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3장에서는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보다 뛰어나심(히 3:1-19)
1-6절,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 . . .
본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하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부르심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효력 있게 부르시는 부르심을 가리킨다. 우리는 다 이러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거룩한 형제들’이란 앞장 11절에서도 증거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아 단번에 거룩함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성도’(거룩한 자) 또는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불린다. ‘믿는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을 가리킨다. ‘사도’(使徒)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보냄을 입은 구주이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자주 언급하셨다(요 3:17; 5:36, 38; 6:29, 57; 7:29; 8:42; 10:36; 11:42; 17:3, 18; 20:21 등).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 드리고 기도하는 중보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2절]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 . . .
본문은 말한다.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원문에서 본절은 앞절의 예수님을 수식한다. 이와 같이 1, 2절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시며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하신 자로 묘사되어 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고 또한 죽기까지 충성하셨다. 요한복음 4:34,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빌립보서 2: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를 ‘충성된 증인’이라고 불렀다(계 1:5; 3:14).
[3-4절]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 . . .
본문은 말한다. “[이는]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같음이니라]. [이는]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하나님이심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할 이유는 그가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모세는 구약시대에 큰 인물이었다. 그는 가장 큰 선지자이었고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이었다(신 34:10).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영광을 얻으실 분이신 것이다.
본문은 모세와 주님을 집과 집 지은 자에 비교한다. 집은 이스라엘 곧 구약교회를 암시하며, 집 지은 자는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암시한다. 예수님을 집 지은 자에 비교한 것은 그가 곧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다는 말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보인다. 집을 지은 자가 없다면 집이 있을 수 없다. 피조세계의 정교함, 질서정연함, 목적성이 있음 등의 사실은 그것을 만드신 전능하신 창조주의 존재를 증거한다. 집을 보면 집 지은 자가 있음을 알고 정교한 기계를 보면 그것을 만든 자가 있음을 알듯이, 우리가 우주 만물을 보며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의 존재를 믿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오히려 이 질서정연한 우주를 우연이나 물질에 돌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이다.
[5-6절]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 . . .
본문은 말한다.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장래의 말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사역에 관한 것을 말한다. 모세를 통해 계시된 구약의 율법은 바로 이것들을 증거한 것이다. 모세는 이 상징적 계시의 내용들을 다 증거하고 기록했다. ‘사환’이라는 원어(데라폰)는 ‘수종자, 종’이라는 뜻을 가진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 곧 구약교회에서 하나님의 종과 수종자로서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모세와 비교할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다. ‘맡은’이라는 원어(에피)는 ‘위에서’라는 뜻으로 ‘다스림’을 나타낸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 안에서(엔) 종으로 충성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위에서(에피) 아들로 충성하셨다. 본문은 또 우리가 곧 그 집임을 증거한다.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담대함’이라는 원어(파르레시아)는 ‘담대함’ 혹은 ‘확신’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을 소망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복음의 본질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대속(代贖), 그것에 근거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내용일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포함한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롬 8:24).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의 담대함과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믿음이며 성도의 소망이다.
1절부터 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표현되었다. 첫째는 예수께서 모세보다 더 영광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모세는 구약시대에 가장 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마다 모세의 권위와 역할을 인정할 것이다. 모세를 통해 기록된 구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은 구약 전체의 기초요 핵심이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수종자와 종으로 충성하였을 뿐이었다. 이에 비교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자로서 충성하셨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를 귀히 여기는 것 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둘째는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집은 교회를 가리킨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소망의 담대함과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다면 우리가 바로 그 집이다. 그런데 집을 지은 자는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하다. 집을 지은 자란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리킨다. 집 지은 자가 집보다 더 존귀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셔서 교회로 삼으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께 시선을 돌려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이 무엇이어야 하는가가 분명하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사람이나 세상이나 세상의 것이어서는 안 되고 심지어 하나님의 집인 교회이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우리가 과연 그런가? 우리가 돈에 대한 관심보다도, 자녀에 대한 관심보다도, 사업에 대한 관심보다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더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반성하자. 우리는 우리의 첫 번째의, 주된 혹은 많은 관심을 심히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일들에 빼앗기며 살고 있지 않는지 반성하자. 우리의 신앙생활은 인간 지향적이거나 세상 중심적이지 말고 하나님 지향적이며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또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자!
