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성찬식 주일 설교말씀 중에서 오직 말씀으로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말씀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여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선포했습니다. 영혼이 살아나는 것은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이제 교회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교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들의 심령을 찔러 회개하게 만듭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죄인이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죄인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말씀으로 돌아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제목: 오직 말씀으로!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성경: 히 4:12-15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요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2-13)
오늘은 세계 성찬주일입니다. 세계 모든 교회가 주님의 식탁에 초청되어 생명의 떡과 생명의 잔을 나누는 주일입니다. 교파를 막론하고 오늘은 주님의 성찬식을 거행함으로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날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5)
세계 성찬주일은 미국 장로교(PCUSA)에서 유래된 것으로 1936년 10월 첫째 주일에 시작했습니다. 이후 모든 장로교회로 확산되었고 전국 교회연합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 전도국은 1940년 이 성찬주일을 받아들여 전 세계로 확산했습니다. 지금도 미국 장로교는 세계 성찬주일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헌금(Peacemaking Offering)'을 모아,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도움이 필요한 형제와 자매들을 돕는 구제헌금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연합 감리교회(UMC) 역시 특별 주일헌금을 통해 미국 내 소수인종 학생들과 외국계 유학생을 위한 장학금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매주일 성찬식을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예배란 주님의 몸과 피를 기억하는 예식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취하여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Take, eat: this is my body, which is broken for you: this do in remembrance of me. ’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This cup is the new testament in my blood: this do ye, as oft as ye drink it, in remembrance of me.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3-26)라고 하십니다.
예배는 복음을 기억하는 예식이 되어야 하며 복음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순서는 복음이 중심이어야 하며, 매주 성찬식을 하지 않는다면 성찬식 없는 주일에는 설교가 성례전적인 설교 Sacramental preaching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주님의 구속사건을 기념(“나를 기념하라 This do in remembrance of me”)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찬상에는 “나를 기념하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일 년에 4번 혹은 2번 성찬식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요한 칼빈이 제네바 회의로부터 성찬식을 1년에 한두 번만 하도록 제한을 시켰을 때 “사람들이 1년에 한두 번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한 관례는 분명히 악마의 농간이다. 주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은 적어도 크리스천들이 매주 한 번은 참여할 수 있도록 거행되어야 한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 년에 한두 번 성만찬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들의 본을 따르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큰 결점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라고 반응했습니다. 그는 매주일 성찬식을 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성례전적인 예배와 설교를 매주 인도한 것입니다.
기독교회는 성만찬식을 자주 거행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매월 첫째 주일을 성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미주에 있는 많은 이민교회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결혼식, 장례식 때도 성찬식을 거행하면 좋습니다. 성찬을 받고 임종하는 것은 복입니다. 노회와 총회가 성찬예배로 개회를 합니다. 세례와 입교받은 자에게 먼저 성찬을 제공합니다. 심방을 받는 성도가 성찬을 원할 때는 가정에서 집례를 해 줄 수 있습니다. 성찬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내년이면 기독교 개혁 500주년을 맞이합니다.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가톨릭의 잘못된 신앙에 도전하여 교회 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올해도 많은 개혁에 대한 행사가 있고 개혁 성지순례도 많이 다녀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해방된 지 수십 년 흘렀건만 아직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종교”개혁이란 말입니다. 세계 어느 곳에도 사용하지 않는 “종교”를 일본만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얼마나 웃기는 용어입니까? 우선 기독교가 과연 종교 수준입니까? 종교라는 말은 ‘인간이 만든 제도’라는 의미인데 Religio란 라틴어는 로마 황제가 입장할 때 행렬의 의미로 ‘제도, 자(尺)’란 뜻입니다. 기독교는 복음이며 계시이지 종교가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 신천지, 통일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는 종교입니다. 인간이 만든 제도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종교로 만드는 사람들은 마태복음 23장을 읽기 바랍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책망을 받게 됩니다. 종교인들을 향한 주님의 책망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를 종교라고 우리 스스로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말을 우리 스스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인본주의 용어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을 찾아오시는 말씀, 계시, 임마누엘, 진리를 ‘종교’라는 말로 제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일본에는 하도 귀신들이 많아서 고등 종교라는 의미로 기독교도 ‘종교宗敎’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제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이란 말을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16세기 유럽에 일어났던 개혁을 ‘교회 개혁’ ‘신앙개혁’ ‘기독교 개혁’이란 말로 대체하면 됩니다.
