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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 헬라어 강해] 마리아 향유와 가룟 유다 사건(요 12:1-8)

복음의 능력 2021. 4. 1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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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복음 12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마리아 향유와 가룟 유다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이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이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했다고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옆에서 제자들이 보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것을 싫어했던 사람이 있는데 가룟 유다입니다.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지 왜 허비하느냐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드리는 것을 허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가난한 자를 생각했던 것이나 돈궤를 맡고 있었던 도둑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재물이 허비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드리는 것이 허비라고 생각한다면 아까워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감사함으로 자신의 귀한 향유 옥합을 깨어 주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의 재물을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리아 향유와 가룟 유다 사건(요 12:1-8)

 

1절 호 운 이에수스 프로 헥스 헤메론 투 파스카 엘덴 에이스 베다니안 호푸 엔 라자로스 호 테드네코스 혼 에게이렌 에크 네크론

요 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12:1

유월절 엿새 전에 -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 란 표현이 먼저 나오나 원어 성경에서는 주어인 ‘예수께서(호 ... 이에수스)’ 가 보다 앞에 나온다. 이는 앞선 11 장의 마지막 부분인 54-57절에서 예수가 아닌 많은 유대 백성들의 예수에 대한 반응이 중점적으로 기록된 반면 본절 이하부터는 다시금 예수께서 전면에 등장하심을 강조하는 기능을 가진다. 

그리고 ‘유월절 엿새 전에’란 시간적 배경과 ‘베다니’란 공간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요한이 어떤 중요한 사건을 기록할 때 시간과 장소를 밝히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며(요 2:1; 5:1), 본절 이하에 기록된 마리아의 도유 사건이 예수의 죽음 및 장사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님을 암시한다.

베다니에 이르시니 - 요한은 이 베다니가 요단강 건너 요한이 세례 주던 곳이 아니라 나사로의 동네임을 밝히면서 예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이곳에 오셨다고 증거 한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3km 정도 떨어진 매우 인접한 동네였다. 따라서 이곳은 자신을 적대시하여 찾고 있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체포될 위험성이 높은 곳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다니가 그다음 날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행하기에 적합한 곳이었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이곳으로 오셨을 것이다. 이제 그분은 더 이상 당국자들을 피하여 숨지 않으시고 당당하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이는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가 임박했음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유대 지도부에서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수배령을 내린 것(11: 53)을 아시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자신의 길을 가셨는데 이러한 용기 있는 태도는 성도인 우리가 역시 본받아야 할 담대한 믿음의 태도이다. 시기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서두르는 것은 무모한 일이지만 적절한 때에 용기 있게 위험에 맞서 나가는 것이야 말로 필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이적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여기서 그 사실을 다시 관설한다.

요한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란 설명을 부가하여 베다니가 어떠한 곳인지를 밝히고 있다. 이는 마태와 마가가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머무셔서 식사하고 계실 때(마 26:6 ; 막 14:3) 이 일이 일어난 것으로 묘사한 것과는 다소 다른 표현이다. 즉 마태와 마가는 이곳이 누구의 집인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으나 요한은 이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
한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물론 요한이 팔레스틴의 지리적 위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을 독자로 본서를 썼기 때문에 앞선 나사로 부활 사건과 관련지어 베다니가 어떤 곳인지 독자들에게 보다 더 잘 알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절 에포이에산 운 아우토 데이프논 에케이 카이 헤 마르다 디에코네이 호 데 라자로스 헤이스 엔 톤 쉬나나케이메논 아우토

요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 마태와 마가는 이와 같은 사건에 대하여 말할 때에(26:7; 14:3), 그 연회 장소를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하였다. 어떤 학자는 상상하기를, 시몬은 마르다의 남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몬은 알려진 문둥이었으니 만큼, 결혼하지 못한 사람이었을 것이다(Grosheide).

그러므로 시몬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과는 가족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등도 아마 청함을 받아서 그 잔치에 참석하였을 것이다. "마르다는 일을 보고" , 그가 연회 배설(排設)과 음식물 준비에 봉사한 것을 가리킨다. 눅 10:40을 보면, 그는 이 방면 봉사에 능하였다. 이런 인물도 귀하지만, 보다도 주님의 진리와 영적 생활에 열중하는 인물이 더욱 귀하다(눅 10:39, 42)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나사로는, 그 부활한 몸으로 그 자리에 와서 앉은 것만으로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그를 보는 자마다 주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을 알게 되었다.

