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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주일 설교말씀]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며(고전 11:1~34)

복음의 능력 2022. 3. 18.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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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성찬식에 관한 교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피와 살을 대하게 됩니다.

 

제목: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며”(고전 11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고전 11:1~34

 

요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가 있으리로다.” (고전 11:27)

주제: 자신을 분별하여 반드시 회개하고 주님의 성찬을 감사함으로 받자.

10월 첫 주일입니다. 10월을 “개혁의 달”로 지킵니다. 10월 31일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가 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i), 오직 은혜로(Sola Grac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의 구호로 ‘근원으로, 본질로’라는 뜻의 라틴어인 아드 폰테스(Ad Fontes, “back to the fountains, origins,” “back to the basic”)운동을 일으켜서 당시 가톨릭이 사용하던 알렉산더학파의 불가타 라틴어 성경(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이 아닌 안디옥 학파의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 성경(전통사본, 다수사본)으로 돌아가, 잘못된 신앙전통과 구원의 진리를 바로 잡는 교회개혁의 불을 들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가 품어야 할 신앙의 자세는 본질로 돌아가서 초심을 지켜야 합니다. 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작가)는 “가을날”이란 시에서 가을 들판에 바람을 놓아, 남국의 햇볕을 재촉하여, 마지막 남은 단맛이 포도송이에 스미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마지막 열매에 단맛을 더하기 위해 가을 햇살이 비추이는 이 계절에 성경적 교회의 본질, 복음의 진리를 회복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개혁의 달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가을에 “기도하게 하소서, 사랑하게 하소서, 성숙하게 하소서, 개혁되게 하소서, 그토록 미워하던 모든 것들을 용서하며 사랑하게 하소서, 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하소서” 실천합시다. 이것이 아드 폰테스의 정신입니다.

 

오늘은 개천절(開天節, National Foundation Day)입니다. 대한민국과 온 세계에 흩어진 한민족의 뿌리를 기념하는 날로 최고의 국경일입니다. 하늘을 열었다는 ‘개천(開天)’이란 말은 단군왕검이 BC 2333년에 백두산 신단수에서 광명개천(光明開天),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의 건국이념으로 나라를 시작했습니다. 광명개천은 빛으로 거듭나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홍익인간-이화세계/제세이화(弘益人間 理化世界=濟世理化 “세상의 모든 만물을 널리 이롭게 하는 자연의 순리와 이치대로 살아가는 세계를 만드는 참된 사람이 되라”)입니다. 이를 줄여서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이 되라)입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개천절을 공식적으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식민사관에서 단군과 고조선이 역사를 신화(myth)로 만들어 일왕(텐노天皇, BC 660년, 현재 나루히토(德仁) 일왕은 126번째 왕) 역사보다 앞서는 한민족의 상고사를 인정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아직도 식민사관에 충성하는 많은 한국 사람들이 오늘 개천절인데도 불구하고 단군을 실화(實話)가 아닌 신화(神話)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한국사람 맞습니까?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에게 팔아넘긴 이완용의 조카 이병도 교수가 만든 국정교과서에도 신화라고 나옵니다. 오늘이 개천절인데 이제는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고치고 아드 폰테스, 본질, 진리로 돌아갑시다. (고)조선 보다 4년 먼저 건국된 탐라국(제주도)의 역사에도 보면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세 분이 BC 2337년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후 4년 뒤에 조선이 단군왕검(노아의 현손(6대손)인 욕단에 의해 세워집니다(창 10:25-30). 예로부터 함경도지방 등에서는 음력 10월 3일에 단군 탄생일을 축하하는 ‘향산제(香山祭)’라는 이름의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존재하여, 여기서 개천절의 날짜가 기원하였습니다. 1909년 1월 15일 나철을 중심으로 대종교가 다시 문호를 열자 개천절을 경축일로 제정하고 매년음력 10월 3일경축 행사를 거행하였습니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임시 정부에서는 이때부터 음력 10월 3일을 국경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단군을 한겨레의 시조로, 고조선을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보는 보편화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광복(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도 이어져 1948년 9월 25일'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단군기원(檀君紀元), 즉단기를 국가의 공식 연호로 법제화하였다. 이후 1949년 10월 1일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천절은 원래 음력이므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음력으로 지내왔는데 1949년 문교부가 위촉한 '개천절 음,양력 환용 심의회'의 심의결과 음, 양력 환산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와 '10월 3일'이라는 기록이 소중하다는 의견에 따라 음력을 양력으로 바꾸어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개천절이라고 이름 붙이기 이전부터 한민족은 10월을 상달(上月)이라 부르며 제천행사를 치렀습니다. 한해의 추수를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을 다짐한 날입니다. 고조선 멸망 후,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마한과 변한의 계음(契飮) 등의 행사로 계승되었으며, 고려와 조선에서도 단군신앙을 이어나갔습니다. 개천절은 나라의 가장 큰 축제의 날로 이날은 다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 후,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며 춤을 추고 놀았다고 합니다. 개천절 날 노래(정인보가 작사, 김성태가 작곡)입니다.

