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잠언 23장 설교말씀 중에서 온유의 열매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온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겸손하고 온유해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온유함을 칭찬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해서 모세를 대적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모세는 참고 인내하면서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살다 보면 어렵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힘들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직장을 포기하고 교회를 포기하고 신앙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노를 내기보다는 다시 말씀을 붙잡고 온유함으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 목: 온유의 열매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말씀: 잠 23:20-35, 갈 5:22-25, 히 12:1-3
요 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0)
주 제: 욕심을 다스리고 매사 절제의 모범을 보이자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아홉 번째가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아홉 개 밖에 없느냐 하면 사실 여기에 빠진 열매도 많이 있으나 대표적인 것만 예를 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겸손, 덕, 지식, 지혜, 공의, 정의, 정직, 성실, 안식, 등 열매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온 바대로 마지막 예를 든 절제(temperance)에 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기 욕심이나 감정에 끌리지 않고 그것을 조절하는 능력을 절제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호기심과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절제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절제가 맨 마지막에 있는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모든 열매가 있어도 맨 처음 사랑의 열매와 마지막 절제의 열매가 없다면 온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열매에 절제의 양념을 쳐야 합니다. 요즘 다이어트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먹는데 절제를 요구합니다. 그만큼 잘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랄 때는 먹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먹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좀 적게 먹자는 것입니다. 잠자는 것도 절제가 필요하고, 사랑도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문제가 생깁니다. 동양의 덕에도 중용지도(中庸之道)가 있지 않습니까? 오래전 한경직 목사님께서 그리스도인의 덕목 중 절제에 대해 전해주셨는데 그 설교를 많이 참고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절제 생활에 대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군인, 운동선수도 모든 일에 절제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먹는 것, 자는 것, 운동하는 것 모든 것에 절제가 있어야 좋은 성적을 거두며 자기 훈련이 됩니다. 운동선수는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경기 당일 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제해야 하고 엄격한 금욕생활이 강요된다고 합니다. 코치는 선수들에게 운동의 기술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이 술, 담배를 못하도록 생활 전반을 감독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늦게 자지 못하게 하고, 깨는 시간도 일찍 일어나게 하고, 훈련에 참여시킬 뿐만 아니라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생활의 모든 면을 감독하여 선수들이 절제할 때에 경기에 승리할 수가 있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절제가 필수적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인생이라는 장거리 경주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장거리 경주를 할 때에 절제해야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절제해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잘 보전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약에 보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0)고 말씀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잘 연단시키기 위해서 모든 일에 절제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은 영적 운동장에서 달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1-2)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에서 절제는 필요 불가결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절제 속에는 인내, 정직, 성실, 결단, 근면, 순종 등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신의 성품을 소개하는 벧전 1:6에 보면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라고 했으며, 사도 바울이 심문을 받을 때 벨릭스(Felix) 앞에서 담대하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행 24:25)고 했습니다. 복음에는 절제의 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교훈뿐만 아니고 옛날 그리스의 도덕적 사상 가운데 네 가지 덕을 이야기하는데 “근신, 절제, 공의, 용기”를 말했습니다. 절제가 네 가지 덕 가운데 하나로서 믿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아덴에 있는 청년들에게 특별히 항상 권한 말씀은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 말씀입니다. 하나는 "네 자신을 알라"하는 권면이요, 또 하나는 "네 자신을 다스려라"하는 권면입니다. 이것은 절제입니다. 플라톤은 인간생활이란 "검은 말과 흰 말, 두 말이 끄는 한 수레와 같다"라고 얘기했습니다. 흰말은 이성을 의미했고 검은 말은 욕망이나 본능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레가 넘어지지 않고 바로 가려고 하면 흰말이 수레를 어거(馭車)해서 나가게 해야지 검은 말에게 맡기면 수레가 아주 외딴 데로 떨어져서 부서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절제를 의미합니다. 공자도 군자유삼계(君子有三戒)라고 군자는 세 가지 경계할 것이 있다고 교훈하여 주었습니다. "소지시에는 혈기미정이라 계지재색(少之時血氣未定戒之在色)하고 젊었을 때에는 혈기가 미정한 때인데 색에 특별히 경계하라고 하였습니다. 『급기장야 혈기방강 계지재투(及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鬪)』라. 즉 커서 장년이 된 후에는 혈기가 아주 강한 때인데 싸움하는데 경계하라고.『급기노야, 혈기기쇠 계지재득(及其老也, 血氣旣衰戒之典)"하라고. 나이가 들면 혈기가 쇠한 때인데 그때는 욕심이 많아지니 얻는 것에 주의하라고 우리에게 경계했습니다. 이 훈계도 한 마디로 말하면 절제를 배우라는 말입니다. 여기 보면 모든 일에 절제를 하라고 권면 했습니다. 먹는데, 입는 일에, 쓰는 일에, 거처에, 모든 욕망, 모든 본능을 잘 다스려서 절제의 생활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것이 적절합니다.
