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마태복음 고난주간 설교말씀] 호산나 믿음과 찬송(마 21:6-17)

복음의 능력 2022. 4. 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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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종려 주일을 맞이하면서 바로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종려 주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의 예배를 드리고 고난주간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골고다 언덕에서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육체적으로 동참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목: “호산나 믿음과 찬송”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마 21:6-17

 

요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말하기를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주제: ‘주님, 저희들을 구원하소서!’ 외침으로 구원을 간구하며 고난주간을 지내자

오늘은 부활주일 한 주일 전 종려주일(Palm Lord's Day)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부활절 전 주일에 유아세례, 학습, 입교 등을 가집니다. 또 고난주일(Passion Lord's Day)을 함께 지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에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오르셨습니다. 이번에 예루살렘으로 오신 주목적은 인류 구원을 위해 대속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 and to give his life a ransom for many.” (막 10:45, 마 20:28)는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고난의 쓴잔을 마시러 오신 것입니다. 3년 반 전에 세례[침례]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침례]받으러 오신 예수님을 소개하기를“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 1:29)고 한 대로 십자가에서 자신을 화목제물(롬 3:25)로 드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약 1,000미터나 오르는 험난한 길입니다. 여리고는 지중해보다 250미터 낮은 곳에 위치해 있고, 예루살렘은 해발 750미터이기에 1,000미터나 등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는 도중에 유다 광야를 지나야 하며 감람산을 올라야 합니다. 첫 번째 만나는 마을이 벳바게(Bethphage, "무화과 마을“이란 뜻)인데 감람산 동쪽, 여리고-예루살렘 도로 길가에 있는 동네입니다. 현재 이 동네에 빅토리아 병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나귀 곧 나귀새끼를 끌고 와서 그 위에 주님께서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슥 9;9, 마 21:1, 막 11:1-7, 눅 19:29).

 

이때 예루살렘 주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유월절을 지키러 온 유대인들이 그들의 겉옷을 나귀새끼위에 얹기도 하고 겉옷을 펴서 나귀가 지나갈 길에 펴며, 종려나무(Palm tree) 가지를 흔들며 소리 지르기를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 21:9) 하며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영했습니다. 시 118:24-25에 나오는 히브리어로 ‘호시안나’ 즉 ‘우리를 구원하소서 Save us'를 헬라어 표기로 ’호산나 Hosanna'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군중들의 외침은 열광적이었습니다.

 

예전에 다윗왕이 예루살렘으로 천도하고 나서 오벳에돔 집에 보관하던 하나님의 언약궤(Ark of Covenant)와 성막 기구들을 예루살렘에 옮길 때 너무 기뻐 춤을 추며 환영하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삼하 6:12-19). 우리도 이 시간 예수님을 내 맘속에 입성하시도록 열렬하게 환영합시다. 기쁨의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구원자(Savior)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종려주일은 안식일 다음날로 당시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시켜 ‘다윗의 영광’을 되찾게 하실 메시야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이 예루살렘 입성은 죽음을 향한 길이요, 섬김을 위한 길이요, 용서와 화해를 이루시기 위한 평화의 왕으로서의 행진이었습니다. 스가랴의 예언(막 9:9)처럼 아직 사람이 타 본 일이 없는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메시야를 오늘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곧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입성은 평화의 왕이심을 예언한 것이 성취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용서와 회해와 섬김과 평화로의 새로운 길을 여신 사건입니다. 새 언약(New Covenant)의 첫걸음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희생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나귀를 타시고 겸손하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길목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희생은 용서와 화해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섬김과 평화로의 새로운 길을 여는 구속의 사건입니다. 다윗 왕이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옮김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새로운 나라가 되었듯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와 희생으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평화의 왕, 새로운 언약을 이루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종려주일을 맞아 우리들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겸손한 섬김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용서와 화해의 길을 열어주신 것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평화의 왕, 구원의 주님이 오신 것을 증거 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으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의 말씀대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존심을 버리며, 물질을 사용하고, 시간을 바치며 지식을 드리면서 씨앗을 뿌리면 그것은 죽어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2:4-11에 보면 종려주일의 의미는 겸손, 순종, 희생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세를 가지셨습니다. 이방인들이 보기에는 십자가는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초라하게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즉 인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일념이었습니다. 육체의 고통도 수치도 종이 됨도 마지막 죽음까지 모든 수난을 감수했습니다. 이렇게 말씀과 믿음이 충만할 때 그리스도처럼 낮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겸손한 자를 높이 세우실 것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e, AD 354~430)은 기독교인의 덕목 중에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겸손을 배우고 닮아 순종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영생의 면류관을 줄 것이며,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이니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이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5-11)

