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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장 히브리어 강해설교] 스데반 집사의 순교(행 7:54-60)

복음의 능력 2021. 7. 13.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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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도행전 7장 히브리어 강해설교 중에서 스데반 집사의 순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열심히 유대인들 앞에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스데반 집사가 전하는 복음을 싫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 집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 집사의 말에 화가 나서 돌을 던져 죽였습니다. 그 앞에는 사울이 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당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행 7:54-60)

 

행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본문에서 우리는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의 죽음을 보게 된다. 이 이야기 속에는 박해자들의 미친 듯한 분노의 생생한 실례와(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일에 불림을 받았다면 이런 박해도 각오해야 한다) 박해받는 일에 부름 받은 자들의 용기와 위로에 대한 생생한 실례를 볼 수 있다. 여기 뜨겁고 어두운 지옥이 있고 동시에 밝고 빛나는 하늘이 있다. 이 두 요소는 꽃잎이 서로 아름다움을 돋보이듯이 서로를 돋보이게 한다. 본문에는 그의 사건을 놓고 의회에서 투표하였다는 말이 없다. 권력에 의해서 그는 정죄되었고 율법에 의거하여 신성 모독자로 정죄되어 돌로 쳐 죽이도록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확실히 공회의 지시 없이 군중들이 폭력으로 그를 살해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본문의 사건은 관례적인 사형 집행의 예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 그는 시에서 끌려 나왔고 먼저 증인들이 그 손을 그에게 얹었다.
우리는 본문에서 스데반의 적들과 박해자들의 말할 수 없는 정신적 낭패와 스데반의 영혼의 놀랄 만한 평정을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스데반의 박해자들의 타락한 힘을 살펴보자 - 그 완벽한 악의는 일망타진되었던 악마가 놓여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악마의 화신이 되었고 독사의 새끼들같이 독을 뿜어내고 있었다.

1.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렸다(54절). 본문의 ‘디에프리온토’(찔리다)란 단어는 히브리서 11장 37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거기서는 "톱으로 켜는 것"이라 번역되었다. 히브리어는 (5060, 나가) 닿다, 대다, ~에 이르다(도달하다), 치다는 뜻이다. 스데반 집사의 복음이 그들의 마음에 도달하여 친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순교자들이 육체로 겪고 있는 고통을 마음으로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스데반이 설득시키려 하였던 변론의 완벽함에 대답을 못하므로 대단히 분개하였다. 그들은 항거할 만한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2장 37절의 사람들과 같이 슬픔으로 마음이 찔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5장 33절의 무리들과 같이 미칠 듯한 분노로 마음이 찔리었다. 스데반은 바울이 디도서 1장 13절에서 즉 엄히라고 표현하였듯이 그들을 준열하게 책망하였다. 이 증거에 의해 그들의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과 반대하는 자들은 참으로 스스로 괴로워하는 자들이라 하겠다.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은 마음이 찔리는 일이요 믿음과 사랑은 마음을 치료한다. 그들은 말하기 전에 "천사와 같이 보이던 그가" 천사와 같이 또는 하늘로부터 온 사자와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가 얘기를 끝맺지도 않아서 그들의 고소가 용감한 호소에 무참히 짓밟히는 데 절망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여호와의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다(사 51:20). 그렇지만 그들은 꺾이려 하지 않았다.

2. 저들은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다."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그에 대한 악랄한 적의와 분노. 욥도 그의 원수에 대하여 불평하기를 "그가 욥을 향해 이를 갈도다"라고 하였다(욥 16:9). 본문의 말씀은 욥기 31장 31절의 "이제 우리가 그의 고기를 먹게 되었도다"라는 뜻과 같다(한글 개역과 다소 다름. 역자 주). 그들은 개들이 그 적을 향하여 이를 드러내듯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다." 그러므로 바울이 할례 받은 자들을 경고하여 이르기를 "개들을 삼기라"라고 하였다(빌 3:2). 사람들이 성도에게 적의를 품음으로 그은 사나운 짐승들로 변한다.