이번 한 달을 개혁신앙을 생각하며 개혁의 구호였던 “오직 말씀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예수님으로”를 매주일 묵상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침례]를 받으시고 40일 동안 유대 광야에서 밤낮으로 금식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옛 로마 도로를 통해 가면 정면 좌편에는 엘리사 샘이 보이고 오른편 정면에는 시험산(The Mount of Temptation)이 있는 곳에서 주님께서는 성령님에게 이끌리어 금식하신 것입니다(마 4;1-2). 사탄이 예수님께 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먹는 시험입니다. 에덴동산의 시험도 먹는 시험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마 4:4, 신 8:3)고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온전한 진리의 말씀은 사탄을 이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 the sword of the Holy Ghost”입니다(엡 6:17). 영적 전신갑주(투구, 신발, 허리띠, 방패, 흉배) 가운데 유일하게 공격 무기는 바로 말씀입니다.
이에 사탄이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고 시편 91:11-12를 인용합니다. 그러나 이 인용구는 시편에서 말씀을 일부 삭제한 말이며, 또한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리면 천사가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길에 걸어갈 때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시편 91:11-12를 읽어 봅시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마 4:7, 신 6: 16)고 말씀으로 이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사탄이 또 예수님을 데리고 여리고 성읍이 내려다 보이는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8-9) 하며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사탄 숭배를 유혹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신 6:13-14 10:20, 수 24:14-15, 삼상 7:3, 눅 4:8) 사탄을 오직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이에 사탄은 예수님을 떠났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섬겼습니다(마 4:11)
오늘 본문 말씀인 히브리서 4장 전체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안식의 축복을 받아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way-yomer Elohim)이라는 말이 모두 10회 나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요한복음서는 시작하고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의 성육신이십니다. 만물이 말씀으로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요 1:3) 모든 인생도 말씀으로 지어졌기에 말씀으로 양육받고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책이 성경책입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직접 하나님과 대화하며 말씀을 듣고 전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성경책을 통해 하나님의 생생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력이 있고 능력이 있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중에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회개하게 되고 말씀을 순종하는 지혜를 얻습니다. 본문에 보니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우리가 말씀을 대하면 나 자신의 온 인격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내 인격 속에 말씀이 떨어지면 내 부족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서 곧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하면 우리에게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면서 용서와 긍휼(= 다함없는 사랑)을 베푸십니다 (히 4:14-16). 그래서 성경책은 오늘날 내게 ‘은혜의 보좌’가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내 생애를 바꾸어 놓은 한 권의 책이 있다면 곧 성경입니다. 책 중의 책이요, 가장 오래된 책이요, 최후에 남을 마지막 한 권의 책은 성경책입니다. 1912년 4월 14일 당시 최대 호화 여객석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충돌하여 4시간 만에 침몰할 때 선실에 선 두 여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합니다. 한 여인은 손에 성경책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여인은 은 보석함을 들고 있더랍니다. 여러분은 이런 급한 위기를 만날 때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변합니다. 세월도 변하고 강산도 변하고 사람도 환경도 변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진리를 담고 있는 생명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는 말씀(벧전 1:24-25)처럼 풀이나 꽃의 영광은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잠시만 화려하나 결국 시들고 사라지고 맙니다. 꽃의 아름다움은 일시적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름다운 말씀은 영원히 남습니다. 육체는 무상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영원합니다. 사람의 영광은 허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무궁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격을 온전케 하는 생명의 책입니다. 영생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주님의 따스한 온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진리의 샘터입니다. 샘물처럼 언제나 새롭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영생수가 솟아납니다. 목마른 영혼은 시원함을 얻고, 배고픈 영혼은 배불리 먹고, 외로운 영혼은 다정한 친구를 만납니다. 샘물처럼 언제나 흘러넘칩니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분석해도 영원하신 말씀의 권위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마치 샘물처럼 흐려놓아도 잠시 후에 맑아집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 성경말씀을 읽으면 새 소망과 용기가 넘쳐납니다.
다른 책도 읽어야 하지만 성경은 다독과 정독을 겸해야 합니다. 깊이 읽을수록 새 맛이 납니다.라고 방지일 목사님께 배운 바는 성경을 정독하여 한 구절 한 단어를 깊이 묵상하며 읽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해될 때까지 읽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말하기를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라. 그리고 샘물이 날 때까지 파라’라는 조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읽을수록 좋아지는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 119:103) 에스겔은 소명받을 때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하여 두루마리를 먹으니 그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겔 3:1-3)고 했습니다.