7-13절, 매일 피차 권면하라
[7-8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 . . .
본문은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구약 시편 95:7-11이 ‘성령의 말씀’으로 인용되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영감성(靈感性)을 증거한다. 구약성경은 율법서들과 선지서들은 물론 시가서들까지도 영감되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딤후 3:16).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또 성경적 설교를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옛날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했을 때 하나님을 시험했었다. 그들은 물이 없었거나 만나 말고 다른 것을 먹고 싶었거나 길이 힘들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가 하고 하나님을 의심했고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향해 불평했고 원망했었다. 그들은 마음을 강퍅케 했었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할 때 믿음과 순종이 뒤따르지만, 교만하고 완고할 때는 불신앙과 불순종만 뒤따른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노를 격동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교훈하신 것이다.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으려면 자신이 부정되고 부서져야 한다. 그때 마음이 가난해지고 애통함이 있고 온유한 마음이 생긴다.
[9-11절]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40년 . . . .
본문은 말한다.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40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저]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시험한다’는 말(페이라조)이나 ‘증험한다’는 말(도키마조)은 원어에서 비슷한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하시는 많은 일들을 목격했다. 그것들 중에는 기적들도 있었고 두려운 징계들도, 긍휼의 구원도 있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과 인도하심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만나를 날마다 먹을 양식으로 주셨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고 40년 동안 그들의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다.
그러나 광야에서 저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노하셨고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 ‘내 안식’이란 일차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가리킬 것이지만, 좀더 깊이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서 주시는 참 안식과 또 장차 들어가 누릴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가리킨다. 천국은 참 안식의 땅이다.
[12-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 . . .
본문은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옛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의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중에 불신앙을 품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믿지 아니하는 악심’은 ‘불신앙의 악한 마음’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극히 마땅하고 기본적인 일인데,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그것이 곧 근본적인 악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밀착하여 그를 붙잡고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불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일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면 그 결과는 죽음과 불행이요 영원한 멸망이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은 성도들의 현재 상황을 가리킨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중요하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우리가 무슨 일을 바로 할 때 그것이 우리의 좋은 과거로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며, 오늘 우리가 무슨 일을 바로 할 때 우리의 내일도 좋아질 것이다. 오늘이 중요하다. 우리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믿음으로 살고 순종으로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서로 권면함으로 우리 중에 죄로 강퍅케 되는 사람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권면한다’는 원어(파라칼레오)는 ‘권면한다’는 뜻 외에 ‘격려한다, 위로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5:11, 14,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불붙는 장작을 각각 따로 놓으면 쉽게 꺼지지만, 서로 포개어 놓으면 더 잘 붙듯이, 우리는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위로함으로써 더욱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
‘죄의 유혹’이라는 말은 ‘죄의 속임수’라는 뜻이다. 죄는 사람을 속인다. 죄는 사람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 기쁘고 즐거운 것을 줄 것처럼 다가온다. 죄가 일시적으로 그런 것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죄는 갈등과 두려움과 슬픔과 고통과 파탄을 가져온다. 죄는 행복을 주지 않고 불행만 준다. 죄는 사기꾼이다.
죄의 속임으로 사람이 강퍅케 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사실이다. 죄는 사람을 강퍅케 만든다. 그러므로 죄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죄는 병균과 같기 때문에 몸 속에 오래 놔둘수록 해롭다. 그것은 즉시 퇴치되어야 한다. 사람이 죄를 회개할 때 온유해지고 믿음이 회복되고 순종하는 발걸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중에 죄로 인해 마음이 강퍅하게 되는 자가 없도록 매일 서로 권면하고 격려함으로써 믿음과 선행의 삶을 힘써야 한다.
7절부터 13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구약성경의 영감성을 알자.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 95:7-11을 인용하면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라고 말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거기에는 모세의 율법책들과 선지자들의 글들뿐 아니라, 시편 등 시가서들도 포함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고 믿고 순종하자.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를 거치는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하였고 강퍅한 마음으로 행했다. 하나님께서는 노하셔서 그들의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안식의 땅 가나안으로 그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우리는 그들과 같이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자.
