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알쓸잡

[출애굽기 3장 주일설교말씀] 불붙는 떨기나무(출 3:1-5)

복음의 능력 2021. 2. 11.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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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출애굽기 3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불붙는 떨기나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모세는 40년 전에 자신의 의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을 죽여 미디안 광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로는 구원할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영적 훈련을 받게 됩니다.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목회를 배웠습니다. 그러고 나니 하나님께서 호렙산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훈련시킨 후에 사용합니다. 나의 의가 모두 죽었을 때 그리스도의 의가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나의 의는 사라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나타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불붙는 떨기나무(출 3:1-5)

 

출 3: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출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 3: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때에 

출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 3: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대제국의 왕자가 되어 세상이 부러워하는 부귀영화를 차지하는 행운을 얻었으나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섰다가 그 모든 것을 일거에 잃어버린 사나이 세속적으로 평가하자면 하지 않아도 될 정의를 위하여 나섰다가 피를 본 불운의 사나이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애굽의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그의 뜻을 하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에 외적으로 보면 낭패 또는 실패의 사건이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낭패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도망자가 되지도 광야에서 양 떼를 치며 울분과 회한의 날을 인내하지 않을 수 없는 연단의 시간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왕자의 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혹독한 시련을 통한 훈련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인가? 스스로 그런 연단을 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며 누가 그에게 그런 훈련을 시키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120년의 나이를 산 그의 생애의 1/3이나 되는 40년이란 세월의 그 울분과 회한과 고독의 훈련을 누가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히브리 노예들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에게는 누구이든지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인내의 훈련이었다고 보인다. 고난을 받은 자만이 고난을 안다. 그 정도의 고난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400여 년간이나 되는 노예생활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큰 목사 치고 고난의 삶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인생은 온통 고난의 연속인데 고난을 겪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고난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이해할 것이며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님도 고난을 겪지 않았는가? 가난한 목수의 아들, 갈릴리라는 소외된 지역의 촌사람, 40일간의 금식과 엄청난 마귀의 유혹 등.... 사도 바울은 말했다.

 

떨기나무- 영어로 burning bush라고 하여 시내 광야의 뜨거운 지열로 인하여 자연 발화하는 식물을 말한다. 예배의 전제는 하나님께서 영으로 예배하는 자리에 임재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의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합당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본문에 보면 너의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다. 모세는 신발을 벗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그의 얼굴도 가렸다. 이것은 예배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세상 삶에서 묻어오는 죄의 더러운 것을 회개하고 겸손한 자세 즉 얼굴을 가리는 자세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알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의 사죄하시는 은총을 힘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너는 이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라고 답하며 주의 일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위해서 헌신하겠나이다.고 답하는 것이 예배의 마지막이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나는 그 말씀대로 살 수 없다. 목사님을 늘 그렇게 말할 뿐이다라고 하며 목사의 말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이며 완전한 예배가 아니라. 반쪽 예배다.

 

이렇게 보면 예배를 제대로 드리는 날이 몇 날이나 되었을까? 정말 마음속에 넘치는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날이 몇 날이나 되었을까? 배는 드리지 않고 설교만 듣고 가는 사람-예배드리러 왔다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가는 사람-예배드리러 왔다가 죄를 짓고 가는 사람, 하나님을 만나 뵈러 왔다가 사람만 만나고 가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다가 사람의 말만 듣고 가는 사람,

 

예배에는 사람이 드리는 순서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말씀을 주시는 순서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듣고 응답해야 한다. 아멘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예배가 드려지지 않은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제사의식을 생각해보라. 안국동에서 본 놋 제기들을 닦아 제사상처럼 차려놓은 모습이 나를 압도했다. 레위기에 나타난 제사의식을 보라 예배드리기 전에 제사장이 자신을 정결케 하고 제사를 위한 예복을 입고 성소를 거룩하게 하고 제단을 성화하고 정결한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정성의 치밀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천국에 대한 묘사는 우리의 생각으로 실감이 나지 않는 거룩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는 너무 경솔하다. 예배를 위한 준비가 그러하고 예배를 드리는 몸과 마음의 자세가 그러하고 예배를 드리는 중의 여러 가지 요소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빙자하여 너무 경솔하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때는 얼마나 엄격했는지 모른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주기철 목사가 당회장이었는데 어느 주일 조만식 장로가 중대한 회의 관계로 예배시간에 늦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주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까치걸음으로 뒷자리에 앉으려 하는데 갑자기 주 목사님께서 '조장로 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에 어디를 왔다 갔다 하는 거요. 그 자리에 서서 예배를 드리시오.' 호통치는 소리에 온 교인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조만식 장로는 예배가 끝나는 시간까지 그 자리에 서서 예배를 드렸고 교인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주기철 목사가 지나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평신도도 아닌 장로였고 또 주목사의 오산학교 교장이었고 또 주 목사를 모셔온 장본인이며 예배시간에 늦을 분도 아니고 사유인즉 중요한 회의 관계인 것을 알 사람은 아는데 그렇게 호통을 친 것이다.

