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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1장 강해 설교문] 왕이 베푼 잔치(에1:1-22)

복음의 능력 2020. 7. 5.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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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오늘도 알쓸잡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에스더 1장 강해 설교문 중에서 왕이 베푼 잔치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왕이 베푼 잔치

 

 

에스더 1:1-22

 

 

 

에스더서는 유대나라 사람들이 범죄 한 탓으로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약 50-70년 동안 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포로생활이 끝난 다음에 일어난 사건을 다룬 것입니다.

 

고레스왕이 유대나라 포로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을 수축하라는 놀라운 명령을 내립니다. 이 포고를 들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상당수가 지금까지 몇십년 동안 기반을 닦았던 바벨론의 모든 것들을 다 내버리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습니다. 첫번째 귀환자들은 총독 스룹바벨의 지휘 아래 약 45,00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십년이 흘렀습니다. 그 몇십년 동안이 지나는 사이에 이 에스더서 기록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나라 사람들 중에서 믿음이 좋고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히 믿고, 애국심이 강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보다 믿음이 좀 약한 사람들이 바벨론 땅에 남아 있었는데, 이 남아 있는 바벨론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에 제사장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상당수의 귀환민을 데리고 바벨론을 떠나갔습니다. 그그러므로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에서 얼마 후에 에스라를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돌아 간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스더서는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에 낄 수 있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하면, 에스라 6장까지는 스룹바벨이 인도한 귀환 민들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가, 그 다음에 7장부터는 에스라가 인솔한 두 번째 귀환 민들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더 전체의 이야기는 10년 동안에 걸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되어서 모르드개가 실권을 쥐고 유대인들을 보호하던 기간을 10년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더서에 나타나는 왕은 아하수에로 왕인데, 이 왕은 20년간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가 왕후가 된 이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메대-바사 그러니까 잘 모르지요. 바벨론이 고레스왕에게 정복당했습니다. 파사에게 정복당한 것이지요. 이 파사는 지금의 이락을 말합니다. 그후에도 여러 정권이 교체되다가 하나의 큰 제국이 드디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제국을 소위 메데바사라는 말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책에 나오는 페르시아제국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아하수에로왕은 페르시아제국의 황제입니다.

 

페르시아나라가 어떤 제국인 줄은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동화책에도 많이 등장하는 나라고 말좀하는 사람들이 잘 들먹이는 나라이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상식적인 그런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아하수에로 왕은 주전 485년 전부터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해서 약 20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야의 역사에서도 상당히 출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룹바벨 총독의 인솔에 의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남아 있는 유대인의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 대부분이 바벨론 세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바벨론에서 태어나서 바벨론에서 자란, 즉 바벨론 문화에 완전히 동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그 나라를 떠나서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신앙적으로도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나중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공부할 시간이 있습니다만, 모르드개나 에스더 같은 신앙적으로 부족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세속화 되어 가지고 그 땅에 눌러살기를 원했고, 뭐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가급적이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종의 세속화된 유대나라 사람들이었다고 봅니다. 이들에게 무서운 위기가 닥친 것이 바로 에스더서에 나오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것에 비취어 보면 현실적으로 세상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교훈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서는 누가 썼느냐?

아직도 아무도 모릅니다. 어디가서 누가 에스더서를 누가 썼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거야 에스더지요]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런데 에스더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꼭 집어서 말하라고 하면 에스더서 전체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면에서는 꼭 소설책 같아요. 우리가 오늘 1장을 읽었는데 하나님이 이라는 말을 찾아 보섰어요. 아마 생각도 안 하고 읽으셨을 거예요.

 

그래서 이것 때문에 과거에 어떤 학자들은 에스더서는 성경이 아니라고 들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경성을 부정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도 [에스더는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비록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역사상 놀라운 일을 성취한 사람이었습니다만,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좀 부족한 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좋은 지도자의 지도를 받고 바른 해석을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신약의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성경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말이라고 다 존경하고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런 논쟁은 없어졌습니다. 에스더서를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오히려 에스더서의 매력과 에스더서의 능력과 에스더서의 감화력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표면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표면에 전혀 나타나 있지 않으시면서 에스더 1장부터 10장까지 전개되는 그 드라마틱한 이야기 구비구비마다 하나님의 손길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안 보이는데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그 위력과 그 감화는 도무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영력 하게 줄줄이 드러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이도록 나타나셔서 일하는 것 보다도 보이지 않는 면에서 그렇게 엄청나게 일하시는 데 대해서 우리는 더 하나님의 존재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지 아니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에스더서는 이런 부분에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스토리-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한다면 저는 틀림없이 에스더서를 말해 줄 것입니다.

