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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장 성경 주석 설교말씀] 그의 날을 저주하는 욥(욥 3:1-10)

복음의 능력 2022. 12. 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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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장에서는 욥이 생일을 맞이하여 저주하고 있다. 그의 삶이 너무나 힘들고 지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갑자기 닥친 환란에 욥은 힘들어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감당하기 쉽지 않은 환란을 당했다. 욥은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고통은 겪지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인생에서 고통의 순간을 겪을 때는 너무나 힘들다. 남의 일은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막상 자기가 이런 일을 겪으면 절대 쉽지 않다. 성도는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말자.

 

그의 날을 저주하는 욥(욥 3:1-10)

 

욥의 마음의 열기는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동안 불은 더욱 타올라 그의 마음은 답답하고 질식할 것 같았다. 드디어 그는 입을 열었으나 오랜 침묵 후 입을 열었던 다윗처럼 훌륭한 말을 하지 못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을 나로 알게 하소서"(시 39:3, 4)라고 다윗은 말했다. 칠일 동안 선지자 에스겔은 사로잡힌 자들을 보고 놀라서 앉아 있었으나 그 후(아마도 안식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겔 3:15, 16). 매우 오랫동안 욥과 그의 친구들은 생각하며 앉아있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욥을 번민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말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감히 그의 생각을 토로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위로하러 왔으나, 그의 환난이 매우 특수한 것임을 보고, 그가 사곡한 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으면서 그에게 위로를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말할 허락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욥은 제일 먼저 그의 생각을 토로하였다.

만일 그의 생각이 선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그 자신만 간직하고 있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그의 날, 그의 생일을 저주했고, 그가 전혀 태어나지 않았기를 원했다. 그리고 후회와 번뇌 없이 그 자신의 출생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흔히 해마다 돌아오는 자기의 생일을 기쁘게 맞이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그해의 가장 불행한 날로 여겼다. 왜냐하면 그날이 그의 모든 재앙을 불러들이게 된,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불행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Ⅰ. 이것은 정말 나빴다. 그의 극심한 환난과 그의 마음의 불안정은 그러한 그의 생각을 부분적으로 변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결코 그것을 합리화할 수는 없었다. 이제 그는 그가 태어난 복을 잊고 있었고, 여윈 암소가 살찐 암소를 삼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오직 재앙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가 결코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다. 선지자 예레미아 자신도 그의 재앙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모친이여, 내 모친이 나를 낳으셨도다"(렘 15:10).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다면……"(렘 20:14 이하). 우리는 욥이 형통하던 때에는 그의 생일에 대해 여러 번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것을 행복한 날로 여겼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가능한 모든 치욕의 표적이라고 그날을 낙인찍고 있다.

우리가 잉태되어 태어나게 된 일 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깊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정말 우리가 태어난 날을 슬프고 부끄럽게 여기며 우리가 "죽는 날"이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날로서(롬 6:7), 출생하는 날보다 훨씬"낫다"(전 7:1)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의 재앙을 맛보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출생한 날을 저주하는 것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며, 우리 존재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고, 우리가 평정을 되찾아 온전히 생각해 볼 때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그러한 감정에 빠지는 것이다. 분명히 이 세상에서는 인간이 자기의 모든 조건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으나, 그는 그 속에서(만일 그것이 그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그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 일하고 또한 그 스스로 더 나은 세상에서의 행복을 확신할 수 있으므로, 그는 결코 그가 태어나지 않았기를 원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며, 오히려 그가 태어난 것이 좋은 일이었다고 이야기할 만한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또 다른 인생이 없고, 그것을 바라보도록 장려하는 거룩한 위안이 우리에게 없다면 이 세상의 슬픔과 환난이 매우 크므로 우리는 때로 인생이 "허무하게 창조"되었다고(시 89:47) 말하며, 우리가 결코 출생하지 않았기를 원하도록 유혹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여야 한다. 지옥에는 유다처럼 태어나지 말았기를(마 26:24) 원하기에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욥이 그의 날을 저주한 것은 어리석고 약한 짓이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것이 그의 약점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선한 자들도 때로는 그들의 훌륭한 자질을 실천에 옮기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는 그들이 "순전한" 자라고 할 때, 그것은 그들이 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그의 말이 자연적인 생명보다 영적인 생명을 높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출생한 날을 저주했을지라도, 결코 그들의 거듭난 날을 저주하는 자는 없었으며, 은혜의 성령이 그들에게 준 은혜를 받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말한 자들은 없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Ⅱ. 그러나 그것은 사탄 스스로가 장담했던 것처럼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욥은 그의 날은 저주했지만 하나님의 날을 저주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의 생명을 혐오하여 기꺼이 그것을 떠나게 한 것이었지, 그의 믿음을 혐오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단히 그것에 매달렸고 결코 그것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욥에 관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있었던 논쟁은 욥이 결점들을 가지고 있느냐라든가, 또는 그가 우리처럼(부여받은) 격정과 같은 것에 굴복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은밀히 미워하는 사곡한 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였다. 그가 만일 사곡한 자였다면 그가 충동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미움을 나타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험한 결과 그가 그러한 자가 아님이 입증되었다. 아니, 이 모든 것은 그가 인내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처럼 그의 입술로 경솔하게 말하긴 했을지라도, 그는 그 이전과 이후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크게 복종하고 따르려는 그의 뜻을 표명했었고, 그의 참을성 없었음을 후회했기 때문이었다. 욥이 이 일에 대해 스스로를 정죄했으므로 하나님은 그를 정죄하지 않으셨고, 우리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만 이와 비슷한 죄악을 범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를 더욱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

 

1. 그의 날을 저주하는 데 사용한 욥의 상세한 표현들은 시적인 상상력, 격정 그리고 환희로 가득 차 있으며, 이것은 신학상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비평가들에게도 큰 어려움을 던져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매우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는 없다. 그가 태어나지 않았기를 원하는 강렬한 표현에서 그는 그날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나타내었다.

