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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3장 주일설교말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단 3:8-18 / 합 3:16-19)

복음의 능력 2021. 2. 21.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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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다니엘 3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다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에서 수치를 당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느부갓네살 왕은 금 신상을 만들어 그것에 절하게 하여 숭배하게 했습니다. 그때 유다 백성들은 절대 숭배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게 된 이유가 우상숭배의 죄이었는데 여기 와서까지 금 신앙에 절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금 신상에 절을 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절대 금 신앙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 사람은 바벨론에 끌려온 유다 백성들의 대표입니다. 그 당시 유다인들이 죽으면 죽었지 절대 금 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현재 우리의 신앙 상황은 이렇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재물과 명예와 권세를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단 3:8-18 / 합 3:16-19)

 

단 3:8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단 3:9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르되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단 3:10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모든 사람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려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단 3:11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니

단 3:12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 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단 3:13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말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단 3: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단 3: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비파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단 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단 3: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단 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서론>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낙심하지 않거나 삶에 좌절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좋은 환경 가운데서 태어나고, 모든 사람들의 돌봐줌을 받는 처지에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낙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실패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실패와 좌절을 하게 되면 그 책임을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전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봐주시지 않아서 이와 같이 되었다. 우리 아버지 때문이야. 리 형님 때문이야. 사회 때문이냐. 국가 때문이야.' 유명한 싱싱 형무소 소장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소장으로서 사형집행에 입회했을 때 사형수 중에서 자기 죄 때문에 사형을 받는다고 말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낭패를 당하고 좌절을 만나게 되면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중에 나타난 다니엘의 신실한 믿음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벳느고는 낭패와 실망밖에 할 수 없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는 바벨론이 세계를 제패한 시대였고,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시대였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을 자랑하는 바벨론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은 그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때였습니다. 바벨론은 오늘날 이라크 땅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은 극에 달하여 자신을 상징하는 금 신상을 세워 그 금신상에 예배하고 절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 명령이 어떤 명령인데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여기에 항거한 세 사람의 신앙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니엘의 신실한 신앙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으로서는 도저히 우상 앞에 절 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우상숭배 거절이 자신들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습니다. 분명히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하는 이들에게 사형이 찾아오다니 참으로 한이 서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은 조금도 불평함이나 억울함이나, 요동함이 없었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배반치 않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극한 풀무불 가운데서 건져 주셨습니다. 이들을 포박하여 풀무 속으로 던졌던 군인들이 오히려 그 열기에 감당 못하여 즉사하였던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만 현재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죽을 수도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것처럼 우리도 죽음과 같은 고난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절대 감사 신앙을 가지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그렇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세상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성도의 바른 신앙입니다.

 

세상에서 끊어지는 것보다 하나님에게서 끊어지는 것은 더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이 범사에 승리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같은 신앙이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신앙입니다. 그러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져다주는 범사에 감사의 신앙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구원(구속)의 감사를 철저히 깨닫는 데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가 있습니.

 

우리가 이 땅에서 가장 많이 감사해야 할 것은 바로 구원받은 사실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 형벌을 면치 못했을 나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예수님 안에서 용서하고 천국 백성을 삼으셨으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감사의 진정한 출발은 엄청난 구원에 대한 감격에 있습니다. 이 구원의 감사 구속의 감사는 조건부 감사일 수 없습니다.

 