 

섭리가 무엇인지 아세요?

섭리는 라틴어 프로비디오라고 하는 말이 섭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프로라고 하는 말은 전문적인 선수라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 있는 것-하는 말입니다. 미래에 속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다음에 비디오는 무엇입니까? 보는 것이에요? 듣는 것이에요? 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프로비디오라고 하면 앞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은 -앞에 있는 것을 예견하고 거기에 따라서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즉 하나님의 예견과 거기에 따른 행동 두 가지를 묶어서 하는 말입니다.

 

이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단업니다. 앞을 내다보시고 멀리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만이 앞을 내다보시고 무엇인가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요, 준비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섭리라는 단어는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서를 보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알고 계시면서 하나님이 사전에 하나하나 준비하고 있는 예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저녁에 우리들이 읽은 말씀 가운데 아하수에로 왕이 큰 잔치를 베풀었지요. 그 흥겨운 잔치에 마음이 들뜬 왕이 자기 왕후를 불러다가 한번 쇼를 부리고 싶었지요. 그런데 황후가 기분이 나빠 가지고 왕의 명령을 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왕후가 폐위되고 말았습니다. 거기까지는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에스더서를 끝까지 읽어 보면 왕이 잔치를 베푼데도 이유가 있었고, 잔치 자리에서 왕이 술이 취해서 기분이 좋아서 문득 왕후를 불러오겠다고 한 것에도 하나님이 작용하고 있었고, 왕후가 그것을 거절한 것도 자신의 뜻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왕후를 쫓아낸 것도 마찬가집니다. 너무나 큰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 사건마다 미래를 내다보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뜻을 가지고 처리하지 아니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하나님의 섭리라고 그럽니다.

 

잠언 21:1절에 보면 여기 에스더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하고 일치되는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에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어서 저수지에 담긴 물처럼 조절하고 다루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 장차 일어날 어떤 일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그것이 마귀의 역사일지도 모릅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그것은 분명히 마귀의 역사였습니다. 마귀가 술책을 부리고 있는 미래사가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에스더서를 보면 1장에서 5장까지는 어떤 위기를 향해서 유대민족이 지금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마귀가 대단히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도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자세히 내다보시고 벌써부터 왕의 마음을 마치 보의 물처럼 다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아하수에로에게 일어나는 일은 조그마한 감정이든, 조그만한 명령이든 그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섭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무슨 이적 기사를 행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모든 책임이나 자유의지를 꽁꽁 묶어 놓고 하나님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에스더서를 잘 읽어 보세요. 이적이나 기사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왕궁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이요, 권력투쟁이 일어나는 왕궁에서 비일비재한 모략이고 술책입니다.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큰 일을 이루시는 것을 봅니다. 왕이 마음대로 하는 것을 내버려 두면서도 왕이 자기의 뜻대로 하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뜻으로 모든 일들이 모아 지도록 끌어들이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시는 것을 봅니다.

 

