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알쓸잡

[잠언 27장 성경 좋은 말씀] 면책, 충고, 목양(잠 27:1-10)

복음의 능력 2023. 3. 1.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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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7장에서는 사람이 일상 생활을 하면서 바른 처신에 대해서 말씀한다. 하나님은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미련하지 말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성도의 삶은 항상 예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구원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성화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면책, 충고, 목양(잠 27:1-10)

 

1-3, 자랑, 칭찬, 분노

[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우리가 알 수 없다는 말씀은 우리의 지나간 날들을 통해서도 보고 느끼는 바이다. 세상에는 날마다 질병, 폭력, 살인, 강도, 사기, 교통 사고, 실직, 화재, 홍수, 지진, 해일, 전쟁 등의 소식들이 끊이지 않는다. 지금 내가 살고 있으니까 살고 있는 것이지,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니다. 전도서 9:12,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고 말한다. 재앙은 갑작스럽게 닥친다. 주께서는 한 어리석은 농부가 풍년을 맞아 곡간을 넓히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밤에 그의 영혼을 도로 찾으시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12:16-20).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미래의 평안을 자기 손 안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다윗은, “내 시대[시간들]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기도하였다(31:15). 야고보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교훈하였다(4:14-16).

[2]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지니라.

칭찬은 사람의 덕과 인품, 능력, 행위와 업적을 인정하여 높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자화자찬(自畵自讚)의 자랑은 어리석고 헛된 일이다. 그것은 명예를 구하는 교만한 욕심이다. 잠언 25:27,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말할 때, 하늘에서 느부갓네살 왕아,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는 소리가 있었고 그 일이 이루어졌다(4:30-31). 거짓 교사들은 자기 자신을 높이고 칭찬하는 자들이다. 고린도후서 10:12,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베드로후서 2:18,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유다서 16, “이 사람들은 . . .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예레미야는 지혜자는 그 지혜를, 용사는 그 용맹을,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자(仁慈)와 공의를 세상에 행하는 자이심을 깨달은 것을 자랑하라고 말했다(9:23-24). 주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23:12).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한다고 말했고(고전 13:4), 또 자기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표현하였다(3:8).

[3]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경외함이 없고 그의 진리와 교훈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믿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는 자이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이고 사리분별력이 없다. 미련한 자는 노하기를 잘한다. 잠언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낸다고 말한다. 사람이 쉽게 화를 내면 실수하고 잘못을 범하기 쉽다. 또 미련한 자는 모든 일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며 화를 낸다. 또 그는 절제심이 없다. 그는 자기의 노를 자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의 분노는 돌보다, 모래보다 무겁다고 본문은 표현한다. 즉 미련한 자가 분노하면 그 분노를 가라앉히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미련한 자가 분노하면 그와 이성적 대화가 불가능하고 법과 경우와 원칙도 별 소용이 없다.

그러나 지혜자는 쉽게 분노하지 않는다. 그는 책망을 들을 때라도 오래 참고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고칠 기회로 삼는다. 그러므로 잠언 12:15,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고 말한다. 또 잠언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고 말한다. 또한 야고보서 1:19-20,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자. 그것은 헛되고 불신앙적인 자랑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뜻 안에서 그의 뜻만 행하자. 우리는 자신을 칭찬하거나 자랑하는 자가 되지 말자. 그것은 명예를 추구하는 교만한 욕심이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항상 자신을 낮추자. 우리는 쉽게 노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범사에 오래 참자. 또 우리는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부족과 잘못을 고치기를 힘쓰자.

4-7, 투기, 면책, 배부른 자

[4]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분노는 상대방이 자기를 해롭게 하였다고 생각할 때 생긴다. 까닭 없는 분노는 미움에서 생기고 살인으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까닭 없는 분노를 정죄한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5:22)(전통본문). 요한일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했다. 투기, 즉 시기, 질투는 분노보다 더 나쁜 것이다. 투기는 상대방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해서 생기는 미움의 감정이며 정당성이 없는 경쟁심이다. 그런 것이 왜 더 나쁜가? 첫째, 그 이유가 부당하기 때문이다. 투기는 미워할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정당성 없이 미워하고 시기하여 마침내 그를 살해하였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정당한 이유 없이 미워하고 시기하였다.

