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장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는데 예수님의 시체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지막 날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하나님과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제목: “주님의 부활 증인 되자”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요 20:11-18
요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님을 보았다 하고 또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이르니라.”(요 20:18)
주제: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일어나셨네!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자.
부활절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확실히 일어나셨네! The Lord is really risen!" 메시지가 여러분의 전인격과 가정 위에 하시는 일에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도 이 시간 다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부활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니케아 회의(AD 325년)에서 부활절은 3월 21일 춘분 후 만월을 지나 첫 주일로 정했기 때문에 매년 다릅니다. 올해는 윤달이 있어서 예년보다 부활절이 늦으며 따라서 봄기운도 다소 늦습니다. 니케아 회의에서 예수님의 출생 전후로 BC(Before Christ 기원전, 主前)과 AD(Anno Domini 주님 오신 후 해드, 기원후, 主後)로 나누었지만, 사실 주님의 부활전과 부활 후로 세계의 연도를 정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아쉬움이 남습니다. 성경에서도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함이니라” (롬 6:4)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의 전환점(turning point)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두신 곳이 부활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다메섹문에서 나와 길을 건너 북쪽으로 200여 미터 가면 있는 ‘정원무덤’(The Garden Tomb)에 가보면 돌무덤이 열린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가 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니 안식후 첫날(주일아침)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바로 이 곳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았습니다. 깜짝 놀라서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인 요한에게 달려가서 ‘사람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있었습니다(주님의 몸은 다시 일어나서 수건이 저절로 말려 있었음 wrapped together by itself).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요한)도 들어가 보고 믿었습니다(요 20:1-8). 바로 이 정원 무덤에서 강하게 느낀 사실이 주검이 있던 곳에서 부활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을 체험하는 듯합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아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말하기를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그녀가 대답하기를 “사람이 내 주님을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 20:11-13) 무덤 속에서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한대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그렇습니다. 모든 소망의 줄이 끊어지고, 어두움과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절박한 상황 앞에서도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거저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슬퍼하고 애통하며 고민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왜 천사들이 와서 머리 편과 발 편에 나누어서 앉았을까요? 출애굽기 25장을 찾아보십시다. 여기에 주님의 죽음에 관한 아름다운 한 상징이 나타납니다. 이 본문은 속죄소를 만드는 장면입니다. 속죄소라는 것은 죄를 속하는 제단입니다. 우리 죄를 속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 속죄소의 피 흘리는 어린양으로 누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의 죗값을 요구하시는 거룩하신 심판자로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이렇게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 속죄소에서는 두 구룹의 조각으로 나타내셨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주 앞에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누우신 그 제물 되심에 하나님께서 심판자로 임하신 장소로써 지금 예수님의 무덤 속의 두 천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의 무덤이야말로 우리의 죄값을 모두 치르는 장소인 동시에 영원한 은혜를 입는 장소인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가 지성소의 언약궤, 쉐키나가 된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속하시려 속죄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모든 죄가 속죄가 완성되고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덤에는 더 이상 절망, 죽음, 어둠이 사라졌습니다. 빈 무덤(The Empty Tomb)이 되었던 것입니다.
적막한 동산에 이르른 그들 그늘진 어둠 속에서 보았네
빈 무덤을,
그 분의 거룩한 시신에 붓고자 향유 예비하여 왔건만
놀랍게도 그들은 보았네, 살아계신 주님을.
그들 마음은 무겁게 짓눌려 있었고
깊은 절망으로 가라 앉아 있었지.....
그러나 눈물로 흐려진 두 눈 들었을 때
아, 예수님 거기 서 계셨네.
갈보리에서 꺼져가는 호흡과 함께
모든 소망 끝났다 그들 생각했었지
그러나 그들은 보았네. 죽음 이기신 능력의 구주
그 놀라운 부활절 아침, 촉촉히 이슬 맺힌 동산에
그 분은 오셨네 무덤에서 세상으로,
구원하시려- 살아서 새로이 다스리시려.
소망은 차갑게 식어 죽은 듯 보이고
슬픔은 깊을 때
젖은 눈 들어 보면 우리도 볼 수 있으리
빈 무덤을.