(2) 그들 내부에 있는 깊은 원한. 그들은 그에게 신의 능력과 임재의 명백한 표시가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초조하였다. 그 사실은 그들의 마음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악인은 이를 보고 한하여 이를 갈고 소멸하리니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시 112:10). 이를 간다는 것은 흔히 저주받는 것에 대한 공포와 고통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악마의 악의를 품고 있는 자들에게는 동시에 일종의 지옥의 고통이 주어진다.

3. "저희가 큰 소리를 질렀다"(57절).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화나게 하고 흥분케 하였으며 자신들과 또는 타인들의 양심의 소리를 안 들으려고 하였다. 스데반이 "내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노라"라고 말하였을 때 그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기 위해 그들은 큰 소리를 질렀다. 의로운 동기(動機) 특히 기독교 신앙으로 인한 의(義)를 소음으로 막으려고 하는 기도(企圖)는 흔히 있는 일이다. 이성을 결하고 있는 것은 소요뿐이다. "우매한 자들을 지배하는 자들의 소리가 지혜 있는 자의 말을 잠잠케 하도다" 함과 같다. 그들은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생사의 대결에 직면하여 그들의 정신과 기백을 분기시키려고 외치듯이 큰 소리를 질렀다.

4. "그들은 귀를 막았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소요가 시끄러워서 취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의 모욕을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이후에 인자가 영광 중에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5, 66)(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고 말씀하셨을 때 가야바가 그의 옷을 찢었던 것과 같이 본문에서 스데반이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고 말하였을 때 이들도 "그들의 귀를 막았다." 옷을 찢은 것이나 귀를 막는 행동은 말하는 것을 참고 들을 수 없다는 행동적 표현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귀를 막는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1) 그들이 고집스러운 교만의 명백한 실례였다. 그들은 그들을 설득하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결심하였다. 그들이 듣지 않으려는 것을 예언자들은 흔히 불평하였다. 그들은 "술사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귀머거리 독사 같았다"(시 58:4, 5)(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

(2) 옳은 것에 대한 완고함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기하신 치명적인 징조이다. 그들은 그들의 귀를 막았고 하나님은 그의 의로운 심판을 따라서 그들을 완고케 하신다. 이것이 당시 불신적인 유대인들이 저지른 짓이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그들의 귀로 둔하게 하라"라고 기록됨과 같다. 이것이 바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말한 스데반이 본 그들의 특성이었다.

5. "저희가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즉 백성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재판관과 형 집행인, 증인, 구경꾼, 이 모두가 짐승이 그 먹이를 덮치듯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그들 앞에서 달아날 염려가 없었지만 그들은 격렬하고 성급하게 그에게 달려들었다. 또한 이 악한 일에 그들은 모두 이의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일심으로" 달려들었다. 그렇게 하여 그를 버 주려 하였고 당황케 하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그가 이 창황함 속에서도 침착하게 즐기고 있었던 영혼의 평정과 위로를 시기하였다. 그들은 그의 평정을 깨뜨리려고 가진 수단을 다하였다.

6. 그들은 스데반이 예루살렘에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아니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람처럼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쳤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집행한다고 하였다(레 24:16).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는 것이 그 율법의 내용이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그리스도도 처형하였다. 지금의 이 공회가 그리스도에게 신성모독죄를 선고하였다. 그러나 그가 보다 더 신성을 모독했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들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처형되기를 바랐다. 하나님께서는 성서의 말씀을 이루시려 하여 그것을 그대로 다스리셨다. 그들이 형을 집행하던 그때의 분노가 지금도 그대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를 성 밖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그를 모든 사람들의 오물처럼 또는 저주받은 사람처럼 취급하였다. 

그에게 반대 증언을 한 사람들은 형 집행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신 27:7)는 율법에 따라 형을 집행하였다. 특히 신성 모독의 경우에 그러하였다(레 24:14; 신 13:9). 이와 같이 그들은 그들의 증언을 확인하였다. 사람을 돌로 치는 일은 까다로운 직업이었다. 증인들은 일하는데 옷이 거추장스럽지 않게 하려고 상의를 벗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비극적 광경을 만족하게 바라보던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여기서 사울의 이름이 처음 언급되고 있다. 우리는 그 이름이 바울로 바뀌고 그가 박해자에서 전도자로 변하게 될 때 그 이름을 더 잘 알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에 증인이 되었던 작은 사건을 후에 회고하며 반성하였다(22:20). "내가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키나이다."