마르다는 일을 보고 -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마르다는 계속 식사 시중을 들고 있었다’가 된다. ‘일을 보고’로 번역된 ‘디에코네이’는 ‘디아코네오’의 미완료 시제로 그녀가 쉬지 않고 계속하여 예수님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는 마르다가 매우 부지런하며 손님 접대하기를 힘쓰는 여성이었을(녹 10:40) 뿐 아니라 자신의 오라비를 살려 준 데 대하여 매우 감사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3절 헤 운 마리아 라부사 리트란 뮈루 나르두 피스티케스 폴뤼티무 엘레입센 투스 포다스 투 이에수 카이 엑셀막센 타이스 드립신 아우테스 투스 포다스 아우투 헤 데 오이키아 에플레로데 에크 테스 오스메스 투 뮈루

요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는, 나드(nard) 향유인데, 인도에서 나며 파사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별히 술을 향기 있게 하는데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혹설에 이 향유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그 시체에 바르고 남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記事)의 내용은 마리아의 특별한 사랑 표시를 말한다. 위의 학설은 이런 사랑 표시와 조화되지 않는다. 그가 쓰다 남은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다면, 그것은 지극한 사랑 표시의 선이 될 수 없다. 14:8 비교. 마리아는 예수님을 극히 존경했으며, 자기 오라비를 다시 살리신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향유를 그의 발에 붓는 봉사를 하였다. 마리아의 이 행동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의미와 존귀히 여기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은 그 일에서 그것 외에 또 다른 것을 더 보셨다. 그것은, 그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었다(7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만 하고 발에 부었다는 기사는 없다. 그러나 문제 될 것은 없다. 라그랑지(Lagrange)는 이 난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하였다. , "머리에 기름을 부었을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 만큼, 요한은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마태와 마가는 발에 기름 부은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뿐이고,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닐 것이다.

4절 레게이 운 헤이스 에크 톤 마데톤 아우투 이우다스 시모노스 이스카리오테스 호 멜론 아우톤 파라디도나이

요 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 26:8에 의하면, 마리아의 향유 부은 일에 비평한 이들이 "제자들"이라고 하였다(14:4에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했음). 그러나 요한은 여기서 가룟 유다만 거론한다. 유다가 그 다른 제자들보다 지도적 처지에서 저런 비평을 하였기 때문에, 요한이 여기서 그의 이름만 말하고 그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는 관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 절은 예수께 값비싼 향유를 붓는 마리아의 행동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한 사람이 누구인지 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한 묘사 역시 다른 복음서에 비하여 매우 구체적이다. 즉 마가는 이를 ‘어떤 사람들’로 묘사하고(막 14:4), 마태는 ‘제자들’로 묘사했다(마 26:8). 그러나 요한은 구체적으로 ‘가룟 유다’를 지목할 뿐 아니라 가룟 유다가 누구인지 밝히기 위하여 ‘제자 중 하나로서’란 표현과 ‘예수를 잡아 줄’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본문을 마태, 마가복음과의 병행 구절들과 비교하여 볼 때 당시 마리아의 행동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하고 분노한 사람이 가룟 유다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과 ‘제자들’도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서 저자 요한이 특히 이를 가룟 유다와 관련시킨 것은 이러한 사람들과 제자들 중에 마리아의 향유 도유 행위를 가장 싫어하고 마리아를 직접 강하게 꾸짖은 사람이 가룟 유다였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본절에서 예수를 위하여 자기의 가장 귀중한 향유를 아낌없이 바친 마리아와 도적의 심보로 횡령할 마음을 가진 (6절 ) 가룟 유다를 직접 대비시켜 마리아의 아름다운 신앙과 가룟 유다의 악독함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5절 디아티 투토 토 뮈론 우크 에프라데 트리아코시온 데나리온 카이 에도데 프토코이스

요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300날 동안의 노동 품 값이라고 한다. 유다, 가난한 자를 예수님보다 귀히 여긴다고 여기 말한 셈이다(Grosheide). 이것은 세상 생각으로만 타산하는 그릇된 생각에서 일어난 불평이다. 이 불평은, 한 영혼이 예수님에게 사랑을 붓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는 어두움이다. 마리아와 유다 두 사람을 대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마리아는 희생자임. 그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이나 아낄 줄 모르는 인물이었. 그는 주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으니, 주님의 말씀과 같이 행한 자이다. , 22:37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악한 일에 최선을 다 할 줄은 알면서도 하나님께 그리할 줄은 모른다.

인도의 어떤 선교사가 한 번은 이상한 일을 보았다. , 간지스강 가에 한 여자가 섰는데, 앓는 갓난아이는 팔에 안고 건강한 아들은 옆에 세워 놓고 있었다. 그 여자는 오랫동안 거기 서 있었는데, 얼마 후에 그 선교사가 다시 와서 보니 그 옆에 섰던 건강한 아이가 없어졌다.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그를 강에 넣어 악어들로 먹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 대답은, "나의 신(악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 것이라"라고 하였다. 인간은 죄로 어두워져서 이렇게 악한 일에 최선을 다한다.