호세아 2:15에 있는 대로 죽음의 해골 골짜기인 아골 골짜기(the valley of Achor)가 소망의 문(a door of hope)이 되어야겠습니다. 실패의 장소에서 다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면 성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최근 화재가 많이 일어났는데 고성과 속초에 다시 불같이 부흥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백만 명을 전도한 전도왕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는 1855년 보스턴에서 구두수선공으로 일할 때 고객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oll)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1855년, 18세). 그는 빈민가, 술집, 호텔, 하숙집 등을 다니며 전도하면서 20살부터 어린이 전도를 집중하면서 주일학교를 시작하여 교사로 가르쳤습니다. 동료 교사가 “제가 맡은 교회학교 반은 겨우 꼬마 아이 하나뿐이랍니다. 난, 지쳤어요. 이렇게 하나를 데리고 어떻게 해요?”라고 할 때 은 무디 선생은 그 교사에게 큰 소리로 말했답니다. “당신 반에 그 한 어린아이가 존 낙스(John Knox), 조나단 에드워드(Edwards), 조지 휫필드(Whitefield) 그리고 요한 웨슬레(Wesley)가 될지 모르잖습니까?” 이때 교사는 새 힘을 얻어 용기 있게 한 학생에게라도 열성을 다해 성경을 가르쳤답니다. 무디는 약 1,500여명 학생 가르쳤고 남북전쟁 기간에는 음악가 생키와 함께 군대 전도 집회 1,500여 회를 인도했고, 어느 날 영적으로 갈급한 마음으로 시카고 다리를 건너다가 성령의 충만한 불을 받고 가까운 교회당에 들어가 떼굴떼굴 굴렀습니다. 사람들이 어디가 아프냐고 묻고 의사를 데려오고 했으나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으로 뜨거워 견딜 수가 없다”라고 피력했답니다. 시카고 지역을 중심으로 전 미국과 영국의 대부흥을 일으키면서 40여 년 동안 100만 명을 전도하였습니다. 무디 성경학교와 자기 고향에 있는 마운트 헐몬 학교를 통해 수많은 그리스도의 일꾼들을 양성해서 학생자원 운동을 결성하여 10만 명이 세계 선교를 자비량으로 하겠다고 결심했는데 이중 2만 5천 명이 세계에 나가서 선교했는데 우리나라에 오신 언더우드, 아펜셀러, 모펫 등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무디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 신앙인들이었습니다. 무디에게 전환점이 되는 사건은 1871년 10월 8일 토요일부터 10월 10일 화요일까지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일어난 대화재(Great Chicago Fire)였습니다. 이 화재로 300명 가까이 사망하고, 시카고의 9 km²에 달하는 지역이 불에 타고 10만 명 이상이 집을 잃고 이재민이 되었습니다. 이 화재는 19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시카고 도심 지역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이 화재가 일어난 날과 동시에 위스콘신주의 페스티고에서도 대화재가 일어나 그린베이 북부를 태웠다. 이때 무디는 자신이 담임하던 교회와 집,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마치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사역이 다 무너져 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디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대화재가 일어나던 주일 저녁, 무디는 파웰 홀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자, 이런 생애를 살아오신 예수님을 여러분은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다음 주일에 함께 우리가 예수님과 무엇을 할 것이지 결정합시다.“라고 그날 말씀을 마무리하였습니다. 훗날 무디는 그날 저녁의 설교를 “엄청난 실수”였다고 회고하였습니다.
그날 밤에 시카고 화재로 인해 무디의 저녁 집회에 참석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그 말을 해놓고 곧 그 말이 사단의 속임수에 빠진 것임을 알았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청중들에게 한 주간을 두고 그들의 구원을 생각해 보라고 감히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무디는 시카고 대화재 후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하게 되었고 잿더미로 변한 시카고에 돌아와 큰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 부흥의 역사로 시카고가 다시 더 잘 정비된 도시로 발전하여 큰 경제 중심지 중 하나로 성장하여 미국의 3대 도시(뉴욕, 로스앤젤레스 다음)가 되었습니다.
1872년 6월 무디는 영국 런던에 있는 친구 레시 목사의 초청으로 주일설교를 하게 되었고, 그날 저녁 설교 후 바로 결신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때, 교회 성도들 대부분이 일어서기 시작하여 마침내 온 교회가 다 일어선 것 같았습니다. 무디는 청중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다시 한번 더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일어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전체 무리가 한결같이 일어섰습니다. 그다음 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초청은 이어졌고 결국 10일간의 집회를 통해 400여 명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무디의 집회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넘쳤고 영국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에 까지 주님의 함께하심으로 큰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런던에서의 집회는 거의 20주간 계속되었는데, 총 250여만이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3년간의 영국전도여행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결단하고 주님께 돌아옴으로써 영국 전역에 초대교회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도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나며, 좌절과 절망과 실패와 어둠을 박차고 다시 출발합시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아직까지 예수님의 초청을 미루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지금이 결단할 때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입니다(Now and here). 영어로 이를 붙여 쓰면 nowhere (아무 데도 없다)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now here(지금 여기)가 새 출발의 장소의 영광과 성공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나의 구주로 부활의 주님을 모십니다. “예수님, 저의 영원한 생명이 되어 주십시오. 제 인생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과 함께 지금 여기서 부활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절망의 터널에서 벗어나 광명의 빛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구절이 바로 부활의 신앙을 말씀합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곳에 “빛이 있으라 Let there be light"하니 질서와 채움과 빛의 창조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위기와 어려울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며 부활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제 마음이 확정되었고 제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제가 노래하고 제가 찬송하겠습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7-8)
부활은 모든 사망과 두려움과 절망을 내쫓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를 할 수 있음은 육신의 장막이 벗겨지는 순간 하늘의 장막으로 갈아입기 때문입니다(고후 5:1-5). 고난의 장소가 영광의 장소로 변합니다. 부활의 믿음이 있으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습니다(고전 15:42-44). 오늘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에서 두 천사와 대화를 하면서 뒤로 돌이켜 보니 어떤 분이 서신 것을 보았으나 다시 일어나신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 사림이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말하기를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모든 소망의 줄이 끊어지고, 어두움과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절박한 상황 앞에서도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거저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슬퍼하고 애통하며 고민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시니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 랍오니여 Rabboni" 하니 이는 '큰 선생님(Master)'이란 뜻입니다(요 20:14-16).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셨습니다. (요 20:17)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1) 주님의 몸은 부활의 영체로 변하셨기에 만지지 말라 (2) 이제부터는 의존적인 자세에서 스스로 독립적인 자세로 살아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부탁하시면서 이 시간 주님을 만난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님을 보았다”하고 또 주님께서 자기에게 승천할 것을 알려주셨다는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말씀을 순종했습니다(요 20:18).
