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장에서는 베드로와 고넬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넬료 집에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달됨(행 10:1-48)
1-8절, 고넬료의 환상
[1절]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대(隊)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가이사랴는 욥바에서 지중해 해안을 따라 약 50킬로미터 북쪽에 위치한 중요한 항구 도시이었다. 그 도시는 헤롯 왕과 로마 총독들의 공식적 거주지이었다. 가이사랴라는 도시 이름도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이며 이탈리야 대(隊)라는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백부장은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장교로서 오늘날 중대장쯤 된다.
[2절]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자기 혼자만 하나님을 경외하여도 귀한 일인데, 온 집안 식구들을 권면해서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니 얼마나 더 귀한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부모된 우리만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자녀들도 잘 가르쳐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를 원하신다. 신명기 6:6-7,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에베소서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 . .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넬료는 또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였다. 그의 선행과 구제는 그가 하나님을 진실히 섬기고 있다는 증거요 그가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구제 헌금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을 증거한다고 말했고(고후 9:13), 또 형제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후 8:7-8). 또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행위이다. 기도하는 삶은 경건함의 표시이다.
[3-8절] 하루는 제9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고넬료는 제9시, 즉 오후 3시에 환상을 보았다. 환상은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 시대에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방법들 중 하나이었다(민 12:6). 천사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말했다. 고넬료는 집안 하인 둘과 종졸들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말하고 욥바로 보내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진심으로 그를 경외하고 기도하고 그의 뜻을 따라 구제와 선행을 실천하는 자들을 받으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우리는 온 집안 식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자. 신앙은 개인적인 문제이지만, 부모는 가족들의 신앙에 대한 책임이 있다. 자녀들을 경건하게 양육하지 못한 부모는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들이다.
또 우리는 구제와 선행에 힘쓰자. 구제와 선행은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히 믿는다는 표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대로 다른 성도를 사랑한다는 표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행에 힘쓰는 것이다.
또 우리는 기도에 항상 힘쓰자. 기도는 믿음의 행위이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실제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마다 항상 기도할 것이다. 또 기도는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받는 길이다.
9-22절, 베드로의 환상
[9절]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6시더라.
이튿날 고넬료에게서 보냄을 받은 자들이 욥바 성에 가까이 갔을 때에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다. 시간은 제6시 즉 정오이었다. 옛날 유대 땅의 집들의 지붕은 들보 위에 나무 가지들을 놓고 그 위에 갈대 매트를 놓고 그 위에 두꺼운 흙을 발라서 만들었는데 집 안의 추가적 공간으로서 여름에는 잠을 자는 곳으로도 쓰였고 거실이나 창고로도 쓰였다. 베드로는 그곳을 기도 장소로 사용했다. 그는 기도하기 위해 지붕에 올라갔다.
[10-11절]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점심식사 시간이 되어 배가 고팠고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 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다. 하나님께서는 먹는 음식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환상으로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환경과 상황을 적절히 사용하신다. ‘비몽사몽 간에’라는 말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을 가리킨다(17, 19절).
[12-14절]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사도 베드로는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는 율법의 규례대로(레 11장; 신 14장) 언제나 정결한 생물만 먹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았다.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대한 규례는 위생적인 의미나 상징적 의미 뿐만 아니라,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뜻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통해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별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규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완성되었고 따라서 신약 아래서는 폐지되었다. 도덕법들은 영속적이지만, 의식법들은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16-17에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하였다.
[15-16절]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가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깨끗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속되게 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중 모든 택한 자들을 깨끗케 하셨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모든 택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모든 죄의 깨끗케 함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속되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에 전도 대상자들에 대한 우리의 바른 태도가 있다. 우리는 사람들의 외적 조건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 대해 긍휼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깨끗케 하신 자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하늘로 올리워 간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편에서 전도 대상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이 복음을 받든지 안 받든지 간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17-18절]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하나님의 시간표는 정확하였다. 베드로가 속으로 환상의 뜻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바로 그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그가 우거한 집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섭리하시는 모든 일들을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이루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기대하면서 날마다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19-21절]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사람들](전통본문)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성령께서는 단순히 어떤 기운이나 힘이 아니고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말씀하셨다. 그는 오늘날도 모든 성도들 속에 거하시며(롬 8:9) 그들을 친히 인도하신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22절]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그 사람들은 고넬료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하였다. 첫째로, 그들은 고넬료를 의인이라고 증거하였다. 세상에 완전한 의인은 없지만, 고넬료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그리고 양심의 법에 따라서 살려고 애쓴 자임이 틀림없다. 그의 구제와 선행은 그의 의를 증거하였다. 둘째로, 그들은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악을 떠날 수 있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를 힘쓰는 자는 악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고넬료가 모든 유대 사람들이 칭찬하는 사람이라고 증거하였다. 신앙은 말보다 그의 인품을 통해 증거된다. 성도의 인품은 주위 사람들에 의해 잘 증거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16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또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3:7에서 장로의 자격 요건의 하나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특히 전도 대상자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이다. 우리는 사람의 외적인 조건, 즉 그의 사회적 신분, 학력, 재산 등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또 그의 과거의 죄악된 삶의 경력으로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의 그런 조건들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롭게 살아야 한다. 창조자이시며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경말씀을 읽고 듣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힘쓰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여 의롭고 선하게 살며 특히 선행과 구제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이며 인생의 정로이다. 우리는 다 실제로도 의인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믿지 않는 들에게도 칭찬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신앙은 그의 말보다 그의 인격과 삶을 통해 증거될 것이다. 우리의 인품이 정직하고 진실하며 선하고 특히 남을 배려할 줄 알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자가 되지 않고 칭찬 듣는 자가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빛이 되는 삶이다.