 

예루살렘에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온 군중들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겉옷을 벗어서 펴는 사람도 있었고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는 제자들이나 나귀 새끼를 제공하는 숨은 제자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왕을 대하여 하는 것과 같이 번영과 승리의 상징이 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의사인 누가는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시는 주님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 그 결심이 더 구체화된 내용을 누가는 다시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대언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3).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는 결의를 단단히 하시고 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성전에서 일대 개혁을 단행하실 것이고, 유월절 식사를 나누실 것이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것이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것이며, 세상 심부름꾼인 제자 가룟 유다의 입맞춤을 받게 될 것이고, 세상이 거리끼는 십자가를 지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장차 자기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는 것을 경고하기 위해 자신의 목에다 멍에를 걸고 다녔습니다(렘 27:11). 목전에 닥쳐온 일을 백성들은 모르고 있었고 가르쳐줘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물 교훈을 하느라고 멍에를 메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영적으로 죽은 도시 예루살렘과 거기 모여드는 사람들과 거기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각종 사회악을 보시면서 이렇게 탄식하셨다고 마태는 적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 23:37-38). 이런 도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셨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19:41-44). 사람이 되셨지만 그 본성은 여전히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함께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는 죽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왕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우리의 충성을 봉헌해야 합니까? 불의로 의를 이기는 예루살렘의 유지들입니까? 의로우신 채 십자가에 올라가 불의한 세력들에게 패하고 계신 의로우신 그리스도입니까? 비참하게 죽으신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경비병을 파송하여 무덤을 지키는 승자들입니까? 우리의 가치관을 어떻게 세워나갈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하나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빌2:9-11).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를 유월절 절기로 잡으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희생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며 어린 양들을 희생제물로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셨는데 그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인류구원을 위해 죽으시려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도리어 로마의 통치를 받던 자기 나라를 해방시키는 제 2의 모세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호산나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는 환호가 바로 그걸 말해줍니다. 이 말은 ‘예수님 왕 만세’ 또는 ‘왕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전적으로 정치적 의미가 담긴 구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구호를 외칠 때 승리와 영광을 상징하는 종려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맞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종려가지로부터 종려주일이란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날은 승리나 영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날입니다. 처절한 고뇌와 처참한 고난이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일이 시작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그리고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호산나” 환호가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는 저주와 절규로 변할 것을 다 아셨을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고난주간은 금방 변해버릴 군중들의 태도를 다 아시면서도 그들과 모든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루시기 위해 침묵하는 뜨거운 사랑으로 묵묵히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는 주간입니다. 주님의 겸손과 온유 그리고 처참한 고난 속에 담긴 무한한 사랑에 감사하는 주간이 되어야겠습니다.

 

독일의 반 나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 1906~1945년 4월 9일. 나치스 독일의 반인류적 죄악을 방관할 수 없다고, 버스 운전사가 정신착란으로 버스 운전대를 잡고 버스에 탄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때, 그 미친 히틀러를 그냥 둘 수 없다며,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하였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1943년 3월) 2년 후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져간 본회퍼 목사의 순교의 날이 바로 오늘 종려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시인 T.S. 엘리어트 (Thomas Stearns Eliot 1888-1965)는 "황무지"(The Waste Land, 1922년)라는 제목의 긴 시의 첫머리에 "4월은 잔인한 달 April is the cruellest month"이라고 했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 꽃 피우고/ 추억과 욕정이 뒤섞이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이 오히려 따뜻했지요/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어요/ 여름은 우리를 놀라게 했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한 날이 1919년(기미년) 4월 11일(지난 목요일)이어서 지난 주간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행사와 축하를 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4월에 슬픈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일제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십계명에서 명령한대로 "우상을 섬기지도 말고 그 앞에 절하지 말라"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의 양심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 마귀들 앞에 머리 숙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바로 1944년 4월 21일 우리 믿음의 조상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1960년 4월 19일 독재를 물리치겠다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빈손 들고 맨 주먹으로 총칼에 대항하여 일어난 어린 학생들, 185명의 젊은 영혼이 한국 민주주의의 제단에 속죄양으로 희생되었습니다. 학교 교정에 흐드러지게 피어 오른 라일락 꽃 향기가 유독 강했던 잔인한 4월이었습니다. 세월호가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경에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침몰되어 300여백명의 어린 학생들과 국민들이 희생당했습니다.