오늘도 부활의 주님께서는 부활의 증인 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후 열흘 만에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부탁하신 말씀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고 하신 것도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갈 것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도 “예수님께서 다시 일어나셨습니다”라고 외치며 부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일어나신 부활절 저녁에(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마가의 다락방으로 추정)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Peace be with you! = Shalom 'eleykem)!"라고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19-23)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셔서 부탁하신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며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에 파송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밤낮으로 부활의 증인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슬픔의 현장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불안이 변하여 평화가 넘치며, 미움이 변하여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증인의 삶입니다.
지난 주간(고난 주간)에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당하신 후 십자가를 지시고 금요일 오후에 운명하시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세상은 어둠으로 꽉 차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모든 것은 패배로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과 조건은 오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와는 정반대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통쾌한 일이며 희망을 주는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아들임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로 바뀌어지고 예수님의 승리가 내 승리로 역사하는 귀중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이 부활의 신앙을 믿는 자들에게는 무한한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은 거짓을 진실로 변화시켰습니다.
진리는 반드시 승리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거짓을 이기신 승리의 부활입니다.
2) 공포에서 기쁨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무덤의 돌문이 열림으로 모든 믿는 자들의 기쁨의 문도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공포를 기쁨으로 바꾼 승리입니다.
3) 절망에서 희망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구원자요, 사랑의 대상인 메시야를 잃어버린 성도들의 실망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저들은 향유를 준비하여 새벽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시체에 발라 드리는 것이 고작 희망이었습니다. 무거운 돌문이라도 누가 열어주는 것이 고작 저들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향유도 필요 없었습니다. 돌문은 완전히 열려져 버렸고 그 절망의 돌문은 지금도 열려져 있는 것입니다. 절망의 눈물을 기쁨의 눈물로 바꾸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헛수고였습니다. 이때 부활의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잡은 희망을 놓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희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승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어떠한 절망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가 있게 됩니다.
4)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롬 6:5절에 "우리가 그이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것처럼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한 죽음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었고, 새 생명도 연합자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사형법에는 연합하여 죽이는 형벌이 있습니다. 시체와 맞붙여 놓으면 그 독으로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죄의 속성도 그리스도와 맞붙어 죽고, 사는 것도 그리스도와 맞붙어 살게 된 것입니다. 롬 8:10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할 살 수 있는 성도입니다. 그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여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다면 아직 완전히 영글어지지 않았지만 다음 세대에게서 위대한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어렸을 때 그의 선생님은 항상 교실로 들어가는 학생들에게 모자를 벗고 예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학생들이 물었더니 그 선생님은 ‘너희들 중에 한 명이 나중에 독일의 역사를 바꿀 인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만약에 경우를 생각해서 미리 경의를 표해 두는 거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을 새롭게 합시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를 깊이 묵상해보면 오늘의 영광은 과거의 고난의 열매이며, 미래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의 열매입니다.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시 23:3 말씀대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내 혼을 소생케 하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오늘 확실히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주님을 장례 하신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셔서 부활의 장소가 되심을 감사하나이다. 더 이상 주검도 슬픔도 절망도 없는 빈 무덤이 되었음을 감사하나이다. 오늘 주님과 함께 저희도 다시 일어나사 모든 부정적인 생각, 절망, 눈물, 어두움을 거두어 주시사 저녁과 밤은 지나고 새벽과 아침이 다시 시작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마태복음 고난주간 설교말씀] 호산나 믿음과 찬송(마 2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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