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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알쓸잡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아가서 강해 설교문 중에서 세 번째 시간을 갖겠습니다.
셋째 설교 : 어여쁘고 어여쁘다 내 사랑! (아가 1:5-17)
(나 비록 검지만 아름답다오!)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위대합니다. 사랑은 놀랍습니다. 사랑은 환희입니다. 사랑에 대한 찬사를 아무리 많이 하여도 부족합니다. 정말 사랑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요 3:16). 바로 “독생자 예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세상을 사랑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이 아름답기 때문일까요? 물론 세상은 아름답습니다(여기서 세상은 자연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름답다해서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은 아니올시다.
그럼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저와 여러분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서 사랑하는 임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거나, 거짓 사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임의 모든 것은 다 아름답기만 합니다. 누가 내 사랑을 헐뜯어도 내 사랑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가 사랑하는 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사랑하는 신부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엡 5: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가 비록 보잘것없이 보여도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가장 큰 사랑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세상 눈으로 보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이 사랑하는 최고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술람미 여인의 노래가 계속됩니다. 술람미 여인은 이제 왕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기를 업신여기고 시기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보면서 그녀들에게 한마디 합니다. “나를 업신여기지 말아라”라고. 왜 그런지 아세요?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여자들은 솔로몬 왕궁 가까이 살면서 왕을 사모하는 처녀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신분이 높은 귀족의 딸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좋은 음식과 좋은 의복을 입고 또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미용도 열심히 합니다.
교양을 쌓기 위해 학교도 다닙니다. 예루살렘 처녀들은 언제나 화려하고 우아하게 보입니다. 그녀들의 자랑은 백옥 같이 하얀 피부입니다. 마치 TV 광고의 문구와 같이 “백색 미인”을 자랑하는 여인들입니다. 언제나 자기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뽐내는 여인들이 바로 예루살렘 여인들입니다. 화려한 의상에 하얀 피부를 자랑하는 예루살렘 처녀들이 검게 그을고, 투박한 옷을 입은 시골 처녀 술람미를 업신여깁니다.
술람미는 검게 그을린 피부를 가졌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녀가 구스 여인이기 때문에 검다고 해석하였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원래 술람미도 예루살렘 처녀들처럼 하얀 피부를 자랑하는 아가씨였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오빠들이 그녀를 포도원으로 자꾸 내몰아 내었기 때문에 햇볕에 그을린 것입니다. 6절에 “내 어미의 아들들이”라는 말씀으로 술람미 처녀의 가정 형편을 알게 됩니다. 이 말씀으로 추론할 수 있는 그녀의 가정 환경은 아버지가 안 계신 가정으로 보입니다.
아가서 전체에서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한 구절도 없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술람미의 어머니가 재혼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어미의 아들들”은 술람미의 배다른 이복 오빠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술람미를 포도원을 내 몰은 것입니다. “나를 노하여 포도원 지기를 삼았음이라”라는 말은 곧 그녀의 오빠들이 술람미에게 포도원 일을 혹사시켰음을 가리킵니다.
오빠들의 포도원에서 힘들게 일하는 연약한 시골 처녀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땀과 먼지로 얼룩진 남루한 의복을 입고 햇볕에 검게 그을고 피부가 거칠어진 시골 처녀가 상상되십니까? 바로 그 처녀가 술람미였습니다. 그러하기에 예루살렘의 하얀 피부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예루살렘 처녀들이 업신여긴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자기의 내적 모습을 말합니다.
“나 비록 검지만 아름답다오.
게달의 천막처럼 검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처럼 아름답다오.
내가 햇볕에 그을려 검을지라도
나를 업신여기지 말아요.”
게달은 아브라함이 사라의 몸종 하갈에게서 나은 서자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입니다(창 25:13). 게달이라는 뜻은 ‘검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유목민으로 양과 염소를 치는 족속이었으며, 그들은 흑염소의 가죽으로 천막을 만들고 살았습니다(사 60:7, 겔 27:21). 포도원에서 햇볕에 그을리며 거칠게 일한 술람미가 비록 게달의 천막과 같이 보잘것없이 보인다 할지라도, 실상 솔로몬의 사랑을 받고 있는 술람미의 참 모습은 “솔로몬의 휘장처럼 아름답다오”라고 자신의 미를 자랑합니다.
겉보기에는 게달의 장막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은 술람미의 아름다움. 솔로몬의 휘장은 솔로몬 왕이 야외 행차 때에 들에 치는 차양막을 말합니다. 그 휘장에는 아름다운 무늬들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최고의 품질로 짠 천입니다. 화려하고 웅장하기까지 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찌 들으면 술람미의 허풍이요, 교만이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술람미는 자기의 겉 모습이 아니라 솔로몬을 사랑하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처럼 하얀 피부, 고운 피부, 화려한 의상은 입고 있지 못하여, 게달의 천막과도 같이 검고 칙칙하게 보일지라도, 실상 자신은 흰 피부의 아가씨였으며, 가슴 속에 타오르는 사랑은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화려하고, 뜨겁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교회의 참모습입니다. 교회의 자랑입니다. 교회의 긍지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말이어야 합니다. 교회와 세상,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일까요?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울까요? 물론 세상이 더 매력적이며, 더 아름답습니다.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전인 예배당 건물만 하여도 그렇습니다. 가장 잘 지어진 예배당도 세상 특급 호텔이나 왕이 거하는 궁궐보다는 못합니다.