Ⅱ. 스데반에게 역사하던 은총의 힘과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안에서 역사하시던 놀라운 모습을 보게 한다. 그의 박해자들이 사탄으로 가득 찬 것과 같이 그도 보통 때보다 더욱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이는 그날에 있을 전투에 대비하여 신선한 기름을 부음으로 더욱 강건케 하기 위함이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는 말씀이 이 사실을 설명해 준다. 그가 집사직에 피택 되었을 때 그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 불렸다(6:5). 이제 순교의 사명을 받은 지금도 그는 같은 특징을 지녔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활동하는 것이나 그를 위해 고통을 받는 것이나 무슨 일이고 적응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 어려운 직책을 맡기시는 사람들에게 그는 그들을 성령으로 채우시므로 이 직무를 감당케 하고 안연히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 풍성할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위로도 더욱 풍성하여 "어떤 것이라도 그들을 변하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 위태로운 순간에 복된 순교자와 복된 예수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뛰어난 교제를 보게 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하루 종일 죽임을 당하고 도살당할 양처럼 취급받는 다 해도 이런 것들이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가 그들을 덜 사랑하시겠는가? 그들이 그리스도를 덜 사랑하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 이 사실을 발견하게 돈다. 그러면 하나씩 생각하여 보자.

1. 그리스도께서 은혜 가운데 스데반에게 나타나심. 이는 고통 가운데 있는 그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요, 그의 영예이기도 하였다. 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그를 향하여 이를 갈고 그를 먹으려 하였을 때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고 이로써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충만함을 느꼈다. 이 나타나심은 그의 용기를 격려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모든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행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1) 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보았다"(55절).
① 이같이 하여 그는 그의 박해자들의 세력과 분노를 자극하였고 그것은 이사야 37장 22절의 시온의 딸들이 그리하였듯이 그들에게는 멸시와 비웃음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악의와 잔학한 마음으로 가득 차서 그를 주목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늘을 바라다보며 그들을 전혀 개의치도 않았으며 그 앞에 보이는 영원한 생명에 도취되어서 현재의 경각에 달린 육신의 생명에는 무관심하였다. 그는 그의 주변을 살펴보면서 그에게 닫친 위험을 보고 또 탈출할 생각을 하는 대신에 그는 하늘만을 바라다보았다. 거기서 그의 도움은 오며 따라서 거기에 피할 것이 있었다. 비록 그들이 사방으로 에워쌌지만 그들이 그의 하늘과의 고통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나님과 하늘나라를 믿는 마음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며 사람으로 인한 두려움을 이기게 함을 기억하자. 우리가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 여호와"를 잊고 만다(사 51:13).

② 이같이 그는 그의 고통을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예로 바꾸었고 고통을 하늘에 신원하였다(주여 내가 당신으로 인하여 이 고통을 겪나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그의 몸 안에서 영광 받으시길 간절히 바랐다. 자기를 기꺼이 하나님에게 드린 사람처럼 드려질 준비를 갖추기 위하여 그는 하늘을 주목하여 바라보았다.

③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그의 영혼을 그에게까지 높이었고 경건한 절규는 그가 이 시련을 마음의 동요 없이 극복하도록 하나님께 지혜와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가운데 가를 찾는 그의 종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오직 같이 하실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만 같이 하신다. 그는 그들에게 가까이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그들이 부르짖을 때"만 이루어진다. "무슨 고통이 있는가. 그러면 기도하라."

④ 이같이 그는 하늘나라에서 깨어나기를 바랐다. 그는 그의 박해자들의 분노가 곧 그를 그곳으로 보내 줄 것을 알았다. 임종 시의 성도가 오직 하늘만을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저곳이 죽음이 나를 데려다 줄 더 좋은 곳일세.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는가?"