 

미국에서도 4월은 잔인한 날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아버지이며, 정부는 국민의 것이며 국민에 의한 것이고 국민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실천한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 미국 흑인 해방의 기수였던 링컨 대통령이 백인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진 것이 4월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백인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진지 100년 뒤, 또한 백인 암살자의 흉탄에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쓰려져 비명에 간 것도 4월이었습니다(1968년 4월 4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4월 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종려가지로 군중들은 환영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군중들이 흔들어 댄 나뭇가지가 보통나뭇가지가 아니라 종려나무가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13)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향해서 부르짖기를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하고 외쳤습니다(마가 11:10). 요한복음은 더 불온합니다. "이스라엘의 왕, 찬미받으소서 (요한 12:13)." 누가복음에서는 "하늘에는 평화, 하나님께 영광! (누가 19:38)."

 

영웅이나 장군을 환영하는 소리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 예루살렘에 살던 시민들 까지도 "이게 누구야?"하고 물었을 때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대언자"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마태 21:11). 그런가 하면,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소리 지릅니다. "선생님, 제자들이 저러는데 왜 꾸짖지 않으십니까?" 왜 제자들과 민중들을 선동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잘 들어라.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누가 19:19-20)." 참 재미있는 것은 요한복음에서는 같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 이제는 다 틀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따라 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걱정하였다 (요한 12:19)."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민중들은 모두 예수님 편이 되고, 친로마 파, 바리새파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민심은 완전히 예수님에게로 돌아 간 것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 가시자마자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기도처까지 들어온 환전상(세상 동전을 성전 화폐로 바꿈)들을 쫓아내시며 "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고 예레미야가 성전 설교한 것을 인용하십니다(렘 7:11, 마 21:13) "성전" 하면, 거룩한 집, 엄숙한 집, 성결하고 깨끗한 집, 종교적인 예배를 집행하는 공간이어야 하고, 성전 뜰은 고요하고 거룩한 기운이 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전에 제사 드린다고 몰고 온 소와 양과 염소 그리고 비둘기를 사고팔고 하느라 시끄러웠고 성전 예물을 파는 장사꾼들은 호객하노라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물건 사는 사람들은 로마 돈을 유대나라 돈으로 환전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들 장사꾼들을 모두 성전 밖으로 내쫓아 버립니다. 성전의 잘못된 모습은 이렇게 개혁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루터와 칼빈을 통해 개혁을 선언하셨습니다. 교회는 계속 새로워져야 합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으로 회복해야 하고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뿐 만 아니라 아직도 성전 뜰 안에 모여 들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하고 소리 지르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성전의 주인을 자처하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이 성전 뜰에서 하시는 일을 막지 못하고 어쩔 줄도 모르고 있는데 아이들까지 시끄럽게 하니까 부화가 터진 것입니다. 참다못해 예수님에게 달려듭니다. "이 아이들이 하는 말이 들립니까?"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은 왜 조용히 하라고 안하십니까? 그렇게 항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도 당당하십니다. "어, 들린다. '어린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읽어 본 일이 있느냐? (마태 21:16)" 아이들이 성전 안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어린이들을 귀찮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어린이와 같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마태 18:2-5)"고 아이들 편이 되신 예수님의 어지신 모습을 기억하게 합니다.