 

1절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라

2절 백두산 높은 터에 부자요, 부부 성인의 자취 따라 하늘이 텄다.

이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니 이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다

3절 오래다 멀다 해도 줄기는 하나, 다시 필 단목 잎에 삼천리 곱다.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라

 

지난 주일에 이어 고린도전서 11장을 강해합니다. 고전 11장에서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첫째는 여자 성도님들이 머리에 써야하는 수건 문제이며 둘째는 성만찬식 문제입니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2)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2) 형제들아, 너희가 모든 일에서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규례들을 전해 준 대로 그것들을 지키므로 이제 내가 너희를 칭찬하노라.

 

1절은 앞장의 내용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았다고 말합니다. 성화의 과정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상적 인격의 본(the best ideal example)이십니다. 그분은 특히 온유와 겸손과 섬김의 본이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고(마 11:29), 또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0:2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Let this mind be in you, which was also in Christ Jesus:”(빌 2:5)이렇게 권면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들만 할 수 있는 말일 것입니다. 행함(실천)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믿음과 실천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2절.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교훈과 규례를 잘 지켰습니다.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종들이 전한 바른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성경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 말씀을 지키고 그 교훈대로 믿고 실천한다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주관을 따라 성경 말씀을 가감하고 그대로 행치 않는 것은 책망들을 일이지만, 자기 생각을 꺾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믿고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칭찬들을 일입니다.

 

2. 여자들의 머리에 수건으로 덮는 문제(고전 11:3-17)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니라. (4) 머리를 덮은 채 기도하거나 대언하는 남자는 다 자기 머리를 욕되게 하거니와 (5) 머리를 덮지 않고 기도하거나 대언하는 여자는 다 자기 머리를 욕되게 하나니 그것은 곧 그녀가 머리를 민 것과 전적으로 같으니라. (6) 만일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거든 또한 깎을 것이로되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수치가 되거든 여자는 덮을지니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인즉 참으로 그가 자기 머리를 덮지 않는 것이 마땅하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되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나니 (10) 이런 까닭에 여자는 천사들로 인하여 마땅히 자기 머리 위에 권능을 두어야 하느니라.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안에서는 여자 없이 남자가 있지 아니하고 남자 없이 여자가 있지 아니하니 (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또한 여자로 말미암아 났느니라.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덮지 않은 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냐? (14) 만일 남자가 긴 머리를 가지면 그것이 그에게 수치가 되는 것을 본성 그 자체도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 그러나 여자가 긴 머리를 가지면 그것은 그녀에게 영광이 되나니 여자의 머리는 덮는 것으로 주어졌느니라. (16) 그러나 어떤 사람이 논쟁하려 할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교회들에는 그런 풍습이 없느니라. (17) 이제 내가 너희에게 밝히 말하는 이 일로는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노니 그것은 곧 너희가 함께 모이는 일이 더 좋은 일이 되지 못하고 더 나쁜 일이 된다는 것이라.

 

3절.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남녀의 지위의 차이와 여성들이 머리에 쓰는 수건 문제에 대하여 말합니다. 구원받은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머리’라는 말은 주관자라는 말입니다. 각 남자의 주관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각 남자는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합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입니다. 이것은 남녀가 본질에 있어서나 영적 특권에 있어서 차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십니다(갈 3:28). 남녀는 본질에 있어서나 영적 특권에 있어서 동등하나 남녀는 그 위치와 역할에 있어서 다르며 여자의 머리는 남자입니다.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있어서 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神性)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과 본체이시며 그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지만, 그분의 인성에 있어서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딤전 2:5) 하나님은 그분보다 크십니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고 하십니다(요 14:28).

4-7절. 남자들은 공예배시 기도할 때나 설교할 때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습니다. 예언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아 말하든지 아니면 성경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오늘날 설교입니다. 교회의 집회시 기도나 설교를 할 때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여성들은 공적인 집회들에서 기도나 설교를 할 때 머리에 수건이나 모자를 쓰지 않으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머리를 밀거나 깎은 것과 같이 그에게 부끄러움이 되었습니다. 여자들이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은 여자의 머리가 남자 곧 남편이며 여자는 그 남편의 권세 아래 있음을 표시합니다.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므로 그 영광을 가리우지 않고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이며, 반대로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할 이유는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기 때문에 그가 자기 머리를 가리움으로 자신이 남편의 권세 아래 있음을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입지다.