⑤ 이같이 하여 그는 그가 성령이 충만함을 나타냈다. 왜냐하면 은혜의 성령이 거하시고 역사하시며 다스리시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성령은 영혼의 눈을 높이 들게 하신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그들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주목하여 그곳을 바라본다.

⑥ 이같이 하여 그는 이와 함께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받을 자세를 스스로 갖추었다. 만약 우리가 하늘의 음성을 원한다면 주목하여 하늘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행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2)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가 이 영광을 보여 주기 위하여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56절). 어떤 이들은 스데반의 시력이 강하여졌다고 생각한다. 초자연적인 힘을 통하여 시야는 그 자연적인 한계를 넘어섰고 그러므로 그는 모세의 시야가 확대되므로 전 가나안 땅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처럼 비록 무한의 거리였지만 삼층천을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본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이사야나 에스겔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눈앞에 현현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한 계시록 21장 2절의 말씀처럼 하늘이 마치 그에게 내려온 것과 같았다. 하늘이 열리고 그가 가게 될 행복의 영광을 보여 주므로 그는 그것을 바라보며 그와 같이 위대한 죽음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바라보면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장막이 찢기며 우리를 위하여 준비된 가장 거룩한 새로운 삶의 길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 문제 해결을 위하여 열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며 우리의 기도와 찬양이 그에게 상달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서에 나타내시고 있는 정도의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도 있으며 이 정경은 우리를 죽음과 고통의 모든 고통을 극복하게 하여 줄 것이다.

(3)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고"(55절) "인자"의 모습도 보았다(56절). 우리 인간의 본성을 하늘에서도 지니시고 거기서도 몸을 입으신 사람의 아들 예수는 육신의 눈앞에서도 자신을 보이셨고 그러므로 스데반은 그를 보았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는 천사들이 동반되었다. 이사야의 환상에서 세기나(Shechina), 또는 하나님의 임재에는 스랍들이 수종을 들었고 에스겔의 환상에서는 그룹들이 수종을 들었는데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자인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문에는 본래 천사들은 보좌와 어린양을 옹위하는 것이지만 천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천사들 대신 스데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를 본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의 대 중개자이시며 그는 거룩한 천사들의 활동보다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가장 밝게 비춘다. 거기서 그의 은총이 빛나기 때문이며 그것은 그의 영과 중에서 가장 찬란한 빛이다. 하나님께서는 주변에 수백 만의 천사가 옹위하고 있을 때보다 예수께서 그의 우편에 서 계실 때 더욱 영광스럽게 나타난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까지 높임을 받은 증거가 본문에 있다. 사도들은 그가 승천하는 것도 보았으나 그가 앉아 계신 것은 보지 못하였다. "구름이 그를 가리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그를 본 사람이 있는가? 스데반이 거기 계신 예수를 보았고 그 광경에 깊이 만족하였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는 그의 초월적인 위엄과 그의 통치권, 그의 무한한 능력과 그의 우주적인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로부터 받으시며 우리에 관하여 하시는 모든 것은 이 예수를 통해서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오른손이기 때문이다.

② 일반적으로 그는 거기 "앉아 계신 것"으로 믿어졌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가 거기 서 계신 것을 보았다. 이것은 예수께서 평상시보다 그의 고통받는 종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박해자들에 대한 스데반의 입장을 변명하는 심판관으로서 계신다.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슥 2:13). 또는 "그 처소에서 나와서 벌하실 것이라"(사 26:21) 함과 같다. 그는 그를 영접하여 면류관을 씌울 준비를 하고 서 계신다. 잠시 동안이면 그가 맛볼 기쁨을 보여 주고자 서 계시는 것이다.

③ 그가 서 계신 것은 스데반의 용기를 북돋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를 위하심을 알았으므로 누가 그를 대적한다 하여도 문제가 없었다. 주 예수께서 고통당하고 계실 때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힘을 도왔다. 그러나 스데반에게는 그리스도 자신이 몸소 나타나셨다. 죽음에 직면한 성도나 고통당하는 성도들에게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는 것처럼 위로가 되고 힘을 주는 것은 없다. 믿음으로 예수께서 거기 계신 것을 알게 하신 하나님에게 영광이 있으라.