잠언 23장 29절부터 읽습니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잇느냐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려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취하지 말라가 아니라 보지도 말라하였습니다. 술뿐만 아니라 담배나 마약이나 포르노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1절에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라’고 하십니다.
솔로몬의 경험담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도 취해 보았고 육체적 쾌락을 누려 보았지만 모두 헛되고 쓸모없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잠 23:20-21) 고 경고합니다. 계속 권면하기를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바랄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건들건들 한단 말)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비틀비틀한단 말)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는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잠 23:32-35) 했습니다. 중국 격언에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다음에는 술이 술을 먹도 다음에는 술이 사람을 먹는다” 했습니다. 술이 사람도 먹고, 술이 집안도 먹고, 술이 나라도 먹습니다. 술로 망한 나라가 많습니다. 미국 원주민 인디언들도 자각하기를 술로 자기 인종이 망하고 있다고 해서 절제 운동을 하기도 합니다, 독일 속담에 “물에 빠져 죽는 사람보다 술에 빠져 죽는 사람이 더 많더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두뇌에 알코올을 붓는 것은 기계에 모래를 뿌리는 것 같으니라.” 이 말은 미국의 유명한 발명가 에디슨의 격언입니다. “술은 악마의 피니라” 스페인 사람의 격언입니다.“ 술상이 길면 목숨은 짧아지느니라.” 프랑스의 속담입니다. “앞문으로 술이 들어오면 뒷문으로 지혜는 달아나느니라.” 이탈리아 사람의 격언입니다. 속담이나 격언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결과를 보고 오랜 세월 동안 관찰한 결과 자연히 그런 속담이 생기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옛날 노아가 처음으로 포도원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를 심을 때에, 악한 마귀가 밤에 와서 양의 피와 사자의 피와 돼지의 피와 원숭이의 피를 비료로 주고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포도나무는 잘 되었을 것입니다. 포도가 많이 열렸습니다. 그다음부터 그 포도에서 나는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마다 처음에는 양과 같이 순해지고 좀 더 마시면 사자와 같이 포악해지고 좀 더 마시면 돼지처럼 미련 해지고 그리고 더 마시면 원숭이처럼 별별 것을 다 한다고 합니다.
또 담배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어떤 신문기자 마크 월러스라고 하는 분이 자기가 죽기 전에 자기 죽음에 대한 기사를 다 써놓고 죽었습니다. 그 기자는 매우 똑똑한 기자입니다. 그 제목이 무엇이냐 하면 “나의 사인(死因)은 담배다” 그리고서는 자기 얘기를 썼는데, “나는 열 네 살부터 담배 피우기를 시작해서 하루에 두 갑씩 42년을 피웠는데 결국은 폐암이 생겨서 나는 죽노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미국 암종(癌腫) 연구회원 가운데 한 사람인 함몬 박사라고 하는 분이 자기가 담배와 암종 관계를 연구한 것을 발표했습니다. 이분이 1952년부터 수년간 188,078명의 암 환자를 연구했는데 그 가운데 죽은 사람이 8105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암으로 죽은 사람이 있었으나 폐암으로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분이 특별히 폐암으로 죽은 사람과 담배 피우는 사람과의 관계를 자세히 연구했습니다. 거기 담배 안 피우는 사람도 폐암 생겼지만 병든 사람 십만 명 가운데 담배로 죽은 사람은 815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에 담배 한 갑 이내 피는 사람은 폐암에 걸린 사람 십만 명 가운데 128명이 죽었습니다. 또 하루에 한 갑 이상 두 갑까지 피는 사람은 227명 죽었습니다. 하루에 두 갑 이상 피운 사람은 460여 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의 연구 결과로 보건대 암과 담배의 관계에서 담배는 암에 직접 금물이라는 것을 여러 사람이 보고했습니다. 맨하탄에 암 연구소가 있고 그 암 연구소 소장으로 어네스트 윈더 박사가 있는데 이분이 흰쥐를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 흰쥐에다가 담배 진을 자주 발랐더니 그 담배 진으로 인해서 암종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직접 니코틴과 암과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실험에서 발견했습니다. 또 윈더 박사가 연구한 책이 출판되었는데 <담배의 생물학적 영향>이란 책이며 그 책 가운데는 담배와 암이 어떠하다는 것, 담배와 심장병이 어떠하다는 것, 소화 계통과 신경 계통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 등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성경 말씀에 “너희 몸은 너희 몸이 아니고 예수의 피로 산 것이라고 말씀했고 너희 몸은 하나님이 친히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고전 3:16-17)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의 육체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우리 육체에 해를 주는 담배를 피울 필요는 조금도 없는 줄 압니다. 몸에 죄를 짓게 하는 음란행위나 포르노를 눈으로 보는 죄를 조심하십시다. 부부생활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 생활에 있어 본능적인 모든 행동과 오락에 있어서 특별히 적당한 제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절제라고 합니다. 가령 우리 감정 생활에 있어서도 제어가 필요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16:32) 마음 가운데 화가 나지만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분노를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기 마음 가운데 대단히 울분해서 분노가 폭발해 올라오지만 그것을 제어해서 적당하리만큼 쓰는 사람이고 감정을 절제 있게 쓰는 사람입니다. 