(2) 유다는 옳은 것을 비평하였음. 유다는 마리아의 봉사를 비평하였으니, 그것은, 한 영혼이 그리스도와 뜨거운 관계를 맺는 것이 천하보다 귀한 줄 모르는 그릇된 사상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예수님을 귀한 줄 모르는 그릇된 태도이다. 예수님은 천하의 몇 만 배보다 비교할 수 없는 귀하신 분이다. 이와 같이 귀한 예수님을 위하여 천하를 바친 들 아까우랴? 그러나 유다는 물질만 귀한 줄 알았으며, 빈민 구제를 구실로 삼아 트집을 잡았다.

6절 에이펜 데 투토 우크 호티 페리 톤 프토콘 에멜렌 아우토 알르 호티 클레프테스 엔 카이 토 글롯소코몬 에이켄 카이 타 발로메나 에바스타젠

요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다른 제자들이 마리아를 비평한 것(26:8; 14:4), 부주의로, 혹은 피동적으로 그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이 구절에 나타난 대로 자기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위선자(僞善者)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계획적인 악행이었다. 유다는 저렇게 탐심이 강하였고, 그것 때문에 자기 선생을 파는 무서운 죄악까지 범하였다(눅 22:3-6). 평소에 그의 마음속에 자라나던 죄악(탐심)이 결국 그로 하여금 큰 일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한편 전지전능하신 예수께서 가룟 유다의 이러한 사악함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주어진 직무를 빼앗거나 공개적으로 질책하지 않으셨던 것은 그가 스스로 뉘우치기를 바라셨으며 또한 그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을 아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본 단락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 가운데도 그의 도적 됨을 직접 질책하는 말씀은 나오지 않고 단지 마리아를 꾸짖는 그의 행동을 제지시키고(7 절) 그 까닭을 밝히실 뿐이었다(8절). 이러한 사실들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부여된 구속사적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놀라운 인내력을 발휘하시며 침묵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혈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 7).

7절 에이펜 운 호 이에수스 아페스 아우텐 에이스 텐 헤메란 투 엔타피아스무 무 테테레켄 아우토

요 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12: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그 여자로 하여금 지금 향유 붓고 남은 것을 보관시켜 후일에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 때에 사용하게 하라"는 뜻이라 함. (2) "그 여자의 향유 붓는 행동을 중단시키지 말라. 그 행동이 나(예수님 자신)의 장례를 예비하는 의미를 가진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해석이 옳다.

"이를 두게 하라"란 말, "향유를 보관한 일이 되게 하"라는 의미인데, 그것을 보관해 왔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그 한 때에 사용하기 위하여 향유를 그때까지 보관하였던 것이다. 칼빈(Calvin)은 이 점에 있어서 귀중한 뜻을 지적한다. , "마리아는 그런 값 비싼 의식(儀式)을 흔히 실행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을 위하여 이렇게 희귀한 행위를 취한 것뿐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흔히 외부적으로 찬란한 의식에 치중함을 금하신다. 어떤 해석가들이 마리아의 이 일에 기준하여 추론하기를, 의식을 성대히 갖춘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리아의 한 일은 그 한 때에 필요하였으나 신약 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그런 방식의 의식(儀式) 행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Calvin's Commentary, John's Gospel, Vol. , 13-14).

8절 투스 프토쿠스 가르 판토테 에케테 메드 헤아우톤 에메 데 우 판토테 에케테

요 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서부 사본(西部寫本)의 대표 격인 베사 사본(D)에는 이 말씀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보다 유력한 사본들에 있으니, 이 말씀은 원본대로 전해진 것임이 분명하다(Godet). "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란 것은 신 15:11의 말씀과 같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언제나 돌아볼 책임이 있음을 지시하신다(13:29).

다만 시간적 순서로 볼 때, 그때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중요성을 예언적으로 표시하는 의미에서 그 값 비싼 향유를 사용함이 합당하다는 것뿐이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언 행위는, 복음 전파의 행위이다. 그것은 지극히 귀한 일이며, 라서 그 일을 위하여 값 비싼 향우라도 소비할만하다. 스킬더(K. Schilder)는 말하기,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왕으로 말씀하시면서 "먼저 나요 다음에 너희들이라"라고 하신 셈이라고 하였다(Christus in Zijn Lijden, Kampen, p. 45).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러나 너희가 계속해서 나를 소유하지는 못한다’ 혹은 ‘그러나 너희가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하지는 못한다’가 된다. 그분은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여기서 ‘있지’로 번역된 ‘에케테’는 ‘소유하다’ 또는 ‘함께하다’는 의미를 지닌 ‘에코’의 2인칭 복수 현재 시제이다. 여기서는 이 가운데 ‘함께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는 곧 제자들은 지금껏 어디를 가고 또 무엇을 하든 예수님과 함께 했으나 이러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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