기독교 문화와 세상 문화를 비교해 보아도 언제나 매력적인 쪽은 세상입니다. TV, 음악, 춤, 쾌락, 음식, 등 세상은 화려하고 뭇사람의 눈을 현혹시킬만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정말 세상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들로 가득합니다(창 3:6). 그리고 세상은 그런 것들을 자랑하고 교회를 업신여깁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적인 곳이라 해도 그리스도 예수는 세상을 사랑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리도의 사랑은 오직 교회에 있습니다. 세상이 업신여기는 교회를 그리스도이신 예수 님은 생명보다 더 귀하게 사랑하십니다. “주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 했습니다(행 20:28). 비록 교회가 게달의 장막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아야 합니다. 교회의 모습이 솔로몬의 휘장과 같지 못할 때, 주님의 사랑은 멀어집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출발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불림을 받은 무리”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부름을 들어보십시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돼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 하여 내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6-9)
구약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러했다면 신약 교회를 부르신 주님의 말씀은 어떠했을까요? 고린도전서 1:26-31의 말씀을 읽어보세요. 지혜 없는 자, 문벌도 보잘것없는 자,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들을 부르셔서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30-31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너희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아름다움은 인위적으로 가꾸고 꾸민 거짓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랑의 본체이신 주님으로 받은 사랑을 반사하는 아름다움입니다.
즉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첫째,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모습이 넘쳐나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세상은 세상을 사랑하나, 교회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직 이것이 교회의 전부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조건도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힘이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사랑하는 임을 무조건 좋아하고 따르듯이, 교회는 주님을 무조건 좋아하고 끝까지 따릅니다. 교회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거나 변질될 때에 교회는 이미 교회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교회에게 부탁하십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리지 말라. 처음 사랑을 가지라”(계 2:4-5)
둘째, 교회는 주님을 위한 고난을 기뻐하기에 아름답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가정을 위해 오라비들의 내몰음에도 불평 없이 응했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처녀의 몸으로 검게 타면서까지 포도원을 돌보았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건강한 미를 나타나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예루살렘 성의 하얀 처녀들만을 보다가 포도원에서 검게 그을리도록 열심히 일을 하는 처녀의 모습이 솔로몬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교회를 위해 핍박을 받는 성도를 귀하게 보십니다. 세상은 교회를 핍박합니다. 멸시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세상을 향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로 알고 묵묵히 모든 핍박과 멸시를 감내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핍박하고 짓밟을 때 교회는 더욱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교회를 치켜세울 때 교회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잃고 세상 속으로 타락해 갔습니다.
교회는 당연히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고난의 길입니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고서도 고난 길, 가시밭길을 마다한다면 그는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할 포도원은 세상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얼굴도 검게 타고, 의복도 남루해지고, 피부도 거칠어질 정도로 일해야 합니다. 바로 사랑을 전하는 일이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 우리를 내몰지도 모릅니다. 술람미의 오라비들이 술람미를 포도원으로 내몰듯이, 우리를 그렇게 핍박하고 거칠게 대할지도 모릅니다. 어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라고 주님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그들을 감싸 안을 때 사랑에 감복되어 그들도 주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사랑의 형제자매가 될 것입니다.
셋째, 교회는 주님의 휘장이 둘러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왕이 머무는 곳에 왕실의 휘장을 두르고 쉴 곳을 만듭니다. 그 휘장은 게달의 휘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름다움과 고귀함이 있습니다. 나라 안의 어떤 백성도 왕의 휘장을 흉내 내지 못합니다. 왕만의 전용 휘장입니다.
교회는 만 왕의 왕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휘장을 두른 곳입니다. 교회에는 왕되신 주님의 말씀이 있고, 왕께서 하사하시는 각종 은혜가 넘치는 곳입니다. 왕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예배 의식도 정해진 시간에 드려집니다. 그리고 왕되신 주님은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신부인 교회에게 주십니다. 그러하기에 왕의 휘장이 둘러쳐진 교회는 잔칫집이요(요 2:1-), 왕의 깃발이 휘날리는 곳이요(아 2:4▷출 17:15 “여호와 닛시”), 왕의 침실입니다(아 1:16,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교회입니다. 이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주 안에서 생명을 얻고, 기쁨을 얻고, 은사를 받고, 주님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주님은 이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사랑하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감히 어찌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여기에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제 그 열쇠를 받았으니 그 문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그 문을 열면 하늘의 보화, 하늘의 지혜, 하늘의 지식이 풍성하게 쏟아질 것입니다(골 2:3).
교회는 아름다움의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이 비록 흘겨보아도 조금도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모습이 검다 하여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모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검어진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모습이 게달의 천막 같아도 실상 우리의 모습이 솔로몬의 휘장과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아름다움의 긍지를 잃을 때, 이미 교회는 주님의 사랑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확고한 주님의 사랑을 확증하지 못할 때, 교회는 병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데 무엇을 주저하십니까? 주님이 우리를 아릅답다 하는데 어찌 스스로 못났다고 자학하십니까?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주 안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십시오. 주를 의지하지 않고 나를 뽐내고, 나를 내세우는 것은 교만이요, 타락이지만,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 자랑은 주님께 영광이요, 사랑의 자랑입니다. 정작 사랑하는 임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자랑스러운 법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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