성날 때 감정에 절제를 할 줄 모르면 많은 실수에 빠지기 쉽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같은 유명한 영웅도 일시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평생의 동지요, 가장 사랑하는 명장을 죽인 일이 있습니다. 감정의 절제, 알렉산더 대제가 천하는 정복했지만 자기 자신의 감정은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슬픔의 감정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할 때, 우리가 이 슬픔도 억제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부모상을 당한 때에도 너무 슬퍼하면 오리려 그 당사자에게 손해를 가져옵니다. 그런 까닭으로 옛날부터 이효상효(以孝喪孝)라고 합니다. 효도로써 효도를 상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조상하고 슬퍼하지마는 효도로써 효도를 상하는 데까지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말에도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 3장 1절에 야고보 장로가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했습니다. 그리고 혀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적은 것이지마는 큰 영향을 가지고 있는데 불과 같아서 온 동네를 사를 수 있는 화근의 발단이 된다고 경계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때 잘못하는 수가 있고 말해야 할 때에 안 하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을 너무 많이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말을 절제하고 적게 하도록 힘써야 우리 신앙생활에 실수가 적을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방면에 이 절제가 필요한데 심지어 우리가 입는 옷이라든지 우리의 몸단장에도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2장 9절에 사도 바울이 권면 하기를“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갑 진 옷으로 하지 말고”단정한 옷을 입고 값진 옷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옷과 단장에까지 이 절제의 덕을 잊지 말고 아담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지마는 사치한 데 흐르면 안 되겠습니다. 보통 생활수준을 보는 방법이 있는데 옷과 특히 신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우리는 검소하고 아담하고 깨끗한 복장이면 됩니다. 브랜드를 찾아 너무 고급스럽고 화려한 옷은 오히려 그분의 이미지를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복장문화에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화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 하신 말씀대로 화장은 했는지 안했는지 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입니다. 화장한 다음에 남의 눈에 띄게 되면 본래 화장한 근본 뜻에 어긋난다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화장도 절제가 있어서 도에 지나지 않아야 합니다. 도에 지나게 되면 지금 말한 것과 같이 근본 목적에 벗어나게 됩니다. 머리 치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손톱관리, 피부관리, 체력관리, 체중관리 등 모두 외모에 신경을 써서 가꾸되 자연미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꾸며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단장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합니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2-4)
음식에도 절제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음식은 우리가 다먹고 살아야겠지만 절제 없이 음식을 먹다가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식, 절식, 불규칙한 식생활 모두 절제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잠언 25장 27절을 읽으면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고 절제 있게 먹어야지 도에 지나면 우리에게 해가 됩니다. 하와와 아담은 먹지 말아야 할 과실을 먹었습니다. 에서는 붉은 죽 때문에 장자권을 파는 실수를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와서 돌덩이를 떡 덩이로 만들라는 시험을 합니다. 우리는 먹는 문제에 시험받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에 강한 본능 가운데 하나인 정욕 혹은 성욕을 우리가 또한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식욕과 같이 정욕도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다운 가정의 기초 중의 하나는 이 정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못 씀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다스릴 줄 모름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과거에 동양 사람에게는 누가 힘이 제일 센 사람이냐고 물어 보면, 얼른 하는 말이 “그거야 항우지, 역발산 기개세 하던 항우지”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서양 아이들에게 힘이 누가 제일 센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얼른 다 같이 대담하는 말이 “삼손이지”라고 대답합니다. 사사기 13-16장을 읽어보시면 삼손의 얘기가 있습니다. 이 삼손의 힘은 장사입니다. 한 번은 어떤 골짜기를 지나가는데 수풀 속에서 사자가 으르렁거리면서 나옵니다. 맨손으로 이 사자를 잡아서 어린 염소처럼 찢어 죽였다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자기를 괴롭게 군다고 여우 삼백 마리를 맨손으로 붙잡아서 꼬리 꼬리끼리 붙들어 매놓고 그 꼬리에다 횃불을 달아서 삼백 마리를 모두 블레셋 사람의 곡식 밭에 몰았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 곡식 밭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 불살라 버렸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수 천 명의 군대를 조직해 가지고 삼손을 치려 옵니다. 삼손은 무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나귀 죽은 턱뼈를 가지고 단번에 천여 명을 다 멸망시켰습니다.