23-33절, 고넬료의 영접
[23절]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새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베드로는 하나님의 지시에 즉시 그리고 즐거이 순종하였다. ‘두어 형제’라는 원어(티네스)는 ‘몇 명’이라는 뜻이다. 11:12에 보면, 욥바에서 베드로와 함께 간 자들은 여섯 명이었다. 그 여섯 명의 욥바 형제들이 베드로와 동행한 것은 베드로를 존경해서이기도 했겠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후에 이방인 고넬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 사건에 대해 증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4절]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갔다. 가이사랴까지 가는 약 50킬로미터의 길은 10명의 무리가 하루에 이동하기에는 멀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이튿날에나 가이사랴에 들어갔다. 그런데 고넬료는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놓고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처럼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 받는 일을 크게 여겼다. 또 그는 친척들과 친구들을 사랑해 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가지게 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이 없으며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
[25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절하다’는 원어(프로스퀴네오)는 ‘경배하다’는 뜻이 있다. 비록 그의 행위는 지나쳤지만, 그것은 고넬료의 겸손한 인품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사모함과 말씀 전달자에 대한 그의 존경심을 나타낸다. 데살로니가전서 5:12-13은,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고 말했고, 또 디모데전서 5:17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했다.
[26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사람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하나님께 숭배하는 것과 같았다.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자라도 사람이며 신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 이상으로 높임을 받아서는 안 된다. 베드로는 자신을 부당하게 높이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바른 것이었다.
[27-29절]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유대인이 이방인과 접촉하고 그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율법이 금하는 바는 아니었다. 율법은 단지 유대인이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였다(신 7:3-4). 그것은 그들이 이방인의 종교에 영향을 받을 것을 방지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후대 유대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율법을 해석하여 이방인들과 전혀 접촉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만들었으며, 여기에 ‘위법’이라는 말은 이런 전통과 관습을 어기는 일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에 따르면,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에서 ‘아무것도 속되다거나 깨끗지 않다고 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그 초청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그곳에 왔다. 그 외의 다른 일들은 그에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고 실상 그의 관심 밖에 있었다.
[30-32절]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가 금식하며] 내 집에서 제9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그가 와서 네게 말하리라](전통본문) 하시기로.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와 접촉하게 되고 그에게 전도하여 그를 구원하는 일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비상한 섭리로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셨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 환상과 지시로 인간의 제한된 생각을 극복케 하셨다. 고넬료는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금식은 육신의 즐거움을 중단하고 육신의 생명의 쇠약함을 각오하는 간절한 기도이다. 성도가 지극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할 수 있는 간절한 기도가 금식 기도이다. 그것은 효력 있는 기도이다.
[33절]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하나님께서](전통본문)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는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있었다. 그는 경건하였다. 그는 단지 인간 베드로 앞에 있지 않았고 하나님 앞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의식하고 있었다. 이것이 경건이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 사는 태도이다. 고넬료는 이런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모든 진리의 말씀 듣기를 원하였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주신 경건을 본받기를 원한다. 첫째로, 고넬료는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초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였다. 가족들과 친척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무엇인가? 그들을 초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우리는 겨우 우리 자신만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지 말고, 우리의 가족들과 친척들과 친구들과 이웃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자. 그것이 진정으로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전도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둘째로,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였고 말씀 전달자를 귀히 여겼다. 이것은 모든 교회의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은혜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고 설교자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것은 단지 인간 설교자를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니고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설교자의 권위의 손상은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의 손상을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은 말씀 전하는 자에 대한 존경으로 나타날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17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말했다.