 

8-12절. ‘천사들을 인하여’라는 말은 교회의 공적 집회 시간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성도와 함께함을 가리킨 듯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그 지위와 역할에서 구별된다는 것은 인간 창조의 사건에서 잘 증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남자를 만드시고 그 다음에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자는 남자와 별개로 창조되지 않았고 남자에게서 만들어졌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일차적 목적은 남자를 돕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고 여자가 남자를 위해 창조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남녀의 위치와 역할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자의 머리 수건 혹은 모자는 그가 그의 머리되는 남편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남녀는 비록 지위적, 기능적 차이가 있지만, 본질에 있어서나 영적 특권에 있어서는 동등합니다. 또 남녀는 사실상 상호의존적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남자는 여자에게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남녀의 역할이 차등하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를 무시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안에서 구원받은 남녀는 다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벧전 2:9).

 

13-16절.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은 그것이 머리를 가리우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므로 그 머리에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하며 긴 머리도 합당치 않습니다. 남자의 긴 머리는 남녀의 구별을 깨뜨린다는 점에서도 합당하지 않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구별하셨기 때문에, 머리나 복장도(신 22:5) 구별되어야 합니다. 남자는 남자다운 머리와 복장을, 그리고 여자는 여자다운 머리와 복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자의 긴 머리는 여자다운 머리모양으로 간주됩니다. 그것은 여자가 짧은 머리를 하는 것은 여자답지 못하다는 말이 됩니다. 긴 머리는 여자에게 영광이 되며 머리에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교회에서 기도와 설교를 할 때 남자들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해야 하며 여자들은 머리에 무엇을 쓰든지 아니면 긴 머리를 가지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17절.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모임이 유익되지 못하였음을 지적합니다. 교회의 집회는 유익한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임을 통해 유익을 얻어야 하고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 그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서로 교제하며 성찬의 떡을 나누었고 또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행 2:42). 오늘날도 교회의 모임들이 유익한 모임이 되려면, 성경 말씀이 충실히 강론되고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마음을 합하여 힘써 기도하는 모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만찬을 바르게 행하라(고전 11:18-22)

 

(18) 무엇보다 먼저 너희가 교회에 함께 모일 때에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을 내가 듣고 부분적으로 그것을 믿노니 (19) 인정받는 자들이 너희 가운데서 밝히 드러나려면 너희 가운데 반드시 이단 파당도 있어야 하느니라. (20) 그러므로 너희가 한 곳에 함께 모일 때에 이것이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니 (21) 이는 먹을 때에 저마다 자기 만찬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먹으므로 한 사람은 시장하고 다른 사람은 취해 있기 때문이라. (22)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없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내가 이 일로 너희를 칭찬하랴?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노라.

 

18-19절. 바울은 소문을 듣고서 고린도교회 안에 분쟁과 분열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믿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므로 일치와 단합을 유지해야 합니다. 거기에 분쟁과 분열과 불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교회의 일치와 단합은 단순히 외적이지 않고 내적이며 정신적이며 사상적이어야 합니다. 19절에 ‘파당’이라는 원어(하이레세이스 αἱρέσεις)는 ‘이단들, 분파들’이라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단들과 파당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인들의 지식과 믿음 그리고 인격과 삶이 아직 불완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탄이 교회들 안에 자기의 종들과 위선자들을 심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이단들과 고의적 파당들은 나쁜 것이지만,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 곧 바른 사상과 인격을 가진 자들이 드러납니다.

 

20-22절. 고린도교회의 모임은 거룩한 성찬 모임이 되지 못하고 단지 식탁 교제의 모임으로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음식은 각자 집에서 가져왔습니다. 게다가, 교회의 분열과 파당 때문에 교인들은 다함께 식사하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먼저 먹고 마심으로 취하기까지 했고 어떤 이들은 기다리느라고 시장하기도 했답니다. 요즘 코로나로 교회에서 식사를 금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신 지가 불과 20여년 밖에 안 되었을 그때에 고린도교회의 성찬은 무질서한 교제의 식탁으로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참으로 급속히 타락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행위입니다.

 

4. 주님의 만찬 제정(고전 11:23-34, 마 26:26-29; 막 14:22-25; 눅 22:14-23)

 

(23) 내가 너희에게도 전해 준 것은 내가 주님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신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사 (24)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떼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긴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25) 저녁 식사 뒤에 또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잔을 집으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 너희가 그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셨느니라. (26)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가 있으리로다. (28)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지니 (29)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하여 정죄를 먹고 마시느니라. (30) 이런 까닭에 너희 가운데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많도다. (31)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하려 하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으면 우리가 주님께 징계를 받았나니 이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33)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가 먹으려고 함께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것은 너희가 함께 모여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은 일들은 내가 가서 질서 있게 세우리라.