이런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끝까지 보면 이렇게 힘세던 삼손이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만 블레셋 사람에게 붙잡혔습니다. 왜? 전쟁에 져서요? 아니지요. 붙잡힐 뿐 아니라 손과 발이 밧줄로 꽁꽁 묶였습니다. 그뿐인 줄 압니까? 두 눈이 뽑혀 버렸습니다.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일을 시켰는지 압니까? 연자 맷돌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그러다가 죽었습니다. 여러분, 삼손이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전쟁에 패했습니까? 무엇에 패했어요? 정욕을 다스릴 줄 몰랐단 말입니다. 들릴라라는 블레셋 여자에게, 원수의 족속에 속하는 여자에게 매혹되어서 그만 그 여자 때문에 정욕을 못 다스려서 블레셋 사람에게 결박을 당하고 참혹한 최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삼손만 그런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삼손처럼 지력이 있는 사람, 삼손처럼 지식이 많은 사람, 삼손처럼 지각 있는 사람, 삼손처럼 모든 방면에 뛰어난 사람들이, 왜 일생을 망친 사람이 많은 줄 압니까? 이 정욕을 다스릴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강한 욕망, 본능을 다스려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게 될 때에 내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내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고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서 성령의 충만한 생활을 하게 되면, 자연히 이런 모든 욕망은 제 본분을 지켜 적당하게 조절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결심하는 것도 필요하지요. 그러나 결심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약합니다. 인심도 조석변이지요. 내가 참된 신앙에 돌아와서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온전히 바쳐서 성령의 충만한 은사를 받을 때에는 자연히 이런 문제가 해결됩니다.
퀘이커(Quaker) 교회를 창립한 죠지 팍스(George Fox)가 본래는 어떤 구둣방의 직공으로 있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저녁에 친구와 함께 술집에 가서 맥주를 마셨습니다. 한 두 잔 마시니 취했습니다. 누구든지 돌아가면서 자꾸 마시다가 못 마시는 사람이 오늘 저녁의 술값을 다 낸다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쯤 돌아가다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합니다. 있던 돈을 다 내놓으면서, 나에게 가진 것이 이것뿐이니 이거나 받아라, 미안하지마는 나는 먼저 가겠다고 하고는 돌아왔습니다. 어두운 거리를 혼자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면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 이런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너 조지 팍스야 보지 않느냐? 요사이 젊은 사람들은 다 방탕으로 내려가고 늙은 사람은 다 흙으로 내려간다. 성결한 생활을 하여라." 그날 저녁에 온전히 회개했습니다.
잠자는 것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너무 적게 자도 건강에 지장이 옵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자도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합니다. 잠이란 자면 잘수록 또 졸립다는 것입니다. 잠자는 것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우리 몸에 필요한 수면 시간을 채우고 열심히 일을 하고 활동해야 합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하십니다. 불면증이 있는 분도 이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낮에 열심히 일하시고 밤에 모든 근심과 염려를 주님께 다 맡기시고 평화를 얻어 주님의 사랑 가운데 푹 주무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잠언 6:4-11에 보니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라고 했습니다. 또 잠언 24:33-34에도 같은 내용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네가 좀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 24:33-34) 잠언 20:13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에 족하리라” 우리가 죽으면 실컷 잘 수 있습니다. 잠을 절제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청교도적 신앙생활인 근검, 절약, 성실, 정직을 실천하여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절제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모든 열매에는 절제라는 요소가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며,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절제해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고 우리 교회와 가정이 축복을 받고 우리나라와 세계가 평화의 동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외웁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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