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알쓸잡

[에스더 강해 설교문]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4-17)

복음의 능력 2020. 7. 6. 11:02
반응형

안녕하세요. 오늘도 알쓸잡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에스더 강해 설교문 중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기도했던 에스더와 유대 민족 이야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4:4-17)

 

[서 론]

 

"죽으면 죽으리이다"이 말은 에스더와 유대인들이 당하고 있는 처지와 유대민족의 생존권 앞에서 구국의 결단을 하는 에스더의 충정과, 깊은 신앙의 결단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기철 목사님이 "일사각오"라는 제하에 순교를 각오한 설교 제목이 되었습니다. 성경 여러곳에 본문의 "죽으면 죽으리이다"와 그 목적과 정신이 서로가 통할 수 있는 강직한 신앙고백의 몇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1) 여호수아가 그의 일생을 정리하면서 온 이스라엘에게 신앙의 절개를 지킬 것을 부탁하는 말로써 여호수아24장15절에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한 말씀입니다.

 

2)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려는 결심 중에 사도행전 20장24절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3)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갈 때의 결의인데 본문 16절 하반절에 "죽으면 죽으리이다"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사례는 성격에서 볼 때 동질적인 내용이라고 봅니. 이들의 신앙이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앙의 모습이라고 볼 때에 본문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갈지라도 오로지 나 자신만은 절대적으로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확고부동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지켜야 될 신앙은 울기의 생명보다 더 존귀한 것임을 말해 주는데 비록 이 신앙을 지키다가 죽을지라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함을 교훈해 주고 있으며, 내가 해야 할 사명에 대한 우리의 결의는 죽음을 각오한 일사각오의 결의가 있어야 하겠다는 점에서 위의 세 가지 사실은 지금 살고 있는 오늘의 성도들에게 한 번쯤 묻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젊은 세대들이 의식교육을 앞세워서 의식화가 되면 6.25북침 했다고 서슴없이 주장하고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부모도, 가정도, 자신의 장래도 버리면서까지 의식화의 행동을 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강력하게 만들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생명의 종교를 믿고 있다는 기독교 신앙인의 입장에서 그들을 비난만 하고 나는 참 종교인이라는 안일한 생각 속에서 다 죽어가는 맥 없는 신앙생활을 계속하고만 있을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기독교는 너무나 생명이 없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신앙 결단과 사도 바울과 같이 사명을 위해서는 목숨을 던질 가오와 여호수아 같이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잘못될지라도 나 자신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살겠다는 뚜렷한 결단의 신앙이 있어야 할 것입니.

 

1. 역사적 배경과 하나님의 뜻

 

그러면 에스더의 일사각오의 결단이 있기까지의 역사적 배경과 아울러 어떻게 하여야 에스더처럼 아름다운 신앙을 간직할 수가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유다 민족은 B. C. 586년에 바벨론에게 망했는데 이 바벨론이 B.C. 518년에 메데 바사에게 망하게 되었습니다. 메데 바사가 통치한지 2년에 고레스는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선포하여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했으나 돌아가지 않고 잔류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수도인 수산에 남아있는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양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에스더"라는 말은 메데 바사어로"별"이라는 뜻이고, 히브리어로는 "하닷사"인데 그 뜻은 "석류"라는 의미입니다. 파사왕 아하수에로는 각 도 방백들과 만조백관을 모으고 큰 잔치를 벌였는데 왕은 주흥에 못 이겨 왕비 "와스디"를 자랑하고자 주연 속에 나오기를 요구했으나 이 왕명을 거절하자 왕이 노하여 왕비의 직위를 폐하여 버렸습니다.

