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산상수훈 중에서 애통하는 자의 복이라는 성경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산상수훈 말씀은 구원받은 자가 성화의 삶을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하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애통해하면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나라를 위해서 애통해하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애통하는 자의 복(마 5:4)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서론
1. 우리는 예부터 “남자는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받으며 살아왔다. 남자가 남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매우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2. 우리는 또한 매우 냉정한 사람을 일컬어 “피도, 눈물도 없는 모진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눈물을 흘려야 할 부분과 장소에서 적절하게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도 사람의 멋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따뜻한 가슴의 소유자”라고 부른다.
3.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자. 과연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있는가? 아니면 “원망과 증오심”에 불타는 자들이 더 많지는 않은가? 사람이 원망과 증오를 갖게 되는 원인은 간단하다. 눈물을 흘려야 할 부분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요, 애통해야 할 사건에 대해서 애통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물은 우리의 상한 감정을 씻겨주는 치료의 역할을 해낸다. 그래서 애통은 결코 부끄러움이 아니다.
4. 예수님은 천국 시민의 헌장을 선포하시면서 두 번째 덕목으로 “애통”을 언급하셨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이 시간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한다.
I. 왜 애통하는가?
A. 자신을 알았기 때문이다.
1. 우리는 3절의 말씀을 통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한 주님의 위로를 읽게 된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드릴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고, 보일 것도 없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죄인”임을 알았다는 말씀이다.
2. 고아로 태어나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성장한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들은 자신이 고아출신임을 알았을 때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함을 느꼈노라고 고백한다. 충분히 그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여태까지 친부모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알고 보니 “저분들은 나를 키워주신 양부모였다니”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일 것이요, 철없이 지내온 지금까지의 모습이 한심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알고 보니 나는 비참한 존재로구나”하는 심정일 것이다.
3.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성경에는 애통에 대하여 39회 언급하는데, 크게 6가지로 분류가 된다.
1)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애통했다. 창 37장 34절]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2) 생존의 위협을 당할 때 애통 [에 4장 3절] 왕의 조명이 각 도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 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3) 징계로 인하여 애통 [렘 49장 3절]헤스본아 애곡할지어다 아이가 황폐하였도다 너희 랍바의 딸들아 부르짖을지어다 굵은 베를 감고 애통하며 울타리 가운데서 앞뒤로 달릴지어다 말감과 그 제사장들과 그 방백들이 다 사로잡혀가리로다
4) 죄 때문에 [욜 2장 12절]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5)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애통[눅 6장 25절]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6) 영혼사랑의 열정 때문에 애통[고후 2장 4절]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B. 자신의 상태를 살피고 애통의 눈물을 흘리자.
/눈물의 한국학
서울의 서소문(西小門) 밖에 돌다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다리 이름이 “눈물 다리”로 속칭되었다. 그 같은 슬픈 이름이 붙은 연유는 이렇다. 그 다리를 건너면 숱한 천주교 신도들이 참형을 당했던 서소문 밖 형장(刑場)에 이른다. 형이 집행되는 동안은 가족이건 친지 건 이 다리 이상은 접근하지 못하게 돼 있었다.
또한 형이 진행되는 동안 울음 소리나 통곡 소리를 내면 그 영혼이 원령(怨靈)이 된다는 속신(俗信)이 있어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목놓아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그래서 눈물을 억제해야만 했던 처참한 인간 상황(人間 狀況)의 현장이다. 벅차게 솟아 나오는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했기 때문인지, 그 “눈물 다리”를 누교(淚橋)라 않고 누교로 표기했던 것이다.
누교(淚橋)나 누교나 발음도 같고 뜻도 같다. 하지만 “누(淚)”는 마냥 흘려버리는 눈물이요, “누”는 눈 가장자리에 괴어만 두고 흘려서는 안 되는 눈물이다. 눈물과 인연이 많았던 민족이라서 그런지 같은 눈물이라도 일직선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체(涕)”라 했고, 갈라져 흐르되 얼굴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눈물을 “사(泗)”라 했으며, 펑펑 흘러내린 눈물일 때 “누(淚)”라 했다. 콧물과 더불어 흘리는 눈물은 “이”고-.