(4) 그는 예수에 관하여 본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56절). "보라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노라." 이 일이 스데반에게 용기를 주었다면 그들에게는 적어도 믿어지거나 하늘이 그토록 사랑하는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경고가 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러므로 그가 본 것을 선포한 것은 그들이 듣고 기뻐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만약 그들 중 얼마가 이 사실을 듣고 화를 냈다 하여도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이 박해하였던 예수를 돌이켜 생각해 보고 그를 믿는 것이 당연했었다.

행7: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스데반의 경건한 태도.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나타났다고 그는 기도할 때 우쭐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간구하였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부르짖어 말하였다"(59절). 그는 하나님을 불렀고 그 사실은 그가 자신이 참 이스라엘 자손임을 나타낸 것이었지만 그들은 하늘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가를 고려하지도 않고서 서로 다투어 그를 돌로 쳤다. 그들이 그에게 돌을 던졌지만 그는 하나님을 불렀다. 부당하게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의지할 하나님을, 즉 부를 때에 모든 요구에 넉넉하게 응답하실 하나님을 모셨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본문에서 행한 것처럼 사람들은 그들의 귀를 막는다(57절).

그러나 하나님은 들어주신다. 이제 스데반은 도시에서 내쫓기었으나 하나님으로부터는 추방당하지 아니하였다. 이제 그는 세상을 하직하려는 순간에 있었고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불렀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기도하다가 죽는 일은 좋은 일임을 기억하자. 그다음 우리는 도움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우리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힘과 우리가 행하지 못할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기도 이외에는 이러한 도움과 힘을 얻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스데반은 죽는 순간에 두 마디의 짧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었다. 그리고 이 순간에 기도는 그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행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1) 그는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한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직접 스데반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셨다. 우리는 본문에서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손에 우리 영혼을 의탁하는 법을 배웠다. 그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께 재추천을 받는다. 스데반은 예수께서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부른다. "영광 받으실 예수님, 이제 나를 위하여 준비하신 일을 행하소서. 당신은 당신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그 뜻을 이루고자 거기 서 계시나이다. 당신의 품속에 나의 영혼을 거두소서."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하여 보자.

① 영혼의 곧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큰 관심사인 삶과 죽음은 우리 영혼에 관한 것이어야만 한다. 스데반의 육신은 비참하게도 깨지고 그 형상이 사라져 버렸고 돌 소나기 속에 묻혀버려 땅 위의 장막집은 무참히 짓밟히었다. 그러나 이 육신이야 어떻게 되든지 그는 말한다. "주여 나의 영혼을 안전케 하소서. 나의 가난한 영혼이 살찌고 잘 입어야 된다는 사실이요 육신은 고통을 당하지만 영혼은 평안히 거하도록 되는 것이어야 하겠다. 그리고 우리가 죽을 때 육신은 깨진 질그릇(이 안에 거할 때는 아무 즐거움도 없는 질그릇)처럼 버려질지라도 영혼은 영광의 그릇으로 나타나야 하며 육체는 패하겠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과 운명의 힘이 되셔야 됨을 위하여 염려해야 한다.

②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가 간구할 하나님이시다. 그 안에 우리는 삶과 죽음을 의탁하고 위로를 받는다. 본문에서 스데반은 기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간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자 할 때에라도 아들에게 영광 돌리기를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가 자신을 의탁할 수 있는 분이다. 그만이 우리가 마지막 날을 대비하여 그에게 맡긴 바를 이루실 수 있다. 우리가 죽게 될 때에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긴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지시 없이 저 세상으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고 그에게로부터 받은 것 없이 죽는 순간에 위로받을 수는 없다.

행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③ 임종 시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받으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중대한 일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임종 시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받으시겠는가 하는 점에 관하여 염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그들을 거절하고 내쫓으신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그들이 우는 사자의 먹이가 되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우리 영혼을 매일 의탁하여 다스려짐을 받고 성화되도록 해야 하고 하늘나라를 위하여 준비해야 한다. 이 외에 그리스도가 우리 영혼을 받으실 방도는 없다. 그리고 만일 살아있는 동안 이 일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가 영원한 집에 거하게 될 것이란 사실은 임종 시 우리의 위로가 될 것이다.