 

이에 새 왕비를 간택하게 될 때 많은 후보 중에"에스더"가 왕비로 간택이 되었는데 여기서부터 에스더가 유다 민족을 위한 구국 신앙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된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 민족의 어려운 형편 속에서 하나님께서 왕비가 되도록 하시는 것은 에스더가 신앙 안에서 살았기 때문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둘째, 자신이 누리는 영광의 자리는 자신을 위함이 아니고 어려움에 이르는 다시 말해서 풍전등화와 같은 유다 민족을 위해서라는 사실과

 

셋째로는, 하만의 계략으로 민족이 위기에 이르게 될 때 하나님은 그 백성을 구하시려과 에스더를 준비하고 계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는 조건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1) 사람의 선택을 중요시합니다.

 

에스더의 입장에서 그가 왕 앞에 나가느냐? 나가지 않느냐?는 에스더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자유의지를 강제로 이용하시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2) 뜻을 향한 하고자 하는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모르드개의 민족적 어려운 시련을 극복하려는 노력입니다. 금식하여 하나님 앞에 울면서 억울함을 부르짖고 에스더의 활동을 간접적으로 도운 모르드개의 사명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심입니다.

 

3)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를 버리지 않고 살려주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살필 수가 있습니다.

 

자신만 살겠다고 안일에 빠져버리면 하나님께도 버림받고 사람들에게도 버림을 받지만 자신을 버리기까지 하여 남을 살리려 할 때는 나도 살고 남도 살린다는 진리의 일면을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4) 에스더가 왕비라는 면에서 그리스도의 신부 된 우리에게 말세적인 교훈과 오늘의 성도들에게 교훈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에스더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우리의 그림자입니다. 포로의 나라에서 왕비로 선택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죄악의 포로가 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신령적 교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스더가 왕비가 된 과정에서도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의부인 모르드개의 교훈과 교육을 잘 받았습니다(에2:7).

 

그는 바사의 백성으로 흡수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를 통하여서 자신이 유다 민족이라는 사실과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 민족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을 잘 교육받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르드개는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과 같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백성이 아니요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라야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로써 선택이 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몸을 청결하게 했습니다(에2:9).

 

향품으로 몸을 아름답게 했습니다. 이것이 왕비가 되기 위한 준비적 생활이었다고 봅니다. 우리의 몸은 불신자와 모양은 같을지 모르나 성격이 다릅니다. 몸 가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죄로부터 성결을 지켜야 하며 생활 속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나타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자신을 살필 때 죄악의 냄새, 음란의 냄새, 탐욕의 냄새, 불의의 냄새, 세속의 냄새가 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몸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 기도의 향기, 은혜의 냄새, 기쁨과 감사의 냄새가 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정결하게 지켜야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자격이 있습니.

 

셋째, 궁궐에서 여러 달을 수양했습니다(에2:12).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열두 달 동안을 준비하는데, 여섯 달 동안은 몰약과 기름을 쓰고 여섯 달 동안은 향품과 여자들이 쓰는 다른 물품을 써서 몸을 정결케 하는 기간을 마쳤는데 이 기간에 에스더는 몸을 정결하게 하면서 기도하였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에스더가 왕비가 된 후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야 할 때에 모르드개에게 요청이 다른 것이 아니라 금식하고 기도할 것과 그 자신도 시녀들과 더불어 금식하고 기도한 후 왕에게 나아가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의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에게만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세마포 옷을 입고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잔치석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더와 우리와의 공통점이 되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여건과 신앙의 결단

 

사람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교만하게 되고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에스더는 그가 왕비가 되어 영화를 누려도 자신은 유대인이요,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임을 기억했습니다.

 

당시 메데 바사의 수상은 하만이었는데 각 도 방백과 만조백관들이 하만을 높이고 그에게 머리를 숙였으나 모르드개만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는데(에3:3) 이 사건으로 하만이 유대인을 모략 참소하여 하루아침에 모두 학살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위기에서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도움을 구하게 되었지만 에스더는 왕의 허락 없이 왕 앞에 나갈 수가 없는 처지에 살고 있었습니.