이 구원의 감사를 잊어버린 감사는 뿌리 없는 겉치레 감사이며, 외식적인 감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정확히 정립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과거를 들추어내어 지적해 낸다면 우리는 모두 다 멸망의 자식이요, 흑암의 백성이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쫓는 마귀의 종이요, 금수와 버러지 형상을 하고 있었던 자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는 데 내어 주신 그 위대한 사랑을 감사하는 것은 마땅한 도리요, 의무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하나님의 백성,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목숨을 버려 가면서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조소와 핍박을 받으면서까지 참고 인내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의 감사는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이 마땅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가 감사를 느끼지 못하고 감사의 표를 하지 못한다면 그는 죽은 자요, 짐승과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눅 17:11-19에 보면 10명의 문둥병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불치의 병이며 천벌로 여기는 문둥병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가는 도중에 갑자기 기적적으로 고침 받은 것을 알았습니다. 모두가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 그러나, 그중에 한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 만이 주님을 찾아와 그 은혜를 감사하며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병 고침 받았다는 사실에 취하여 고쳐주신 분에 대한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9명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말씀은 바로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느 교회에서의 일입니다. 한 청년이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였습니다. 달리고 뛰어야 할 청년이 관절염으로 고생하니 그 처지야 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처량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부흥회 기간이 돌아와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그 부흥회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그 청년의 관절염이 온데간데없이 감쪽같이 낫고 말았습니다.

 

목사님도 기뻐하고 신기해서 다음 주일 낮 예배 때 모든 교인들 앞에서 광고도 하고 간증도 하게 하기 위해서 벅찬 기대를 가지고 주보에 까지 그 내용을 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 낮 예배 시간이 다 되어도 그 청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속이 상한 나머지 다음날 그 청년을 찾아가 왜 지난주 예배에 출석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그 청년이 하는 말이 '목사님, 너무도 오랜만에 걸어보는 건강한 다리라서 도봉산에 등산 갔다 왔어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잘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는 것보다 내가 하나님의 구원으로 건강보다 더 중요한 영생을 가졌음을 감사할 줄 아는 성숙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2. 합력해서 선을 이룰 것을 믿는 믿음에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가 나옵니.(8:28-30)

 

우리의 다함이 없는 감사는 롬 8:28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생활 속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성도는 절망이 없습니다. 마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신앙과 같은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내일을 소망 있게 만듭니다. 이 같은 우리의 신앙은 불교의 비관주의와 무신론자의 염세 사상을 배격합니다. 인생을 무가치하게 버려진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성취시키는 꼭 필요한 존재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믿음은 인생을 바라볼 때 현재의 사실만 바라보지 않고 폭넓고 길게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이 같은 믿음을 가졌기에 죽도록 매를 맞고 쇠고랑에 차여 어둡고 침침한 감옥에 던져졌어도 절망하지 않고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이 같은 신앙으로 "너희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뻐하라"라고 적극적인 감사 신앙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마라톤 경기와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느니라"(마 12:16)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앞섰다고 끝까지 앞서는 것이 아닙니다. 앞섰다가도 뒤서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도중에 낙심하지 말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 달리시기 바랍니다!

 

8:28절에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지는 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낙관적인 신앙을 가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둘째,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을 가집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함을 받은 자들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셋째, 모든 것이 합력하는 것을 믿음으로 낙관적인 신앙을 가집니다. 다시 말해 생활 속에서 당하는 성공과 실패, 기쁜 일과 슬픈 일, 합격과 낙방, 가난과 부귀, 병과 건강, 온갖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모두 하나의 결과를 위한 일들이라는 것입니. 무슨 결과를 위해서 그렇게 아프고, 괴롭고, 슬프고, 쓰리고, 힘들고, 어렵습니까?

 

넷째, 모두 선을 이루기 위한 과정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선을 이룬다는 것은 구원을 성취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영생을 얻게 된다, 승리한다, 축복을 받는다 행복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요셉은 모든 것이 합력할 줄을 믿고 살아갔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형들로부터 부당한 미움을 받고 아버지 모르게 애굽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어린 나이에 아무런 희망의 기미도 없는 가운데 짐승처럼 천대받아가며 고생을 하였습니다. 또한, 잘못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죄짓지 않으려고 한 것 밖에 없었음에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죄수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불행에서 불행으로, 절망에서 절망으로 이어지는 기구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이 한토막 한토막의 사건이 요셉을 점점 더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과정이 아니라, 보다 큰 영광과 행복을 찾아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깨달은 요셉은 나중에 천추에 원한 맺혔어야 할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형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애굽에 형들이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나를 애굽으로 일찍 보내신 것이라"라고 하면서 미워하고 복수해야 할 형들을 오히려 위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간적으로 볼 때는 불행자요, 낙오자 같았으나 그 모든 고통과 환란과 불행이 종합되었을 때에 위대한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역설적입니다. 참 진리는 합리적인 것이 아닌 것이 많습니다. 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고, 섬김을 받는 자 보다 섬기는 사람이 더 위대합니. 절망 속에서 발견하는 희망이 생명력 있는 희망입니다. 작은 불행은 큰 불행의 씨앗이 되고, 뜨거운 눈물은 만족한 웃음의 바탕이 됩니다.