 

예루살렘에 민중들과 함께 입성했고, 성전을 점령했지만, 로마 식민지로 부터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은 정화하셨지만, 성전을 쟁취하고 제사장 자리에 올라앉지도 않으셨습니다. 내일, 월요일부터, 예수님의 고난의 날이 시작됩니다. 우선 성전 주인들, 종교인들, 친 로마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율법학자들, 신학자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잡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고난주간을 지키며 특별새벽기도를 하며 복음서를 읽고 주님께서 마지막 주간에 행하신 일을 묵상하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합시다.

 

월요일(막 11:12-14, 20-26, 마 21:18-19)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입성,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저주하심

 

화요일(마태 24-25장) 종말 교훈하심

 

수요일(요한 13-17장) 다락방 강화,

 

목요일(요한 13-17장) 다락방 강화, 세족식, 겟세마네 동산 기도

 

금요일(마 26-27장, 막 14-15장, 눅 22-23장, 요 18-19장) 십자가에서 죽으심

 

토요일(마 28장, 막 16장, 눅 24장, 요 20-21장) 부활 전 구약의 안식을 완성

 

이번 고난주간 존 번연(John Bunyan, 1628년 영국태생 -1688년 열병으로 사망)의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도 읽어보며 기독도처럼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는 것도 좋습니다. 번연의 청교도적인 삶에 대해 인기가 높아가자 권력가들이 그를 감옥에 투옥했는데 존 번연 목사님께서 옥중에서 쓴 믿음의 순례 여정을 나 자신에게 한번 적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번연 자신을 한 기독도(Christian)로 묘사합니다. 그가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자신의 영적 싸움과 승리를 나타냅니다. 기독도는 처음에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그는 멸망의 도시를 떠나 절망의 구렁텅이를 헤쳐 나가 율법주의씨(Mr. Legality)를 만났습니다. 그후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그 문을 지난 후에는 십자가 밑에 자기 짐을 벗어던졌습니다. 한 통역자가(Interpreter) 그에게 장차 그가 천국(Celestial City)으로 가는 도중에 마주칠 것들을 보여주었습니다. 한번도 청소하지 않은 큰 응접실로 가는데 누군가 와서 청소합니다. 빗자루로 쓸기 시작하자 먼지가 피어올라 기독도는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율법으로 죄를 파헤침). 그런 후 한 소녀가 물을 가지고 와 뿌리며 기쁜 마음으로 쓰니 먼지도 나기 않고 깨끗이 청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말합니다. 율법은 죄를 발견하여 그것을 금하지만 그것을 억제할 힘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가 전복되고 사라져서 영혼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청결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기업으로 받기에 합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통역관은 다시 기독도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불은 사탄이 아무리 물을 뿌리더라도 은혜의 기름(성령)이 계속 공급되기만 하면 인간의 마음속에서 더욱 뜨겁게 타오른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통역관과 헤어지고 나서 순례하는 동안 많은 원수, 난관, 친구, 축복을 만납니다. 미의 궁전(Palace Beautiful)에 도착하니 경건(Piety), 신중(Prudence), 사랑(Charity)의 친구를 만나서 평화의 방(Chamber of Peace)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아침 임마누엘의 땅을 흘낏 보았습니다. 대단히 기쁘고 거대한 땅, 삼림과 포도원, 온갖 과일과 꽃, 보기에도 즐거운 샘물등으로 장식된 땅이 보였습니다. 이곳에 도착하기 위해 갑옷이 필요하답니다. 경건, 신중, 사랑은 그의 머리에서 발끝에까지 갑옷과 전신갑주(칼, 방페, 투구, 흉배, 구두, 끊임없는 기도)를 입혀 주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기독도들에게도 성령 충만에 의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역시 가는 도중 많은 영적인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시련과 싸움을 거친 후 허영의 도시(Vanity Fair)에 도착했습니다. 천국에 대한 관심도 없고 모르는 세상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기독도는 성실(Faithful)이라는 친구와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습니다. 자신은 이 세상에서는 순례자요 나그네이며 이제 자기의 고향인 거룩한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이라고 진술하니, 허영의 도시 사람들은 이들이 미쳤다고 쇠로 만든 우리에 가두어 버립니다. 결국 성실은 질투(Envy), 미신(Superstition), 알랑쇠(Pickthank),등에게 고소를 당하고, 육체의 기쁨, 사치, 헛된 열망, 호색, 탐욕 및 모든 귀족들의 증언과 배심원들에 의해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배심원들은 맹목(Blindman), 불량(No-good), 악의(Malice), 색욕(Love-lust), 무절제(Live-loose), 고집(Heady), 잔인(High-mind), 원한(Enmity), 거짓말(Liar), 잔인(Cruelty), 빛을 싫어함(Hate-Light), 무자비(Implacable)등이었습니다.

