 놓은 태도를 취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음직 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정신 때문에 오늘날 모르드개나 유대인들이 하는 방법대로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중심을 요구하시는 것을 오늘 여기에서 다시 한번 상기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본문 4장에서 보면 그렇게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보기를 원하던 일이 성공을 했습니다. 모르드개가 하던 일을 팽개치고 베옷을 입고 미친 사람처럼 다니니까 결국은 그 소문이 에스더에게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스더가 너무 당황해 가지고 사람을 보내서 위로하려고 해도 듣지 않고 자기와 자기 민족이 당한 형편을 다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당부를 했습니다. 8절이지요.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자기의 민족을 위해서 간절히 구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알아야 합니다.

위기를 만났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통곡하고, 부르짖으면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모르드개나 유대인들이 그냥 수산성에 앉아서 대성통곡하며 하나님이여 살려 달라고 부르짖기만 한 것이 아니고, 에스더 보고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가끔 보면, 하나님의 섭리 신앙을 잘 믿는 사람들이 인간의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신앙을 흔들림이 없이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무감도 철저하게 의식합니다. 하나님 섭리대로 하시겠지! 해서 방심한다든지 아니면 인간의 어떤 책임을 등한히 한다든지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점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모르드개로부터 보고를 받은 에스더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처음에는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변명을 했습니다. 내가 왕을 만난 지가 한 달이 지났는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왕 앞에 갑자기 나갈 수가 있느냐? 만약에 왕이 오라고 하지 않는데도 나가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죽이는 것이 관롄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에스더가 얼마나 고민했는가가 잘 나타나 있는 대목입니다.

 

 

그 당시의 페르시아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는 대제국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민족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같이 단일민족이 아니고, 다양한 민족이 함께 섞여 있었기 때문에 항상 정치적인 불안감이 감돌았습니다. 그래서 왕의 경호를 엄히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왕이 만나자고 하는 사람이 아닌데 왕 앞에 나타났을 때는 가차 없이 죽이는 것도 이런 경호의 일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왕궁의 곳곳에는 언제나 커튼을 쳐 놓고 날쌘 군사가 칼을 들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모반자가 쳐들어 온다든지, 왕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달려들 때에는 사정없이 처단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왕후에게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에스더가 이런 점을 염려한 것이었습니다. 말도 꺼내보지 못하고 죽어 버리면 민족을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일만 악화시킬 우려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아마 결혼한 지 한 5-6년이 지났으니까 사랑이 식었는가 봅니다. 왕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많았으니까 그런 정도의 일은 예삽니다. 그래도 에스더의 입장에서는 섭섭한 마음도 있었겠지요. 어쨌든 에스더를 왕비로 맞이할 때의 그 뜨겁던 감정이 아하수에로 왕에게는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더 난처한 것입니다. 왕이 에스더에게 푹 빠져 있다면 문제는 간단한데 지금의 상황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모르드개의 말이 정말 선지자의 말입니다. - 예언자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13절에 만약에 에스더가 이런 위기에서 잠잠하면 에스더와 그 집안은 망한다 하는 신념이었습니다. 에스더가 소명을 다하지 못하고, 위험을 넘기기 위해서 자기 몸만을 피하면 반드시 이것은 망하는 길이다는 생각을 그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왕궁에서 왕비로 있는 에스더나, 왕궁문에서 일하는 모르드개는 포로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한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든든한 백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민족의 위기 앞에서 그들이 간절히 요청하는 도움을 거절하면 민족을 배반하는 것이요, 그것은 망하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우리의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있을 줄 압니다.

 

 

둘째는 14절에 [하나님은 어떤 길을 통해서든지 유대인을 구원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언약]의 관계이기 때문에 - , 결혼서약을 한 부부처럼 -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위기를 당했을 때 하나님이 가만히 계실리가 없다. 에스더가 나서지 않으면 다른 사람,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은 구원하실 것이다.