 

패배 뒤에 오는 승리는 패배의 쓰라림까지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신앙의 길은 순풍에 항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폭풍우와 싸워가며 바다를 건너가는 용기 있는 사공입니다. 역경과, 시험, 유혹과 실패, 가난과 질병 등은 보다 더 연단된 믿음을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 필요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작은 수고와 희생들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고등학교와 대학에 낙방하고 나면 생의 의욕을 상실하고 내일을 포기하고 비관에 빠집니다.

 

방 자체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낙방을 인생의 낙방으로 여기는 마음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낙방은 패배가 아닙니다. 한 때의 패배가 결코 불행이 아닙니다. 행이란 불청객은 결코 그 수명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낙방 뒤에 자기 발견이 있고, 패배 뒤에 새 출발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지나가버린 어제보다 다가오는 내일이 더 중요합니다. 과거에 사는 인생보다 미래에 사는 인생이 적극적이고, 희망적이고, 신앙적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실패나 성공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 성공과 실패를 대하는 마음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보고 내일을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현재 때문에 내일을 비관하거나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행복의 문은 성공의 열쇠로만 여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의 열쇠로 더 큰 행복의 문을 열기도 합니다. 불행은 마음 약한 자의 것이요, 실패는 믿음 약한 자의 것입니다. 넘어지면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는 행동은 멍청한 자의 행동입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룰 줄을 믿는 참 신앙인에게는 불행을 모릅니다. 불행이 가까이 오는 동안에 모두 교훈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곳에는 불행이 없습니다. 믿음 앞에서의 불행은 고양이 앞에서의 쥐입니다. 지금,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됩니까? 스스로 고통스럽고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을 가지십시오.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불행이 변하여 교훈이 되고, 패가 변하여 성공이 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3.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에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가 나옵니.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은 결코 후회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한번 사랑하기로 작정하시고 구원하시기로 선택한 백성은 결코 놓치지 않고 끝까지 지켜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 할렐루야!

 

우리가 살아가는 앞길에는 성도라 할지라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와 분명히 다른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섭리와 인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은 비록 힘들고 어려운 시련의 길일지라도 나에게 꼭 필요한 인내와 연단을 이루시려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자상하신 계획의 일부인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역경과 혼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역경의 의미를 다 모를 따름이지 결국은 이 역경이 나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믿는 것이 축복입니다. 지금 이 어려운 중에서 무엇을 감사해야 되는 지를 잘 모르지만 이것으로 인해 결국, 내가 하나님 앞에서 크게 감사할 일이 있을 줄을 믿고 감사하는 이 감사야 말로 성숙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으로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구원하시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순교자 브래드 포드는 개신교도들을 핍박했던 메리 여왕 앞에서 말하기를; '왕이 나를 놓아주어도 감사하겠고, 나를 태워 죽여도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놓아주면 놓임 받아서 감사하고, 죽으면 순교해서 감사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같은 감사의 신앙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입니다.

 

<결론>

이제 우리 앞에는 오직 감사와 찬양만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불행과 시련과 환란은 우리에게 다가오자마자 인내와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훌륭한 교훈으로 변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성숙된 신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은 나의 환란과 고통과 괴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내 안에 있으니 악한 어둠들은 떠나게 됩니다.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여 어려움과 환란과 고통의 날들이 우리의 인생에서 떠나가고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 다가올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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