KAL기에 희생된 유가족의 슬픔은 국적이나 인종을 초월해서 더하고 덜할 것이 없을 텐데, 위령제 날 제단에 헌화할 때 흘리는 눈물은 나라에 따라 다름을 볼 수 있었다. 백인(白人) 유가족들의 눈물은 대체로 “누”였고, 동남아 계통 유가족들의 눈물은 ‘사(泗)“였으며, 우리 한국인의 눈물은 ”누(淚)“였다. 인간 감정의 생리적 분비물인 눈물에도 민족에 따른 문화적 후천성이 강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랑하는 혈연이나 연인과 사별(死別) 또는 이별(離別)하는 서양 영화의 슬픈 장면에서도 “누”가 고작이요, 기껏해야 “체(涕)” 이상 눈물 흘리는 것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 “누”가 한결 인상적이게 한다.
한데 심청(沈淸)이 인당수에 팔려갈 때 도화동(桃花洞) 동네 사람이 흘린 눈물은 각기 눈물주머니에 한 말 씩 밖에 없는 눈물을 반 말 씩이나 쏟고 있다. 곧 소설이건 시건 영화건 유행가 건 텔레비전이건 “누(淚)”로 얼룩진다. 이산가족의 만남에서도 반 말 이상의 눈물을 흘려온 우리인데도 흘릴 눈물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제각기 뿔뿔이 떠나 살려는 원심적(遠心的) 서양 사람과는 달리 무한히 떠나 살기를 거부하는 구심적(求心的) 우리 한국인에게는 이산 애수가 가장 큰 정서 인자(情緖 因子)가 돼 있으며, 그래서 떠나가는 사람을 두고는 그토록 눈물이 솟구쳐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눈물 요리
우리 옛 어머니들은 음식의 간<鹽度>을 볼 때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던 눈물 맛의 간에 맞추었던 것이다. 그리해야만 그 음식 맛이 난다는 전통적인 지혜를 터득하고 있었다. 국물을 덥힐 때 새끼손가락으로 휘저어 음식의 온도를 체온과 같게 하는 것과, 음식의 간을 눈물이라는 체액(體液)의 염도(鹽度)와 같게 하는 지혜는 한국 음식 문화를 해석해 보는 중요하고 자랑스러운 열쇠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고된 시집살이로 “눈물 서 말 흘리지 않고는 음식 맛을 못 낸다”는 속담이 실감을 갖게 한다. 칼로리를 재고 g을 재며 아무리 과학적으로 조리를 해도 내지 못한다는 “어머니의 맛”이란, 숨어서 울고 또 울어 눈물 맛을 익히지 않고는 못 내는, 그런 슬프디 슬픈 맛인 것이다. 남도 부녀자들의 잡가(雜歌)에 “고추 방아 눈물은 싱겁디 싱겁고 시모 구박 눈물은 이다지 짜디짜냐. (中略)”
“주르륵 흐르는 눈물은 시큼한데, 괴었다가 넘치는 눈물은 매캐하더라” 했으니, 얼마나 많이 울었기로 눈물 맛까지 가려서 분별할 수 있었던가 숙연해지기만 하다. 우리 옛 시인들은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루(淚)”라 하고, (흥건히 괴어있는 눈물은 淚 와는 달리) 라 표현했다.