 

 

셋째는 14절 끝에 에스더가 왕후에 오른 것은 바로 이런 위기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려고 하는 계획에서였다는 신념이었습니다. , 에스더가 왕후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 중에서 자신에게 꼭 필요한 진리가 있다고 느끼실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남들이 갖지 못하는 특별한 지위를 얻었다든지, 명예를 얻었다든지 아니면 남이 얻지 못하는 특별한 재산을 얻었다든지 하는 데에는 거기에 반드시 하나님의 소명이 따라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이 어떤 때엔가는 그 모든 것을 사용하시려고 하는 특별한 섭리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더가 인물이 좋아서 왕후가 되었습니까?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지는 않습니다. 에스더가 운이 좋아 가지고 많은 여자를 이기고 왕후가 되었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르드개는 자기의 양녀 에스더가 왕후가 된 것을 기회로 잡아서 자기가 호의호식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권세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무엇인가 뜻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것을 증명할 시기가 온 것입니다.

 

 

유대민족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렇구나! 이러한 때가 오리라고 하나님이 미리 나와 에스더를 준비하고 계신 것이로구나. 이것을 모르드개가 확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확신을 에스더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네가 왕후가 된 것은 이때를 위함인 줄 누가 아느냐?

 

 

오늘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들을 여러분이 가만히 보세요. 이 모든 것이 의미가 없는 것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이 때를 따라 사용하시려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까? 여러분에게 왜 남다른 임무를 주었습니까? 왜 여러분의 남편에게 좋은 직장과 지위를 주셨습니까? 내가 잘 나섭니까? 성공해 섭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있겠구나!] 아직은 잘 모르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려고 하는 어떤 뜻을 갖고 계실지 모른다.

그러므로 나도 입을 열어야 할 때는 결코 잠잠하지 않고 입을 크게 열어야 되겠다. 미리 우리는 준비해야 합니다. 때를 따라 하나님이 사용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두시기를 바랍니다.

 

 

모르드개의 이 선지자적인 - 영감 있는 말을 다시 에스더가 전해 듣자 에스더는 드디어 비장한 각오를 했습니다. [, 그렇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주변에 영적으로 선배 되는 사람, 나에게 때를 따라 적절한 충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약에 에스더에게 모르드개와 같은 위대한 신앙의 선배가 없었다면 에스더가 이 중요한 기회를 어떻게 넘기고 말았을까요? 입 다물고 자기는 유대인이 아닌 것처럼 왕궁에서 숨어서 겨우겨우 넘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보세요. 위대한 신앙의 선배 모르드개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에스더는 눈을 떴습니다. 자기의 할 일을 찾았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위대한 모르드개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누가 모르드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 우리의 모르드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펼 때마다 모르드개의 입을 통해서 에스더의 귀를 열어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우리의 귀를 열어주는지 한번 살펴보세요. 온 주변이 캄캄해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답답함을 만날 때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분명히 이 길이 다 하고 가르쳐 줄 수 있는 모르드개가 누굽니까? 내 남편이나 아냅니까? 담임목삽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믿음의 친굽니까? 누굽니까?

이런 사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정말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에스더는 위대한 믿음의 선배 모르드개를 옆에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적재적소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아름다운 도구가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비장한 각오를 했습니다. 그 각오는 한마디로 나타나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 말의 원 뜻은 [망하면 망하리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에스더에게는 절실한 말입니다. 에스더가 왕 앞에 나갔을 때에 왕이 홀을 내밀어서 사면의 뜻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는 그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비장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더가 자기의 몸을 던져서 이제는 자기의 민족을 위해서 분연히 일하려고 했지만, 그는 자기의 왕후의 지위를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미모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과 자기와의 관계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3일 동안 금식기도 했습니다. 자기와 자기 시녀들, 심지어 수산성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합심해서 금식 기도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마시지도 아니하고 하는 말은 금식기도를 철저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적당히 마셔가면서 한다는 말이 아니고, 사생결단하고 한다는 것을 에스더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에스더의 믿음이었습니다.