셋째로, 고넬료는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금식 기도는 우리의 육신적 즐거움을 중단하고 생명의 쇠약을 각오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드리는 기도이다. 우리는 어떤 특별히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금식하며 기도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는 기도하는 행위이다. 주께서는 간질로 고생하는 한 아들을 고쳐주신 후에 기도와 금식으로만 이런 어려운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씀하셨다(마 17:21, 전통본문).
넷째로, 고넬료는 베드로 앞에서도 사람 베드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다고 고백하였다. 우리도 이 세상 사는 동안 단순히 사람들 앞에서만 살지 말고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자. 이것이 참 경건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나 찬송 부를 때나 기도 드릴 때도 사람만 의식하지 말고 우리 가운데서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자.
34-48절, 베드로의 전도
[34-35절]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베드로의 깨달음은 옳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즉 그는 사람을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높은 학력이나 사회적 신분의 높음이나 재산의 많음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신다. 그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신다. 그는 우상들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대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들을 받으신다.
[36-38절]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 듯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베드로는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평안]의 소식에 대해 말했다.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이 아니고 만유의 주, 곧 신적 인물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화평이 오고 그 화평과 더불어 죄인들에게 마음의 평안도 찾아온다. 이 소식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이어 갈릴리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또 온 유대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 일들은 당시에 그 주위에 산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소식이었다.
예수님은 신화적 인물이 아니고 역사적 인물이시다. 그는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자라셨으므로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 듯하셨다. 그는 갈릴리와 유대 땅을 두루 다니셨고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셨고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일들이었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인간 예수께는 하나님의 본질이 함께 계셨다. 그는 참 사람이신 동시에 참 하나님이셨다. 그의 행하신 병고침과 기적들은 다 하나님의 능력의 일들이었고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였다.
[39-41절]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하신 일들에 대한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그대로 진실하게 증거하였다. 그것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그의 행하신 일들에 근거하는데, 그 일들은 그것들을 본 제자들의 증언에 의해 성경에 기록되어 후대에 전달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증거가 진실하다고 믿으며 그 증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은 그의 부활이었다. 부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마지막 확증이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는 자신의 다시 사심을 제자들에게 여러 날 보여주셨다. 사도행전 1:3에서 누가는 부활하신 주께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증거한 바가 있다. 주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음식을 먹기까지 하였다. 그의 부활체는 단순히 몸의 회생은 아니었지만, 그의 부활은 육체적 부활이었고 그 부활체는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이었다. 십자가에 상하신 그 몸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셨다.
[42-43절]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만백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다. 그 복음의 중심 내용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바로 하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심판 권세를 아들에게 맡기셨다(요 5:22). 아들 예수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이시다. 사람은 죽음으로 모든 일이 끝나지 않고 죽음 후에 심판이 있다(히 9:27). 여기에 구원의 절대 필요성이 있다. 장차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다. 모든 사람은 그를 영접하고 믿으며 그 앞에 복종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보다 중요한 사실은,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한 바와 같이, 그를 믿는 자들이 그 이름을 통해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죄 문제가 인생의 가장 근본적 문제이므로 죄사함의 문제는 또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죄사함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다른 길은 없고 다른 방법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 다른 이름은 없고 다른 구원의 길도 없다.
[44-46절]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하나님의 구원은 즉각적이었다. 베드로의 설교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을 때 하나님의 구원이 그들에게 임하였다. 성령의 강림은 구원의 표이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해 놀랐다.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었기 때문이다. 후에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다”고 말하였다(행 11:17).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은혜와 성령의 선물을 주신다는 것은 그때까지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유대인 신자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행하셨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주셨다.
이방인 신자들이 성령을 받은 증거는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었다. 신약교회 초기에는 방언이 신자들이 성령을 받은 증거이었다. 또 성령을 받은 것은 구원받은 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하신 것이었다.
[47-48절]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받으라](원문)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성령받은 그들이 물세례를 받음은 합당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기독교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과 죽음과 부활에 의해 확립된 진리이며, 그의 제자들은 그것에 대한 증인들이다. 2천년의 긴 시간이 흘렀으나 그들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생생하게, 진실하게 다가온다. 그 사실들은 진실한 증인들의 증언들에 의해 확증된 내용들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의 심판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마지막 심판을 작정하셨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 심판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선악의 행위들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는다. 인류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이며, 죄사함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다른 길은 없고 다른 방법은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었고 죄사함을 얻었다. 또 우리는 이 귀한 소식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사명이다.
[에스겔 5장 주석 하나님 말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함(겔 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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