영국의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죠지 뮐러(George Muller, 1805-1898, 3000명 이상의 고아를 돌봄)는 일생 5만 번 이상 기도응답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성경책도 열심히 읽고 실천한 분입니다. “나는 평생에 성경을 백 회나 통독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싫증이 난 일은 없습니다. 읽을 때마다 힘을 얻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54년간의 경험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어도 처음 3년간 성경을 읽지 아니했습니다. 그때 나는 신자로서의 기쁨도 사명도 느끼지 못한 죽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나는 그 2년 반을 ‘읽어버린 시간’(the lost time)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생활의 활력은 날마다 성경을 읽느냐 읽지 않느냐 하는 문제와 정비례합니다. 성경 읽기를 일과로 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은혜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책을 읽고 이 말씀을 실천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쓰기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들을 때 축복받는 방법으로 챨스 알렌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비평하며 읽지 맙시다. 우리가 바다를 처음 볼 때 그냥 봅니다. 그 속에 염분이 얼마며 수소와 산소의 비율이 어떻게 되고 잔물결과 파도의 차이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바다 전체를 보면서 시원하고 상쾌함을 느끼듯이 성경 속에서 보여주는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주님과 대화하고 사랑하고 동행하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둘째는, 상상해 가며 읽으십시오. 과거 이스라엘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대입해서 내가 바로 그 현장과 그 시대에 있음을 상상하며 여기서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심정으로 읽자는 것입니다.
셋째로, 헌신적으로 읽으십시오. 성경 속에서 어떤 정보나 지식을 발견하는 측면이 아니고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처럼 우리 몸을 던져 읽자는 것입니다. 사도 빌립이 주님께 부탁하기를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하자 주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8-9)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은 생에 있어서 가장 축복된 순간이 될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 가지로 구별합니다. 성육신 된 말씀 즉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는 기록된 말씀 성경입니다. 셋째로 선포된 말씀 설교입니다. 즉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으며 설교의 핵심은 항상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는 한번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천국으로 들어가고 있었답니다. 자기가 큰 수레를 가지고 그 수레에 자기가 쓴 책 (교회 교의학을 비롯 다수)을 가득 싣고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문 앞에 버티고 천국 열쇠를 가진 베드로가 ‘자네는 누구뇨?’하고 물었습니다 ‘스위스 바젤에서 온 칼 바르트입니다’ ‘내가 너를 안다. 들어가라’ 그래서 수레를 끌고 들어가려 하니까 ‘안 된다. 이것을 가지고 들어가지는 못 한다’라고 하더랍니다. ‘이것은 내가 복음 전하기 위해서 쓴 책인데요’ ‘그래도 안 돼. 오직 말씀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 만일 정 이 책을 가지고 들어가겠다면 너도 못 들어간다’ 여기서 그는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이 꿈으로 받은 충격을 일생동안 잊지 못하고 살았다고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주의에서는 오직 가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은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구원의 보편적 보조 수단인 그리스도의 가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 방법의 모든 충족에 도달할 수 있다...'(일치 교령 3항)" [제1편 p.316 #816]
여기에서 가톨릭 교리의 공식적인 입장을 담고 있는 자료가 대담하고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 바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가톨릭 교회는 더 이상 그러한 교리를 믿지 않습니다"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교리문답서의 입장은 명백합니다.
"...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이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공의회는 성서와 성전(聖傳)에 의거하여 나그네 길에 있는 이 교회가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알면서도, 이 교회에 들어오기를 거부하거나 끝까지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구원될 수 없을 것이다.(교회헌장 14항)" [제1편 p.328 #846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다음에 반복되는 진술을 보십시오.
"... 교회 안에 풍부한 '구원의 방법'(일치 교령 3항)들이 위탁되었다. 이러한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화'(교회헌장 48항)된다." [제1편 p.320 #824]
"... 교회 안에는 머리와 결합된 그리스도의 몸이 완전하게 존속한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모든 방법을'(선교 교령 6항) 그분에게서 받는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제1편 p.323 #830]
이 주제에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들을 검토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은 결코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교회를 통해야만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둘째, 사실상 수백 군데의 성경 구절은 구원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쾌히 주시는 선물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한 영원한 생명이니라." (롬6:23)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이름이나 혹은 어떤 단체도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 인간 중에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행4:12)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그분께서는 전 인류의 죄에 대한 충분하고도 완전한 값을 지불하셨으며, 어느 누구라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 자신에게 직접 나올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지고 있고,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예수님께서 또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지고 있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요5:24)
반복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복된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을 가졌나니," (요6:47)
(요6:40, 요3:16, 요3:18, 요3:36, 요1:12도 읽어보십시오.)
요한복음 20:31에서 우리는 복음이 기록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님께서 그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1)
"그분에 대하여 모든 예언자도 증언하되, 누구든지 그분을 믿으면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들의 사면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행10:43)
성경에 의하면 대속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지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 (롬3: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개혁 신앙은 바르게 번역된 성경 속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현대 역은 사양하고, 안디옥 학파의 성경[수용 원문, 전통 원문, 개혁자들의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1911년에 출판한 성경책[구역]이 바른 성경입니다. 오직 말씀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2장 주일설교말씀] 오직 성령의 은혜로!(엡 2:1-9)
[데살로니가전서 1장 주일설교말씀] 모범적인 교회(살전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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