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헬라어 성경 요한복음 주석 강해]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요 1:43-51)

복음의 능력 2022. 3. 17.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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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에서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하게 됩니다. 나다나엘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입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소개하자 나사렛에서 어떻게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빌립은 와서 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요 1:43-51)

 

43절 테 에파우리온 에델에센 호 이에수스 엑셀데인 에이스 텐 갈릴라이안 카이 휴리스케이 필리프폰 카이 레게이 아우토 아콜루데이 모이

성 경: [요1:43]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이튿날 - 이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날이다. 특히 이 날은 사도 요한과 안드레를 세례 요한을 통해 제자로 삼으신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 직접 제자를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나타나는 말이다.

󰃨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 당시 갈릴리는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浸透)가 극심한 지역이었고, 예루살렘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하층민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다. 따라서 갈릴리는 유다와 예루살렘인들에게 있어서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었다(46). 그러나 예수는 공생애 초기와 후기의 짧은 유대 사역을 제외하고는 주요 사역 무대를 갈릴리로 채택하셨다(,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유대 사역에 관한 언급이 많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갈릴리에서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구약 예언의 성취라 하겠으며(9:1, 2;4:14-16), 하나님의 뜻을 떠난 유대교를 파기하고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륜(經綸)을 엿보게 한다(17;21;28:16-20;16:7, 15-20;눅 24:44-53;행1:3-14).

󰃨 빌립을 만나 - '만나'의 헬라어 '휴리스케이'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로서, 예수와 빌립의 만남에 현장감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만남이 생생한 필치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만난 실제 체험을 회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만남을 통해서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하나님 나라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

󰃨 나를 좇으라 - 빌립을 향한 그리스도의 제자로의 부르심이다. '좇으라'의 헬라어 '아콜루데이'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만나'(휴리스케이)와 '이르시되'(레게이)라는 두 현재형 동사와 부합되어 예수의 부르심이 그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예수의 부르심은 '바로 지금'의 현재적 시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라는 신앙적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이 동사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으실 때 자주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8:22;9:21;19:21;1:18;2:14;6:1;10:21, 52;눅5:27;9:59;18:22;요 21:19).

44절 엔 데 호 필리프포스 아포 베드사이다 에크 테스 폴레오스 안드레우 카이 페트루

성 경: [요1:4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빌립은...벳새다 사람이라 - 사도 요한이 빌립의 출신지를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라고 표현한 것은 누가가 기록한 '벳새다 줄리어스'(눅 9:10)와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본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강조하지 않는데 이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이미 성도들에게 알려졌다는 전제하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본서에서 공관복음서에서 생략한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벳새다라는 지명만 들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사역을 연상했을 것이다. 벳새다는 '사냥이나 고기잡이하는 집'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이는 벳새다가 갈릴리 호수 근처의 벳새다임을 암시한다. 또한 안드레와 베드로가 출신지가 가버나움임에 비추어 볼 때(눅 4:31-39), 벳새다는 가버나움 근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요한은 '갈릴리의 벳새다'(12:21)라고 명명한다. 벳새다에서의 예수의 사역은(1) 오병이어의 이적의 베푸심(마 14:13-21;눅 9:10-17), (2) 사천 명을 먹이심(8:1-9), (3) 소경을 치유하심(8:22-26) 등이다. 이로 보건대 벳새다를 비롯한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보고 예수를 추종하였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영안(靈眼)을 뜬 것은 아니었다(6:30-70). 신앙보다는 육체적 욕구를 추종한 벳새다를 위시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저주는 주목할 만하다(마 11:20-24;눅 13:16).