유배 중의 하서(河西) 김린후(金麟厚)가 저녁노을 지는데 “리소경 (離騷經)”을 읽다가 문득 읊은 시가 있다. “푸른 강물 위에 부르지 못한 혼이여, 강물 위에 부르지 못한 혼이여, 백일이 어느 때에 원통함을 비춰주리. 석양에 물든 눈물 억울해서 못 떨어뜨리겠네”하였고, 후에 하서의 문인(門人) 하나가 시 속에서 그 석양에 물든 채 못 떨어뜨린 스승의 눈물, 눈물을 실에 꿰어 목에 걸고 있으니 “누”의 미학(美學)을 이 만큼 삭혔던 나라가 또 어떤 다른 나라에 있었던가 싶다. 근간 “뉴욕 타임즈”에 눈물 속에는 세균을 죽이는 라이소팀이라는 성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 농도에 따라 분비량이나 분비 농도가 크게 달라지는 “로이시닌켈팔린”이라는 성분이 발견됐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 성분은 양파를 썰 때 나오는 물리적 눈물에는 없고, 슬퍼서 울 때 나는 감정적 눈물에만 분비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추 방아 눈물에는 그 성분이 없어 싱겁디 싱거웠고, 팔자타령 눈물에는 그 성분 때문에 짜디 짲으며, 괴어 흐르는 누에는 그 성분이 농축되어 매케했던 것이 아닐까. 하서의 문인이 꿰었다는 누의 구슬은 바로 그 감정 화학물을 농축시킨 구술이 되겠고.... 그렇다면 “로이시니케팔린”으로 간을 맞추었던 한국 음식은 그 하나하나가 시(詩)가 아니었던가-. 정말 멋있다.
II. 어떤 복을 받는가?
A. 위로를 받는다
1.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는다.
[시 126장 5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 오리로다.
[계 7장 17절]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고후 1장 4절]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2. 여기서 말하는 위로는 보혜사 성령과 관계가 있다.
[요 16장 7절]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3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3. 보혜사 성령은 위로자이시다. 성령께서는 애통하는 자와 함께하신다. 그리고 그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다. 위로로 가득 채우시기 때문이다.
B. 하나님은 나도 위로해 주신다.
하나님의 위로
내가 좋아하는 설교가 중에 트루엣 박사란 분이 있다. 그는 텍사스 주의 달라스 제일 침례교회에서 50년 동안 목회했다. 그의 설교 중에 한 번은 어떤 한 믿지 않는 부부의 갓난아이가 갑자기 죽은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트루엣 박사가 그 아이의 장례식을 집례 했는데, 그 후에 그 부부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수개월이 지난 후, 또 다른 젊은 여인이 갓난아이를 잃게 되었기에 다시 트루엣 박사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갔다. 그러나 트루엣 박사의 말은 그녀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했다. 그런데 아기의 장례식 때, 얼마 전 어린아이를 잃음으로 인해 믿게 됐던 그 어머니가 이 여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신과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를 불러 주셨습니다. 저는 암흑 가운데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도 큰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트루엣 박사는 말하기를, 그 여인은 내가 여러 날, 아니 여러 달 걸려야 할 수 있었을 일을 해냈습니다. 자기와 똑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한 어머니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는 그녀 자신이 그 고통의 길을 몸소 걸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라고 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다면, 우리는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비슷한 종류의 고난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느낌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경험이 하나님의 위로를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의 과거의 경험이 어떠했든지 간에 하나님의 위로는 그것 자체로 충분하여 결코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치유자
기차를 타고 미국 조지아 주의 어느 조그마한 도시를 지날 때, 수선 가게의 벽에다. 슬픔에 잠긴 마음을 제외한 모든 것을 고칠 수 있음이라고 쓰여진 큰 간판을 제 친구가 보았습니다. 이 간판은 약간 과장이 있기는 해도 영리한 선전이었습니다. 이 간판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치료할 방법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슬픔이 하루하루의 삶을 어둡게 하고 절망 속에 빠지게 할 때, 우리는 어디에서 위로와 구원을 얻어야 합니까? 친구나, 가족이나, 직장 동료의 보편적인 지혜가 효과적인 치료 방법을 제시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해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비탄에 젖은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들을 보살펴 주시는가를 알기 위하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벌써 무엇을 하셨는가를 보기만 하면 됩니다. 큰 슬픔에 잠긴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하여 친히 천국의 좋은 환경을 버리시고. 하나님은 그 아들로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므로 히4:15 우리 연약함을 체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은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시147:3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만일, 당신이 지금 뼈를 아스는 듯한 슬픔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그러면 여호와는)너를 붙드실 것입니다 시55:22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 당신의 슬픔을 쏟아 놓으십시오. 그 분만이 고통받는 당신의 영혼을 달랠 수 있으며, 당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낫게 하여 주실 수 있습니다.