 

 

에스더가 비록 왕궁에 가서 있었지만 얼마나 그가 믿음이 좋았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 내가 왕훈데 왕후의 입장에서 그 정도야 할 수 있겠지]라고 적당히 생각할 수 있는데도 인간의 수단을 다 배제해 버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에스더의 행동에서 우리는 모세의 결단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히브리서 11:25절에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 봄이라]

 

에스더도 마찬가집니다. [자기 백성과 고난 받기를 페르시아 왕궁에서 일생을 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차라리 능욕받는 것을 그는 페르시아에 있는 모든 보화를 갖는 것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자기의 몸을 온전히 바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희생하려고 하는 비장한 각오를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0:39절에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통하는 행동입니다. [목숨을 얻으려고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으려고 하는 자는 얻을 것이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항상 헌신하려고 하는 자에게 가르쳐 주시는 중요한 헌신의 원립니다. [너 나를 위해서 일하려고 하면 목숨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잃어버릴 각오로 해라. 아예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하면 그것이 얻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빼앗긴다]

에스더가 생명을 내놓은 것이 결국은 얻은 것이 되었지요. 그러나 그때에 만약에 자기의 생명을 아끼려고 했다면 그는 민족에게 버림을 받고 다른 방법으로 망했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이런 비장한 각오로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에스더는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왕에게 애교를 부려서 아첨의 말이나 부드러운 말로 왕의 마음을 녹이려고 하지 않았고, 왕의 마음을 보의 물과 같이 마음대로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맡기려고 금식기도를 한 것입니다. 에스더의 이와 같은 결단과 선택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담판을 할 일에는 생명을 걸듯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야곱도 그랬지요. 야곱이 축복을 받기 위해서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하는 태도는 담판하는 태도가 아닙니까? 생명을 건 담판의 기도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실패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께 매달렸을 때 이것은 담판이지요. 피땀이 흐르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서 하나님과 담판을 해야지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때는 시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아예 하나님도 꼼짝 못 하고 들을 실수 있도록 생명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나를 한번 돌아보세요.

내가 에스더처럼 생명을 걸고 담판을 했더라면 반드시 해결이 되었을 텐데, 내 태도가 너무 미지근해 가지고 오히려 문제는 해결되지 아니하고, 오늘까지 지지부진하게 내려오지 않았지 않았나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솔직히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에스더처럼 담판하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실 얻어야 할 축복을 놓친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해결을 벌써 받았어야 할 문제가 아직까지 지지부진하게 끌고 내려오는 것이 있어요.

 

 

올해도 다 가고 있습니다. 기회를 잡아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 나가서 담판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금식을 하든지, 매달려서 해결을 해야 합니다.

위기를 만났을 때, 위기답게 처리를 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때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에스더에게서 이런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자녀들과 운명을 함께 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해 생명을 걸듯이 분명한 결단과 선택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차라리 세상을 잃어버릴지언정,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되고, 차라리 세상의 친구들을 잃어버릴지언정, 사랑하는 성도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결단을 취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흥하고 망하는 것을 택해야 합니다. 에스더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언약하신 유대민족과 함께 흥하고 망하기를 결심했습니다. 아무리 그가 이방 왕의 왕후가 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망하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생명을 같이 하기를 원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거룩하신 피로 구속함을 받은 하늘의 시민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에스더와 같이 생명을 걸고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살고,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죽기를 원하는 이런 자세가 분명하지 않아서 세상의 친구들이나, 세상의 사람들에게 마땅히 보여 주어야 할 태도를 보여 주지 못하는 어려움이 없습니까? 이와 같은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에스더는 우리에게 참 좋은 교훈을 남겨 주었습니다. 분명한 결단과 선택,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참으로 중요한 일이요, 이 선택과 결단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손에 바로 쓰임 받을 수 있으며,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그를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꼭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 하나님의 자녀답게 결단할 때는 결단하는 이런 용기와 분별력! 이것을 가지고 오늘 이 세상을 살아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5장 설교문]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라(히 5:1-14)

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서 5장 설교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라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 주간의 찬송 : 221 (나가난 복지 귀한 성에) 읽을 성경 : 히 5:1-14 제목: 예수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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