둘째, 투기는 대체로 위선적이기 때문이다. 투기하는 자는 미움의 감정을 숨기고 악을 도모한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속으로 상대를 미워하고 해치려 한다. 투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더욱 파괴적이다. 요셉의 형들은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면서 요셉을 미워하였고 그를 죽이려 하였고 그를 이스마엘 상인에게 종으로 팔았다. 셋째, 투기는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분노는 대체로 시간이 지나면 식어진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증가된다. 그것은 결국 상대방이 망하거나 죽어야 만족될 것이다. 다윗에 대한 사울의 시기가 그러하였다. 그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예수님을 향한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도 그러하였다. 그들의 감정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5] 면책(面責)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사람이 사랑이 없으면,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게 될 것이며, 남이 잘못을 해도 상관치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형제를 미워하고 남을 해치기도 할 것이다. 아부하는 것도 참된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형제로 회개치 못하게 만든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의 잘못을 오래 참고 그에게 권면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 것이다. 특히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 면책은 상대의 면전에서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잘못을 고치고 바른 사람이 되게 한다. 책망을 잘 받은 자는 평안과 형통함을 얻을 것이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취한 것이 매우 악한 일이라고 면책했을 때 다윗은 즉시 회개하였다(삼하 12:7-13). 또 바울은 안디옥에서 베드로를 면책하였다(2:11).

그러나 면책은 어려운 일이다. 면책하는 자는 상대방에게 미움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심지어 죽을 각오도 해야 할 것이다. 세례 요한은 헤롯왕이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책망하였는데, 그 일로 인해 그는 옥에 갇혔고 마침내 목베임을 당하였다(14:1-12).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이 바른 말씀을 전한 까닭에 핍박을 받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21:35-36; 23:37). 면책을 할 때 주의할 점도 있다. 우리는 면책을 할 때 겸손과 온유로 해야 하며, 또 너무 감정적이지 않게 상대방을 정말 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6]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친구좋아하는 자라는 뜻이다. ‘통책이라는 원어(페차)상처라는 뜻이다(BDB, KJV, NASB). 친구가 책망함으로 마음에 받은 상처를 가리킨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나의 잘못을 지적해주는 친구가 진짜 좋은 친구이다. 사람은 정말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를 책망할 수 있다. 그것은 참된 사랑이며 큰 사랑이고, 또 그런 사람은 진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일 것이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 잠언 25:12,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고 말한다. 또 전도서 7:5,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의인의 책망을 달게 받아야 한다. 시편 141:5,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다. 원수는 자기에게 유익이 있으면 입맞추는 문안 인사뿐 아니라, 칭찬의 말, 아첨의 말도 하며 또 그런 일을 자주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에서 난 것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변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너무 믿는 것은 좋지 않다. 악인은 진리를 따라, 혹은 신앙 양심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이익을 따라 언제나 변한다. 잠언 26:24-25, “감정 있는 자[미워하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고 말한다. 가룟 유다는 3년이나 주님을 따랐으나 어느날 은 30에 주님을 배신하였고 주께서 잡히시던 밤 그를 잡으려 파송된 무리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와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어 그가 예수임을 알려주었다(26:47-49).

[7]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원문에는 ()’라는 말이 영혼이라는 단어(네페쉬)이다. 육신의 양식도 그러하지만, 영혼의 양식도 그러하다.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한다. 꿀은 가장 단 음식이지만, 배가 부른 자는 그것도 별로 먹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배가 부른 아이들은 반찬 투정만 할 것이다. 그러나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달다. 반찬 투정하는 아이들은 몇 끼만 굶기면 잘 먹을 것이다. 장염으로 몇 끼 굶고 링거 주사만 맞던 아이가 죽을 먹도록 허락되니까 얼마나 잘 먹는지, 자기 것을 다 먹고 동생 것까지 먹으려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논산훈련소의 훈련병들에게 밥은 꿀맛이다. 반찬이 좋아서가 아니고 고된 훈련 후 배가 고파서이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를 탈출하고 남한에 들어온 자들의 증언들에 의하면, 그들은 개구리를 잡아먹고 심지어 쥐도 잡아먹고 지렁이도 말려서 먹었다고 한다. 주린 자에게는 쓴 것도 달다.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마음이 가난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은 부족한 설교자의 설교라도 비평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달게 듣는다. 또 사모하는 자마다 큰 은혜를 받을 것이다. 잠언 2:4-5,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마태복음 5:3, 6,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분은 잔인하고 노()는 홍수 같으나, 시기와 질투는 그것보다 더 심하다. 우리는 분노를 자제해야 하고 그래야 좋은 인격이 된다. 우리는 특히 시기를 버리자. 시기는 큰 죄악이다.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다(고전 13:4). 면책(面責)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 또 친구의 통책(痛責)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권면하되, 필요한 경우 사랑과 온유의 마음으로 책망도 할 수 있어야 하며, 또 그런 책망을 싫어하지 말고 잘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좋은 친구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달다. 우리는 영적으로 배부른 자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와 그의 은혜와 그의 지혜와 그의 능력을 간절히 사모하자.