기장 교단의 기수의 한분인 송창근 목사님도 그 교회의 당회장이셨으나 신신학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사임시킨 교회인데 젊은 목사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난 후에 오히려 조만식 장로가 눈물을 글썽이며 주 목사님께 사죄를 하는 모습에 온 교인들이 눈시울을 적시며 감동을 했고 이후 예배에 늦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예배에 대한 자세가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내가 타당한 사정이 있으면 예배에 늦어도 누가 무어라고 할 것인가? 내가 예배에 참석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지 이런 자세는 교만한 자세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목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하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 된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의 거룩함에 합당한 찬양과 정성을 드리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을 기만하고 모독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엄숙해야만 좋은 예배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이전의 장로교 예배처럼 예배시간에는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손뼉을 쳐서는 안 되고 할렐루야, 아멘도 하지 않고 순서에 따라 예배는 점잖게 진행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진정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에서 우러난 것이라면 손뼉이나 춤을 추는 행위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다. 다만 다른 성도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본문 전체는 417절까지 한 예배의 과정을 보여준다. 3:1-3절까지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의 동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구경하러 나온다. 교회는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사건들이 있어야 한다. 호기심을 느낄만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도 당신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적 기사들을 나타내 보이셨고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기 위해서 그에게 몰려왔다. 초대교회도 온 백성들이 감탄할 만한 사건들과 부러워할 만큼 사랑이 충만한 아름다운 공동체였다. 나도 한번 그들 가운데 끼어 봤으면 할 정도였다.

 

3:4-6는 예배에 임한 사람들이 마땅히 느껴야 하는 경외심이다. 경외한다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긴다는 것이다. 예배의 분위기는 처음 예배하러 온 사람들이 거룩함과 경건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자신의 영적인 누추함이 느껴지는 것이어야 한다

 

3:6 예배에 임하는 우리들에게 처음 주어지는 말씀은 '네 신발을 벗어라.'라것이다. 신발은 세상에서의 왕래를 위해서, 발은 보호하기 위해서 신는 것이다. 그것은 벗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1. 여기서 지나가는 세상의 한 장소가 아니라 멈추어 서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 장소라는 의미다. 가던 걸음을 멈춘다는 뜻이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행동을 멈춘다는 뜻이다. 행동만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생각도 멈추어야 한다. 배의 시간을 내가 스스로 한정하여 1시간 이내에 끝나야 한다는 것은 예배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절대자유의지와 하나님의 계시 활동을 인간이 제한하는 것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나를 위해서 한 시간 이내에 예배를 끝내게 해 주시오라는 명령이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세상에서 스케줄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나의 종교적인 욕구를 채워주세요라고 하며 자신이 예배받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에 임하는 예배자의 자세는 이 시간 이후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나이다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임산부가 산실에 들어가면서 신발을 벗는 것이나 환자가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신발을 벗는 것과 같은 것임을 생각하라. 이와 같은 자세로 예배를 드리지 않을 바엔 예배를 드리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낫다. 시계를 보지 말라. 시계를 본다는 것은 나의 스케줄에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 활동을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예배하러 오는 자는 시간계획에 쫓기는 상태에서 오지 말라. 정히 바쁘면 주일 저녁예배에 나아오라.

 

주일 저녁예배는 작은 예배가 아니다. 이 역시 예배다. 예배하러 나아오는 자는 최소한 2시간을 교회에서 보낸다는 생각을 가지고 나아오라. 사실인즉 양치기 목동으로서의 모세의 삶은 이 시간을 기점으로 멈추어졌고 그는 히브리인들을 위한 해방 지도자로서의 새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배에 임하는 자들은 이 예배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나아와야 한. 내가 아는 한 장로님은 중보기도를 하실 때마다 이 예배가 나의 생애에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나아와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 뵙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그리하는 것이며 이미 성령으로 거듭난 경험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분이시며 우리의 생애에 전무했던 최고 최대의 감격의 순간이 되게 하신다. 그렇지 못한 것은 우리의 문제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나아와야 한다. 이런 기대를 가지지 않고 나아오는 것은 예배를 의무적으로 드리는 것이며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기대 없이 오는 것은 인간적인 예배다. 이번 주에는 목사가 어떤 식으로 설교할까 성가대는 어떤 찬양을 얼마나 잘할까 이번 주에 신도회에서는 어떤 친교 프로그램을 가지고 모일까 하는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 뵙고자 내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기대로 나아와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생 동안 몇 번이나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일까? 몇 번이나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의 생애를 인도하시는 말씀을 듣는 예배를 드리는 것일까? 예배드리지 않으면 한주일 동안의 삶이 개운치 못하고 무엇인가 모르게 삐거덕 거리는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신앙의 상태를 이야기한다. 이제 예배드리지 않을 수 없는 예배의 습관이 형성된 자신을 스스로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그 정도면 꽤 신자가 된 셈이나 아직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자세가 갖추어진 것은 아니다.

 

7-예배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더불어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 있는 백성들 즉 그들이 원치 않는 억압에 짓눌려 탄식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다. 모세는 스스로 인생에 대한 자책감과 회오에 짓눌려 살아왔고 이제 80이라 남의 일에 관심하며 남을 위해서 또는 민족을 위해서 무언가 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났고 이제는 여생을 건강 가운데 소일하며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만 기다리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 애굽에 있는 백성들의 고난 받는 삶에 대해서 관심하라고 하신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이런 이야기를 하기를 원하신다. 흉악한 범죄들이 만연하는 세상에서 죄악으로 인하여 불안에 떠는 사람, 여러 종류의 강도를 만나 영육 간에 죽어가는 사람, 정신대로 끌려가서 수모를 당한 사람들의 한, 징용 가서 죽은 가족들로 인한 유가족들의 한, 북에 있는 가족들을 보고 싶어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한, 공해 환경에서 근무하다 직업병에 걸렸으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신음하는 사람들의 한, 파괴된 가정에서 버림받는 청소년들의 방황-이런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관심 가지신다.

12절은 예배자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 즉 축도에 해당한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할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셨다. 이제 우리는 세상으로 나가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여 예수님의 제자를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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