45절 휴리스케이 필리프포스 톤 나다나엘 카이 레게이 아우토 혼 에그랍센 모세스 엔 토 노모 카이 호이 프로페타이 휴레카멘 이에순 톤 휘온 투 이오세프 톤 아포 나자레트

성 경: [요1:4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 '나다나엘'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며 그의 이름은 오직 본서에만 나온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46-48). 그의 집은 갈릴리 가나였으며(21:2) 예수를 만날 때에는 아마도 벳새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나다나엘을 바돌로매와 동일인으로 본다(Zahn, Meyer). 왜냐하면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바돌로매'란 명칭이 바-톨마이(Bar-Tolmai, '톨마이의 아들')이므로 이는 고유 명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시몬 베드로가 '바요나'(Bar-Jona)라고 불린 것과 동일한다(16:17). 혹자는 나다나엘이 '마태'와 동일인이라고 추정한다(Hanhart). 이는 마태란 명칭의 뜻이 '여호와의 선물'이므로, 나다나엘은 마태의 다른 명칭이라는 것이다. 또한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구약 율법의 성취라는 측면을 강조했다는 점이 나다나엘의 율법 연구와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두 가지 학설은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없으므로 단지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 모세가 율법에...기록한 그이름 - 빌립은 메시야에 대한 소식을 율법을 근거로 하여 말한다. 이는 율법에 충실한 나다나엘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한 빌립의 열정을 잘 드러낸다. 본문은 빌립이 예수야말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의 모든 말씀을 성취하시는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빌립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빌립의 친구들인 안드레,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점 및 43절에서 빌립이 예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했으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신 있게 전도했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 우리가 만났으니 - 이것의 헬라어 '휴레카멘'은 '휴리스코'의 1인칭 복수 완료 직설법 능동태로서 메시야를 만난 빌립의 감격과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리'에 대해서는 41절 주석을 참조하라.

󰃨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 빌립이 만난 메시야의 인간적인 신분이 제시된다. 원래 예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지만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자칭, 타칭으로 '나사렛 예수'라 불리었다(2:23).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란 표현은 법적 차원에서 볼 때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신적(神的) 기원과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시사도 주지 않는다. 따라서 빌립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결국 나다나엘의 반론을 야기시킨다.

46절 카이 에이펜 아우토 나다나엘 에크 나자레트 뒤나타이 티 아가돈 에이나이 레게이 아우토 필리프포스 에르쿠 카이 이데

성 경: [요1:4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원문상 '나사렛'으로 끝난 빌립의 말(45)은 나다나엘을 격분시켰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으므로 메시야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다(5:2). 또한 당시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이므로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볼 때 멸시당해 마땅한 지역이었다(7:52). 그러므로 본문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갈릴리 지방을 조롱할 때 쓰던 관용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 와 보라 - 나다나엘의 빈정거리는 말투와 그 말투에 내포된 논리적 타당성은 빌립의 말문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멸감(侮蔑感)까지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강권한다. 여기에서 '와 보라'의 헬라어는 '에르쿠카이 이데'이다. '에르쿠'는 '오다'라는 뜻을 지닌 '에르코마이'의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이며, '이데''호라오'의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보라', '볼지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빌립이 말한 '와 보라'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와 보라'(39절 주석 참조)와는 다른 어감을 가진다. 즉 빌립의 강권(强權)은 당시 랍비가 제자들을 초청하는 형식이 아니라 제자가 다른 한 제자를 랍비에게 소개하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율법적인 논리보다는 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신 메시야라는 실체를 목도(目睹)하여 보라는 말이다.

47절 에이덴 호 이에수스 톤 나다나엘 에르코메논 프로스 아우톤 카이 레게이 페리 아우투 이데 알레도스 이스라엘이테스 엔 호 돌로스 우크 에스틴

성 경: [요1:4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보라 이는...간사한 것이 없도다 - 나다나엘을 처음 대면하기 직전에 그의 인격을 통찰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특히 본문은 '참'(알레도스)과 '간사한'(돌로스)이라는 두 반의적 수식어를 통해서 나다나엘의 성품을 잘 반영한다. 여기서 '알레도스'는 '겉과 속의 일체'혹은 '진지성'을 뜻하는 말이며 반면 '돌로스'는 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 트로이 전쟁 시의 목마(木馬) 등과 같이 '속임수''간계'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특히 이 표현은 야곱의 '간교한' 성격을 상기시키는 말로서(27:35), 나다나엘이 야곱처럼 간교한 자가 아니라 메시야 대망을 충실히 기다리며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음을 시사한다. 시편 기자는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32:2).