귀환 명령이 떨어졌는데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벨론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을 실망시킨 바벨론 세대 유대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을 쓰셨느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왕의 마음을 쥐시고 하나하나 모든 일들을 다루시고 계시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한순간도 버려두시지 않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우리의 머리털까지 헤아리고 계신다는 말로 이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12를 낳아서 키워도 그 아이 하나하나가 부모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것처럼 하나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 하나하나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 동안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모든 시험에서 막아 주시며, 우리를 모든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는 우리 앞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하나님은 다 내다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앞날이 망치지 않기 위해서 지금부터 나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 하나하나를 섭리하고 계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고 찬양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의 은총을 믿는 사람들은 나에게 잘된 일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있고, 나에게 잘 못된 일도 어떤 면에서는 나에게 막대한 손해를 가져다준 일도, 하나님의 뜻이 그중에 있는 줄 믿을 때에는 묵묵히 인내하면서 감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도 의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기가 막히게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면 나의 마음에 일어난 모든 생각까지도 마치 보의 물처럼 다루실 것이요, 내 남편 내 자녀들, 아니면 나와 접촉하는 모든 사방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 하나하나를 하나님께서 보의 물처럼 다루시면서 나를 위해서 모든 사건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믿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불안할 필요가 없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하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소한 모든 문제를 통해서 섭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얼마만큼 신뢰하느냐가 결정적인 키가 됩니다. 신뢰하지 못하면 우리는 조그마한 일 앞에서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요, 신뢰하면 아무리 큰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은 무서운 사건 앞에서도 우리는 믿음과 평안을 지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잔치한 것을 보면 참으로 엄청납니다. 성경 이외의 책에는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이 아니라 크세룩크세스라는 헬라 이름으로 나옵니다.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은 히브리말을 영어로 표기한 것입니다. 이 크세룩크세스라는 페르시아의 왕은 역사에 남아 있는 위대한 왕 중의 하나인데, 특별히 그가 지배하던 나라는 대단한 제국이었습니다.

 

성경에도 나옵니다만, 남 아시아의 인도로부터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와 중동지역 전체를 다 점령해서 127도를 이루었습니다. 그 영화와 그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우리는 6,7절을 읽으면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황금기를 이루었던 시절에 솔로몬이 한 때 금잔을 나무 그릇처럼 사용했던 것처럼 페르시아의 대황제가 극에 달한 영화를 누렸습니다.

 

이 크세룩크세스 황제는 주전 480년에 헬라-지금의 그리스를 정복하기 위해서 그는 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 전쟁에서 그리이스 함대와 페르시아 함대가 서로 충돌해서 그 유명한 살라미해전이라는 역사의 큰 해전 중의 하나로 기록된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 전투에서 결국 페르시아 왕이 패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잔치는 헬라를 침공하기 직전에 한 잔칩니다. 즉 승리를 기원하는 별을 벌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황제가 수 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떠나는 데 승리를 거두라고 기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잔치의 날수가 얼마입니까? 170일을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7일을 더 했습니다. 신물이 날 정도로 먹고 마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너무 나라가 크다가 보니까, 또 당시의 교통수단이 형편없는 시대니까, 멀리 있는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은 최소한 몇 달이 걸립니다. 지역 지역마다 와서 잔치에 참여하는 스케줄을 짠 것 같습니다. 그러니 6개월 정도의 기간이 걸린 거예요.

 

이렇게 영화가 극치에 달한 나랍니다만, 우리가 다니엘서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다니엘이 본 큰 우상의 머리는 금으로 되어 있다고 했지요. 그 나라는 바벨론이라고 했습니다. 그다음에 은으로 된 부분이 나옵니다. 이 나라는 바벨론 다음에 온 페르시아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세상 나라의 영화가 극치를 달한다고 하고, 호화찬란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점점점점 질적으로 떨어지는 나라요, 나중에는 돌멩이 하나에 산산조각이 나버릴 나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게 되면 그 나라는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려 갈 것이라고 다니엘이 예언을 했는데 이 페르시아 왕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얼마나 거만합니까? 아하수에로 왕을 보아도 얼마나 얼마나 거드름을 피웁니까? 오늘 우리 주변에도 한나라의 권세를 쥐고 있는 실권자들을 가만히 보면 얼마나 거드름을 피우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민주주의의 정치제도 아래에서 권력을 잡은 사람은 참으로 짧은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다스릴 책임을 나에게 주셨다 하는 의미에서 굉장히 겸손하고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면모가 있습니다만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하지 아니하고 권세를 잡은 많은 후진국의 나라들, 많은 통치자들을 보면 얼마나 교만합니까?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가지고 있는 세도,영화,명예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면서 눈이 어두워져서 나중에는 자기도 불행해지고, 나라도 불행해지는 것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만약에 하나님을 알았다고 하면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을 것이요, 피비린내 나는 무서운 계략을 위해서 국력을 허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나라도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풍토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에 지금 우리 민족은 대단한 축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대통령을 갖고 있다는 것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히시는 이도 하나님이요,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한때 영화롭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요, 한 때는 그 영화에서 잿더미에 떨어지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나라의 권세를 잡았을 때에 겸손할 줄 알고, 두려워할 줄을 알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자기 영화에 도취 되어 가지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술에 취해 가지고는 자기의 왕후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리갯감을 삼으려고 했습니다. 당사자인 왕후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고, 인격모독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왕비를 왕비답게 대접을 했으면 와스디 왕비가 즐겁게 왔겠지요.