셋째로, 우리는 매일 서로 권면함으로 불신앙에 떨어지는 자가 없도록 힘쓰자.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사람은 참으로 부족하고 연약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끊임없는 말씀의 권면이 아니고서는 불신앙과 시험과 죄의 유혹에 떨어지기 쉽다. 불경건 곧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이 모든 죄의 근원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모든 연약과 실수와 죄에 빠지게 된다. 또 사람이 작은 죄라도 죄를 지으면 그 심령이 무디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도록 날마다 서로를 돌아보며 서로 권면하며 충고하고 또 필요하다면 책망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믿음과 순종의 생활을 함께 실천해야 한다.
14-19절,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잡으라
[14절]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라는 원어(텐 아르켄 테스 휘포스타세오스)는 직역하면 ‘확신의 시작’이라는 말로서 ‘처음 확신’을 가리킨다. 모든 성도는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모든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것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심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을 얻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 등을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고 누가복음을 썼다(눅 1:1-4).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말하였다(딤후 3:14). 진실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 또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 성경에는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는 많은 말씀들이 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모든 성도는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 곧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혹은 이 세상 끝날까지 성경의 모든 진리들을 불신앙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그 모든 진리들을 다 믿고 확신해야 한다(행 24:14; 딤후 3:14). 우리가 처음 확신을 끝까지 붙잡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된 안식과 기쁨과 평안을 얻으며,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복된 천국에 들어가며,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과 존귀를 영원히 누리게 됨을 의미한다.
[15-16절]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모세를 좇아(디아)’라는 원어는 ‘모세로 말미암아, 모세의 인도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모세의 인도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들었으나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직접 음성으로 십계명을 말씀하신 후 모세를 산 위로 부르셔서 그에게 모든 율법들을 주셨다(출 19:19; 20:21-22; 24:18).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출되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었다.
[17-19절]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노하셨고 그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다.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이었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원칙이다. 그들이 범한 죄는 무엇보다 불경건의 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기지 않고 오히려 그를 거역하고 불평, 원망하였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가데스 바네아에 와서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었었다. 그런데 그들 중 열 정탐꾼의 보고는 불신앙적이었고 백성들의 마음을 낙망시켰다. 그들의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들을 하였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노하였고 맹세하며 그들에게 징벌을 선언하셨다.
신명기 1:26-28,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즐겨 아니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여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신명기 1:34-35,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가라사대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본절에 ‘그의 안식’ 곧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신 1:35). 그 땅은 애굽이나 광야와 비교해 볼 때 안식의 땅이었다. 노예생활로 시달렸던 애굽이나 불안정하고 위험한 광야에 비하면, 가나안 땅은 비교적 안정된 곳이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만 사람들에게 참 안식이 된다. 그것은 천국의 안식이다.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순종치 아니하던 자’라는 원어(토이스 아페이데사시)는 ‘믿지 않던 자들’(KJV)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안식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믿지 아니하므로’라는 원어(디 아피스티안)는 ‘불신앙 때문에’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으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불신앙적이고 불순종적인 자들에게 진노하셨고 그들이 약속의 땅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
14절부터 19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시작할 때 확실한 것’ 곧 확신의 시작 혹은 처음 확신이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기본적 진리들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가리킨다. 이런 확신은 성경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우리 모든 성도는 이런 확신이 필요하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아야 한다. 확신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 필요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순종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의 진리들을 확신하게 하기 위해 성경책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그 말씀을 믿고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말씀을 순종하고자 힘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확신 중에 붙드시고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셋째로, 성경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과 안식에 참여할 것이다. 믿음과 순종은 영생 복락을 누리는 길이다. 그러나 불신앙과 불순종은 하나님을 격노케 만들며 천국의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게 한다.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우리가 참으로 천국의 영광과 안식을 원한다면, 우리는 믿는 자, 확신하는 자가 되고 또한 성실하게 순종하는 자가 되고, 결코 불신앙과 불순종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서 9장 성경 주석 성경 좋은 말씀] 예정과 선택(롬 9: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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