계속해라.
어느 도시에서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연주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날 저녁 한 어머니는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이 음악가의 연주를 들려주고 싶어서 그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좌석에 앉자마자 아이는 몸부림을 치며 불평을 했다.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오, 제발 연주회가 곧 시작되기를!. 그러나 그녀가 잠깐 한눈파는 사이 아이는 도망칠 기회를 포착했다. 그 아이는 재빠르게 자리를 빠져나가 서로 밀치는 관객들에게 밀리며 계속 앞쪽으로 나갔다. 바로 그 순간 커다란 공연장에 조명등이 하나 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그 분위기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그는 그와 같이 커다란 피아노를 본 적이 없었다. 그 아이는 계단을 따라 무대 위로 올라갔다.
어느 누구도 그 조그만 소년이 멋진 술로 장식된 검은색 피아노 의자에 올라앉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가 조그만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려놓고 [젓가락 왈츠]를 치기 시작할 때까지 정말 그 누구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갑자기 떠들썩하던 관람석이 조용해지더니 수백 명의 화난 관중들의 시선이 무대로 향했다. 그 녀석 누구야? 도대체 누가 연주회장에 이런 어린애를 데려왔어? 그런데 그 유명한 연주자는 무대 위에서 관객들의 소동과 [젓가락 왈츠]를 듣고 곧장 옷깃을 여미고 무대 위로 뛰어나왔다. 아무 말없이 그는 그 어린 소년의 뒤에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그 소년의 손에 맞추어 함께 한쌍의 아름다운 선율을 이루며 [젓가락 왈츠]를 더욱 멋있게 장식하기 시작했다. 연주를 하며 그 유명한 연주자는 소년의 귀에 계속해서 속삭였다.
멈추지 말고 계속해라.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야 말로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뒤에 서 계시면서 계속해서 우리의 귀에 속삭이신다. 멈추지 말고 계속하라.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라. 계속 계속
진정한 위로
함께 있어준다는 것은 병자나 슬픔 당한 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작가 케이트 밀러도 그의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장례식 예배가 끝난 후 많은 사람들이 밀러의 집에 왔다. 그 사람들 중에는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백발을 지닌 키가 큰 사람도 한 명 끼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카우보이 모자를 들고 저녁 내내 소파 한쪽 끝에 앉아 있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갔을 때 마침내 그가 밀러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얘야, 나는 너의 아버지를 안단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는 밀러를 똑바로 쳐다보고 악수를 한 후 돌아서서 떠났다. 나는 결코 그 사람을 잊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날 밤 조문 왔던 사람들 중 다른 사람은 아무도 기억할 수 없다.
그가 와서 슬픔에 잠긴 우리와 아무런 말도 없이 저녁 내내 앉아 있다가 마침내 아버지에 대해 한마디 말을 남기고 떠난 것으로 충분했다. 그분은 바로 아버지와 우리를 위해 오신 것이다. 나는 그분의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분이 그때 나와 함께 있어 준 것은 나에게 굉장한 영향을 끼쳤다. 그 이후로 밀러는 친구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 애써서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깨달았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있어줄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것이 아픈 사람이나 심지어는 감옥에 갇힌 사람을 위문할 때 적용되는 기본적인 진리라고 생각한다. 입으로 위로를 표현하고 설득력 있는 말을 하는 것이 그냥 와서 염려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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