 

에스더는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 지 삼십일이나 지나므로 그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심으로 왕 앞에 나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성도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잊어버리지 말고 하만처럼 교만하지도 말고 내가 서 있는 여건 속에서 우리의 신앙적 결단이 있어야 함을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에스더의 결단에서 배울 교훈은

 

1) 자신의 왕후의 직위는 유대인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의 부인이 된 것은 자신의 영화를 위함이 아니라 죽음 직전에 놓여 있는 유대 민족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 성도들은 내가 서 있는 위치, 사회적 지위, 경제적 축, 인간적 재능, 나의 지식도, 명예도, 재산도 모두가 주님의 필요할 때에 주님께서 사용하시려고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 그는 부모와 처자와 배와 그물을 모두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다메섹에서 만난 이후 그의 인생관이 모두 변해 버린 사실을 압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신앙은 바로 이러한 신앙인 것입니다..

 

 

2)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목적을 이루시고 만다는 것을 교훈으로 줍니다.

 

당시 에스더만이 유다인의 생명을 구하는 매개체이었을 것입니. 그러나 에스더에게는 그가 왕비라는 위치와 세상의 영화를 포기해야 하는 어려운 결단이 있기에 만일 이런 이유로 에스더가 하나님의 뜻을 버렸다면 분명히 에스더 219-23절의 증거로 볼 때에 모르드개를 통해서 그의 뜻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모르드개의 문지기 생활중에서 문을 지키는 두 내시 빅단과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모살하려는 모의를 고발하여 왕이 위기를 모면했으나 모르드개가 단지 유대인이라는 사실로써 궁중 일기에는

기록했으나 포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왕이 궁중 일기를 읽다가 발견한 것(에6:1-9)은 만일에 에스더가 하나님의 뜻을 거절했을 때 유대인을 구출하실 하나님의 비상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조건을 보지만 하나님은 방법을 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일에는 조건과 이유를 따져서 핑계하지 말고 순종합시다. 이것은 바로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거절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을 통해서라도 이루시므로 기회를 잃지 맙시다.

 

3) 주를 위해 사는 성도의 결과

 

에스더는 왕 앞에 나가서 왕에게 요구한 것이 잔치에 참여하여 주되 하만도 함께 할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기뻐하시고 왕비의 초청을 받은 하만은 너무 좋아서 우쭐하기도 했습니.

 

왕과 하만이 잔치에 나오자 에스더는 하만의 모략을 왕에게 고합니다. 노발하게 된 왕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하만은 에스더에게 손을 잡고 살려 주기를 애원할 때 왕이 그 모습을 보고 왕후를 겁탈하려는 하만으로 알고 죽이라고 합니다.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세운 오십 규빗의 장대에 자신과 자녀들이 죽게 되었는데 이 날을 부림절로 기억하고 지금도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성도들이

 

1) 주를 위해 사는 자는 죽는 것 같으나 산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는 살 것이라는 진리입니다.

 

2) 불의한 계획은 성공 같으나 실패를 하는 것이다.

잠언 2627절을 보면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말은 우리 성도들이 주님을 향하여하는 말이어야 하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은 "나를 위해 죽는 자는 오히려 살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자는 모든 것을 찾을 것이고 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자는 내가 위로와 평강과 축복을 그에게 주리라"는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오늘날 신앙은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것, 물질적인 것,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에 얽매여있기 때문에 철저한 신앙과, 절대적이며 내세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요구는 우리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청이요, 리를 향하신 뜻입니다. 우리는 철저한 신앙으로 에스더와 같이 믿음을 지키고 신앙으로 승리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출애굽기 3장 설교문] 가장 비참한 곳을 찾아오신 하나님(출 3:1-8)

안녕하세요. 오늘은 출애굽기 3장 설교문 중에서 가장 비참한 곳을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제목: 가장 비참한 곳을 찾아오신 하나님 성경/출 3:1-8 요절, 출 3:8 “서 론” 3장��

skh12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