 

(1) 세상이 그날을 잊었기를 바라고 있다. "그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3절),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6절) 좋았겠다고 하였다. "그날이 왕의 탄생일을 표기할 때에 그러하듯이 붉은 글자로 달력 안에 그날이 표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날이 지워져 없어졌었더라면, 나처럼 이렇게 비참한 몰골이 된 자가 태어나고 살았다는 것을 세상이 알지 못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2) 하늘이 그날에 대해 얼굴을 찌푸려 주었기를 원하고 있다. "그날을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4절), "모든 것은 정말 하나님 곁에 있는 그대로이다." 그는 그날을 영예롭게 하셨고, 한 주일의 이레째 되는 날에 베푸셨던 것과 같이 그날을 그의 은총과 축복으로 뛰어나게 하셨고 영화롭게 하셨다. 그러나 내 생각은 결코 그처럼 영예롭지 못하다. 그때가 지정되기 전에 결정하신 하나님께서 그날을 재앙의 날로 검은 숯으로 점찍어 놓으셨었더라면, 빛의 아버지이시며 근원이신 분이 큰 광명으로 낮을 다스리게 하셨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러나 그날에는 그것들이 모두 저 빛을 말하지 못했으면,

 

1) "그날이 캄캄하였더라면"(4절). 만일 낮의 광명이 흑암이 된다면 "그 흑암은 얼마나 짙겠는가!" 얼마나 끔찍스러운 일인가! 그때 우리는 빛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낮에 해가 떨어진 그날의 어두움은 욥의 상태를 제시하고 있다.

 

2) 그날 밤에도 역시 달과 별이 없어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다시 말해서 그 고요함으로 인해 밤의 휴식을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두려움으로 동요하도록 만드는 짙은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3) 모든 즐거움이 그날을 버렸었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이 노래하고 춤추는 즐거운 밤이 아니고 우울하고 고독한 밤이었었더라면. 그 가운데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7절). 그것이 긴 밤이 되어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9절)".

 

(4) 온갖 저주가 그날에 있었기를 바라고 있다(8절). "아무도 그날을 보기를 원하거나 그날이 오기를 청하기 말고 오히려 날을 저주하는 자가 그것을 저주하였었더라면, 어떤 날이든 저주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있었다면, 특히 장례식에서 장송곡으로 애곡 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던 자들이 있었다면 그들로 하여금 동시에 내 출생한 날에 한 번 저주를 퍼붓게 했었더라면, 다른 사람의 사망한 날을 저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같은 입으로 나의 출생의 날을 저주했었더라면, "또는 리워야단(Leviathan-여기에서는 그 단어가 사용되어 있다)을 끌어올릴 만큼, 즉, 고래나 악어를 치려는 힘세고 용감한 자들이 그들의 주문으로써 그것을 약하게 하여 정복하리라는 기대를 가지면서 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온갖 혹독한 저주로 그날을 저주하였었더라면, 아마도 거룩한 시인들이 시사하고 있는 이러한 풍습이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큰 재앙을 슬퍼하거나 가장 무서운 괴물을 본 때처럼 그날이 끔찍스러웠었더라면." 패트릭(Patrick) 주교처럼 나도 여기에서 리워야단은 마귀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요술쟁이나 주술가들이 마귀를 일으킬 때 또는 그들이 넘어뜨릴 수 없는 마귀를 일으켜 놓았을 때 사용하는 저주로 이해하고 있다.

2. 그러나 욥이 그가 출생한 낮이나 밤과 더불어 싸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것들이 "그의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10절). 매우 불만에 차 있는 자들의 어리석음과 광기를 보라. 그러한 자들은 고삐가 그 목에 채워졌건마는 매우 어리석고 지나치게 말하고 있다. 이 사람이 그처럼 그의 지혜 때문에 존경받았으며, "무리가 그의 말을 들으며 잠잠히 기다리다가 그가 말한 후에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도록"(29:21, 22) 만들었던 그 욥이냐? 그는 지혜를 잃었는데 그것은

 

(1) 그가 결코 태어나지 않았었기를 바라는 그의 소망을 표현하려고 매우 힘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그의 바람은 기껏해야 헛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있었던 것을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 그가, 그를 해치지 못하였거나 그에게 저주가 될 만한 일을 행하지 못한 낮과 밤을 마음대로 저주하였을 때였다.

 

(3) 그의 어머니가 만삭이 되었을 때 그를 낳지 않았기를 바랄 정도로 매우 야비한(왜냐하면, 그것은 그녀를 분명 비참하게 죽도록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것을 원했을 때였다.

 

(4) 그가 그를 존재케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멸시하고(그러한 존재는 매우 귀하고 훌륭한 생명이며 그러한 생명은 이 낮은 세상에 있는 다른 피조물들의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단지 "그것이 환난의 무거운 조건이 되었다"라고 하여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선물로서 과소평가했을 때였다. 그가 그 선물의 기쁨을 수년 동안 즐기고 난 후 이제 그 환난이 드디어 그에게 닥쳐왔다. 그가 저쪽 너머에 있는 기쁨을 볼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보지 않기 위하여 그의 눈이 결코 빛을 보지 못하기를 원한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욥이 그가 "후에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19:26)는 것을 바라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현재 육체 안에 슬픔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축복의 능력을 결코 가지지 않았었기를 원해도 좋단 말인가? 하나님은 인내하지 못하는 이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대항하도록 그의 은혜로써 우리를 무장시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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