 

기독도는 극적으로 도망쳐 나와 여행을 계속하다가 소망(Hopeful)과 합류했습니다. 그들은 헛된 확신(Vain-Confidence) 때문에 길을 잘못 들어 왕의 길, 또 성결의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절망의 용사(Giant Despair)에게 잡혀 의심의 성(Doubting Castle)에 투옥되었습니다. 여기서 거의 죽을 뻔합니다. 마침내 약속(Promise)의 열쇠로 감옥문을 열립니다. 기독도와 소망은 다시 성결의 길을 찾습니다. 드디어 즐거움의 산맥(Delectable Mountains)에 이릅니다. 이들은 여기서 지극히 풍성한 임마누엘의 땅의 축복을 만끽했습니다. 이 산에서 천국을 얼핏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지나 얼마동안 고가도로를 여행하다가 또다시 길을 잘못 들어 아첨꾼(Flatterer)의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빛나는 사람(Shining Ones)이 그들을 구하여 다시 좁은 길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여행을 계속하여 뿔라(Beulah)땅으로 들어갑니다. 공기는 신선하고 맑았으며, 길은 곧게 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새소리를 들으며, 매일 꽃들이 피는 것을 보았으며 거북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곡식과 포도주가 풍성하게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밤낮으로 태양이 비추었습니다. 사망, 절망, 의심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입니다. 신랑과 신부의 약혼이 갱신되었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신다’ (사 62:5) 이곳 주민들을 거룩한 백성, 주님께서 대속하신 자들이라고 불리웁니다. 이 땅에서도 여행을 계속하여 자신의 순례길의 끝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진주와 보석으로 지어진 성이 나오고 황금 길이 보였습니다. 이 성을 보는 순간 소망(Hopeful)과 함께 이곳에 들어가고 싶은 열망으로 인해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대로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끝까지 순례의 길을 가니 그곳에는 과수원, 포도원, 정윈이 있었고, 문들은 고가도로로 통해 있었습니다. 잠시 잠을 잔 후 많은 순례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계속 길을 가다가 금처럼 빛나는 옷을 입고 얼굴이 빛나는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두 천사는 순례자들이 사망의 강에 도착하여 그곳을 건너 천국에 갈 때까지 그들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천로역정의 2부에서는 지상에 두고온 가족들(아내와 자녀들)도 이 과정을 거쳐 천국에서 만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성경(킹제임스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판매되어 읽힌 천로역정을 이번 고난 주간에 묵상해 봅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종려가지를 들고 메시야로 우리 교회에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합시다. 2000년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무리들은 진정 평화와 정의의 메시야 입성하셨듯이 우리 교회가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 가정에도, 제 혼에도 들어와 주십시요! 그리고 십자가의 치욕과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우리의 성전을 정화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고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외롭고 병든 이들을 환영하고 나누고 치유하는 예수님의 공동체로 변화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중심한 밥상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처럼 서로의 발을 씻어 주는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오늘 저희들에게 메시야로 오심을 환영하나이다. 저희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시옵소서. 저희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 그리고 외로운 사람들을 환영하는 교회 되게 하시옵소서. 서로 사랑하는 믿음의 공동체, 서로 섬기는 희망의 공동체 되게 하시옵소서. 함께 아픔을 나누는 치유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애굽기 17장 주석 설교말씀] 르비딤 사건들(출 17:1-16)

 

[출애굽기 17장 주석 설교말씀] 르비딤 사건들(출 17:1-16)

출애굽기 17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에 왔을 때 마실 물이 없어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호렙 산의 반석을 때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반석에서 물이 나왔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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