 

23-25절. 24절에 개역이나 개역개정 성경에서 전통사본대로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뒤에 “받아 먹으라 take, eat”을 보충해야 합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찢는 broken’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 하셨으니”로 읽어야 합니다. ‘ ’안에 번역된 것이 개혁자들의 성경에 있는 대로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가룟인 유다에게 배반당하시던 그 밤에 열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이 규례를 명하셨습니다. 성찬의 빵(bread, 떡은 한국식 번역)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는 양손과 양발이 못박혀 찢어지시고 머리가 가시면류관으로 찢기시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 상하신 것을 담아 성찬의 빵을 먹으며 주님의 고난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찬의 잔(cup)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피를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언약’ 곧 신약은 ‘옛 언약’ 곧 구약을 전제한 말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역사의 요약이며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형식으로 주어졌습니다. 거기에는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율법의 요구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신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믿는 자와 맺으신 언약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형식으로 주어졌습니다. 거기에는 “믿으라. 그러면 살리라”는 은혜의 선언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에 근거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과 영생을 얻습니다. 물론 구원받은 자마다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선하신 뜻에 순종하며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구약에 암시되고 증거된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으로 성취되었고 새 언약이 선포되었습니다. 성찬은 이 새 언약의 표입니다. ‘내 피로 세운’이라는 말은 피가 죄를 속(贖)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에서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贖)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레 17:11). 그래서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했고, 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합니다(히 9:12, 22). 피는 속죄입니다.

 

26절. 성찬은 상징적 의식으로 표현되는 복음입니다. 미국장로교에서 목사고사 치를 때 면접에서 성찬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면 “The sacrament is the visible sign of the invisible grace of God. 성찬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의 보이는 싸인이다”고 대답합니다.

 

27-29절. 성찬의 빵과 잔은 주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상징적 일치가 있습니다. 물론 빵이나 포도즙이 예수님의 몸이나 피가 아니고 또 몸이나 피로 변하는 것도 아니지만, 상징적 의미에서 그 빵은 곧 주님의 몸이요 그 잔은 곧 주님의 피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것들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라는 원어(크리마 κρίμα)는 ‘정죄,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성찬의 의미가 그러하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을 살핀 후에, 그리고 성찬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이 의식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께 정죄당하게 될 것입니다.

30-32절. 잘못된 태도로 성찬에 참여한 결과, 고린도교회 안에는 심신으로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았고, 잠자는 자 곧 죽은 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성찬에 바르게 참여하면 그것이 구원의 확증이 되고 은혜가 되지만, 성찬에 합당치 않게 참여하면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여 징벌하시기 전에 성도는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주님의 판단과 징계를 받는 것도 유익이 있습니다. 그가 참으로 택함받은 자요 구원받은 자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냥 버려두지 않고 질병과 고난, 심지어 죽음으로 징계하실 것입니다. 히 12:8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성도가 당하는 징계는 결코 하나님의 미워하심 때문이 아니고 사랑하심 때문입니다. 징계는 성도 자신에게 유익이 됩니다. 성도는 고난을 통하여 영적으로 성장하여 거룩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인격자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가 받는 징계는 세상이 장차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심판에 비하면 가볍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이 세상과 함께 영원히 멸망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미리 그들을 근실히 징계하십니다.

 

33-34절. 고린도교회는 성찬식을 바르게 거행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그 의식이 파당적인 식사, 그것도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행위로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모일 때는 서로 기다리고 혹 시장한 자는 집에서 먹고 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한 모임이 정죄받는 모임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른 성찬 이해와 성찬식 참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성찬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가며 우리도 형제와 자매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희생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예수님을 본받는 인격을 가지도록 정직, 겸손, 성실, 성결의 삶을 살아가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우리 나라를 말씀 위에 건국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광명개천(光明開天),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즉 경천애인의 정신으로 대한민국이 다시 출발하게 하시고, 세계에 하나님의 뜻을 알려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는 초석이 되게 하옵소서. 성만찬의 교회, 예배, 믿음이 개혁정신으로 거듭나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헬라어 성경 요한복음 주석 강해]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요 1:43-51)

 

[헬라어 성경 요한복음 주석 강해]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요 1:43-51)

요한복음 1장에서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하게 됩니다. 나다나엘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입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소개하자 나사렛에서 어떻게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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