 

그래서 이 잔치는 해피엔드로 끝난 것이 아니고, 아주 비극으로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나라의 왕비가 바뀌는 일이 벌어졌고, 또 이런 사건 겪고 전쟁터에 나선 왕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고, 장군들과 군사들의 마음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전쟁에서 승리 할리가 없습니다. 실컷 두들겨 맞고 군사들은 다 수장지내고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 전쟁에서 돌아온 왕이 그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서 에스더를 새로운 왕비로 뽑아서 마음의 상처를 달래려고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에스더 1장 마지막 부분은 재미있습니다.

와스디 왕비가 오기를 거절하니까 신하들이 폐위시키자고 건의했지요? 명분이 무엇입니까? 만약에 왕비가 왕이 오라고 명령했는데도 그것을 그대로 두면 그것을 본을 받아서 페르시아에 있는 모든 여자들이 남편에게 순종을 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서 본을 보여서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하들이 내세운 명분입니다. 좋은 명분인가요?

 

그래 가지고 와스디를 폐위시켰는데 그 후로는 페르시아의 여성들이 얼마만큼 남성에게 고분고분했는지 모르겠어요.

 

남자들은 가끔씩 그렇게 어리석을 때가 있어요. 여자들을 꽉 누르면 순종을 잘하리라고 착각을 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발하고 파탄을 가져오기가 쉽습니다. 이런 일이 잘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남자가 되었다고 인격 모독하고, 권세가 있다고 다른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고, 돈이 있다고 인격을 모독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믿을 존재가 못 돼요. 부패한 인간의 추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스더서에서 남편과 아내의 가정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잘못하면 이런 설교 듣고 가서 남자가 잘못됐다, 여자의 잘못이다 논쟁을 벌이다가 대판 싸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성경을 잘 못 읽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하수에로 왕이 이와 같은 실수를 범하는 가운데도 무엇이 작용했다고요?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남편의 괴팍한 성격! 또 남편이 잘못해서 저지르는 실수! 그것을 당시에는 굉장히 엄청난 일로 받아들일 때도 있는데, 긴 시간을 두고 돌이켜 보면 [거기에도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사소한 데서 말이지요. 여러분은 없습니까?

 

역사가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아하수에로 왕은 외모가 굉장히 출중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잘 생긴 남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외모는 훌륭했지만, 성격은 괴팍하고, 하는 짓들은 변태성이 많고, 극단적으로 감정을 컨트롤 못하는 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의 잘못된 감정과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뜻과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에스더서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남편이 성격이 괴팍해서 일어나는 일이든지, 부인이 모자라는 면이 있어서 일어나는 일이든지, 아니면 내가 무엇인가 실수를 해서 일어나는 일들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마세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사람은 여기에도 있을지 모른다 하는 것을 기대하면서 - 잘못한 것은 잘못한 대로 인정하면서도 - 무엇인가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지 모른다고 믿고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 이유가 있어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믿는 사람은 비로소 범사의 감사가 나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에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페르시아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이런 극적인 을을 통해서 역사하신 것처럼 오늘날 이 땅에 우리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것을 잊어버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손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손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때는 이상할 정도로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시고 계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 같아서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가장 가까운 데서 나와 함께 모든 어려움을 겪으시면서 나를 시험에서, 악에서 보호하시고 건져주고 계심을 우리는 잊어버리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아무쪼록 이 섭리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생애에서도 꼭 신뢰하고 그 하나님을 따라 살면서 승리하는 삶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호세아 1장 강해 설교문] 음란한 아내를 취하라(호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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