행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2) 그는 그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한다(60절).
① 먼저 그가 기도하던 때의 상황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기도한 동기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숙연하게 된다.
첫째, 그는 "무릎을 꿇었는데" 이는 기도에 임하는 그의 겸손한 자세였다.
둘째, 그는 "큰 소리를 부르짖었는데" 이것은 그의 끈질긴 요구를 뜻한다. 그런데 왜 그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때보다 박해자를 위한 기도에서 겸손을 보이고 또 끈질기게 요구하였는가? 그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때 진심으로 기도하였으리라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 그가 이와 같은 외적인 표현을 할 필요가 있었는가? 그러나 그 이유는 이 기도가 그의 적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기도가 타락한 본성을 지닌 자들을 위한 기도였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태도의 진지한 증거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② 이제 기도 자체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여기서 그는 죽음 당하신 주님의 본을 따르고 있다. 주님도 그의 박해자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라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의 뒤를 따라 고통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본을 보여 주셨다. 기도는 설교의 효과가 있다. 스데반을 돌로 치는 자들에게 이러한 효과가 있었다. 그는 그들이 그가 기도하려고 한다는 것도 알게 하려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이라고 기도하는 것을 알게 하고 배우게 하려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첫째, 그들이 저지른 행위는 커다란 범죄였다. 만일 신의 자비와 은총이 그들을 변호하지 않고 책임을 묻는다면 그들에게는 영원한 낭패가 되고 말 것이었다.
둘째, 그에 대한 그들의 악의와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을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하느님께서 자기 대신 그들에게 보복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대신 조금도 그들의 죄로 돌리지 말도록 진심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이 죄에 대한 비극적인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죄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들이 심판받는 날이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알게 하려 하였다. 그들이 이성을 회복한 후 그들은 그들을 그렇게 쉽게 용서한 그를 죽인 것을 결코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으리라.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한 잠언 29장 10절의 말씀과 같다.

셋째, 죄는 비록 극악한 것이었지만 그들이 회개할 때 용서받을 수 있음을 기도를 통하여 찾아볼 수 있다.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있으시다. 성 오스틴(St. Austi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데반이 기도하는 내용을 바울이 들었을까? 아마 들었을 것이고 당시에는 그것을 비웃었을 것이다(audivit subsannans, sed ivrisit - 즉 그는 그의 기도를 듣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기도의 은혜를 보았어 더욱 훌륭하게 전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임종.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 말을 마치고 죽음이 엄습하였다는 뜻이다. 선한 사람에게 죽음은 잠에 불과함을 기억하자. 그것은 영혼의 잠이 아니라(스데반은 영혼을 그리스도의 손에 의탁하였다) 육신의 잠이었다. 그것은 모든 인생들의 슬픔과 수고로부터의 휴식이다. 그것은 또한 수고와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쉼이다. 스데반도 여늬 사람들처럼 쉽사리 죽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잠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잠자리에 드는 사람처럼 평온한 심정으로 죽음에 하였다. 그는 눈을 감고 잠들었다. 다음 사실을 상기하자. 그는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잠이 들었다.

이 사실을 보면 그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서는 편안히 죽을 수 없는 것처럼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우리도 죽을 때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품고 평안히 죽을 수 있도록 격려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평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우리 인생의 태양이 진노의 저편으로 넘어가게 하지 말자. 그는 잠들었다. 라틴어 성경에서는 그가 "주 안에서" 즉 그의 사랑의 품에서 잠들었다고 덧붙였다. 그가 만약 이같이 잠들었다면 그는 잘 자리라. 그리고 부활의 아침에 다시 깨어날 것이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횃불 언약(창 15:1-11)

 

[창세기 성경주석말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횃불언약(창 15:1-11)

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세기 성경주석 말씀 중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횃불 언약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어서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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