8-10, 안정, 충고, 이웃 사랑

[8] 본향(메코모)[그의 장소(KJV), 그의 거처(BDB)]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새의 보금자리는 새 집인데, 거기에 어미새가 있고 먹을것이 있고 잠자리가 있고 비교적 안전함이 있는 집을 가리킨다. 새가 보금자리를 떠나면 떠돌이새가 되고 먹을것이 부족하고 어미새의 보호가 없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사나운 새나 짐승에게 잡아먹힐 위험이 있다.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이 그와 같다. ‘본향이라는 원어는 그의 장소,’ ‘그의 거처,’ ‘그의 집(NASB, NIV)이라는 뜻이다.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집을 떠나면 모든 게 불편하며 고생이다. 고향을 떠나면 위험하며 불편하다. 조국을 떠나 해외 이민을 가면 외롭고 서러울 때가 많다. 이와 같이 교인이 본 교회를 떠나면 평안치 못하고 신앙적으로 방황하고 마귀의 시험과 죄에 빠지기 쉽다. 참된 목사와 진실하고 좋은 성도들이 있는 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복되다.

사람이 왜 집을 떠나는가? 탕자의 비유(15)에서 둘째 아들은 육신의 즐거움과 세상 사랑 때문에 아버지의 집을 떠나갔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다(딤후 4:10). 가룟 유다는 돈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배신하였고 주의 제자들의 무리를 떠나갔다. 세상의 욕심을 가진 자들이나 혹은 명예심이나 직분에 대한 욕심이 충족되지 않는 자들은 교회를 떠난다. 그들은 참된 믿음이 없거나 마귀의 시험에 빠진 자들이다. 때때로 그들은 교회를 욕하며 떠나간다. 요한일서 2: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그러나 이런 일들은 다 범죄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영적 낭패이다.

[9]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그의 친구의 즐거움은 진심의 충고로부터 나오느니라](KJV, NIV).

기름과 향은 향유와 향품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냄새가 좋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좋은 냄새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지만, 나쁜 냄새는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하며 심한 경우는 구토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답다. ‘충성된 권고라는 원어(아찻 나페쉬)영혼의 충고 즉 진심의 충고로부터라는 뜻이다. 친구의 진심의 충고는 충고받는 자에게 즐거움이 된다는 뜻이다. 때로는 위로와 격려, 때로는 권면과 책망을 하는 친구의 진심의 충고는 상대방에게 기쁨과 유익을 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피차 권면하라고 교훈한다.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11, 14,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히브리서 3:12-13,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10]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사람은 친구나 이웃과의 좋은 관계에서 살아야 된다. 친구나 이웃을 배려하고 관심을 가지고 그를 돕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충고하고 또는 책망할 수 있으나, 그를 비난하거나 그에게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본문은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버린다는 말은 그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무관심하고 그를 배신하고 비방하고 그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19:18).

본문은 또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교훈한다. 환난 날은 경제적 큰 곤란을 당했거나 가정에 큰 걱정거리가 생겼을 경우 등을 가리킬 것이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그에게 누를 끼치고 폐를 끼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또 본문은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고 말한다. 가까운 이웃이란 거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가까운 이웃을 가리킬 것이다. 특히 신앙 안에서의 친구는 가족관계보다 더 가깝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아버지가 원수처럼 여기는 다윗을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였다. 그것은 그가 다윗에게서 진실한 신앙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귀한 친구이시다. 또 예수님 믿는 교우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친구들이다. 주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12:50). 또 그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13:34).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영육의 안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안정된 가정과 국가가 있고, 특히 바른 교훈과 사랑이 있는 교회가 있기를 기도하자. 우리는 친구에게 진심의 충고를 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권면하고 책망도 하여 그에게 기쁨을 주는 자가 되자. 우리는 이웃에게 무관심하거나 배신하거나 비난하거나 악을 행치 말고, 주 안에서 서로 돌아보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좋은 친구가 되자.

[이사야 48장 설교말씀]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귀환 예언(사 4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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