48절 레게이 아우토 나다나엘 포덴 메 기노스케이스 아페크리데 호 이에수스 카이 에이펜 아우토 프로 투 세 필리프폰 포네사이 온타 휘포 텐 쉬켄 에이돈 세

성 경: [요1:4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너를 부르기 전에...보았노라 - '...전에'라는 말이 시간적 의미의 답변이라면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공간적 의미로서의 답변이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로(왕상4:25;미 4:4) 팔레스틴에서 번식하였다. 특히 무화과나무는 무성한 커다란 잎으로 그늘을 드리웠으므로 당시의 랍비들은 이를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나다나엘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여기서 '보았노라'는 말은 단순히 '알았다'라는 예지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意志的)인 측면까지도 내포하는 용어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나다나엘을 당신의 제자로 지목하였다는 뜻이다.

49절 아페크리데 아우토 나다나엘 카이 레게이 아우토 랍비 쉬 에이 호 휘오스 투 데우 쉬 에이 호 바실류스 투 이스라엘

성 경: [요1:49]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대답하되 - 이것의 헬라어 '아페크리데'는 '자력으로 판단하여 결정적으로 대답하다'라는 뜻으로서 나다나엘이 예수의 답변에 대해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고백했다는 뜻이다. 바클레이(Barclay) 말을 빌면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만족시켜 주신 예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 랍비여 - 38절 주석을 참조하라.

󰃨 당신은 하나님의...임금이로소이다 - 비록 나다나엘은 이 고백 속에 담긴 진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고백이 결코 겉치레인 것은 아니었다. 이 두 존칭은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한 시 2:6, 7에 그 근거를 둔 것으로 짐작되며,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도 직결된다(16:16). 이 중 '이스라엘의 임금'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세 곳에 등장한다. 먼저 마 27:42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조롱하는 야유로 언급되며, 15:32에서는 '그리스도'와 동의어로서 나온다. 그리고 본서 12:13에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군중들의 찬양 가운데 언급된다. 한편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인식되었으며(8:22, 23;84:3) 신약 중간사 시대부터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代理)하실 왕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두루 퍼져있었다.

50절 아페크리데 이에수스 카이 에이펜 아우토 호티 에이폰 소이 에이돈 세 휘포카토 테스 쉬케스 피스튜에이스 메이조 투톤 옵세이

성 경: [요1:50]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이보다'라는 표현에서 ''가 지적하는 바는 나다나엘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나다나엘로 하여금 예수를 메시야로 믿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서 가장 작은 한 면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예수는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이적과 권능들을 나타내사 많은 사람들의 곤경을 타개해 주셨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입증하셨다.

51절 카이 레게이 아우토 아멘 아멘 레고 휘민 아프 하르티 옵세스데 톤 우라논 아네오고타 카이 투스 앙겔루스 투 데우 아나바이논타스 카이 카타바이논타스 에피 톤 휘온 투 안드로푸

성 경: [요1:51]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빌립과 나다나엘]

󰃨 진실로 진실로 - '더 큰 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의 서두이다. 주로 공관복음서에서는 '진실로'라고만 쓰여진데 반하여(5:18;6;5;막 3:28;8:12;눅 4:24;18:17), 본서에서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3:3-5; 5:24, 25;6:47).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반영한다(6:47 주석 참조).

󰃨 하늘이 열리고 - '열리고'의 헬라어는 현재 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한 순간이라도 닫힘이 없이 항상 열려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야곱이 벧엘에서 꾼 꿈과 연관되며(28:10-22),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확립되는 징조를 상징한다(64).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그동안 죄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늘이 열리고'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며 또한 그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축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 하나님의 사자들이...보리라 - '하나님의 사자'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영적 존재로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매개자로 활동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란 '열려진 하늘'이 상징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28:12),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the Mediator)가 되신다는 것이다. 한편 '인자'에 관해서는 8:21-59 주제 강해 '인자 칭호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히브리서 3장 성경 좋은 말씀] 모세보다 뛰어나심(히 3:1-19)

 

[히브리서 3장 성경 좋은 말씀] 모세보다 뛰어나심(히 3:1-19)

히브리서 3장에서는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보다 뛰어나심(히 3:1-19) 1-6절, 예수를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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