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복음 15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참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농부라고 말씀합니다. 가지는 성도들을 말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매 맺지 않는 포도나무 가지는 불에 던져지는 것처럼 마지막 날에 지옥의 불 못에 던져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함께 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시면서 많은 영적인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요 15:1-11)
1절 에고 에이미 헤 암펠로스 헤 알레디네 카이 호 파테르 무 호 게오르고스
요 15: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절 판 클레마 엔 에모이 메 페론 카르폰 아이레이 아우토 카이 판 토 카르폰 페론 카다이레이 아우토 히나 플레이오나 카르폰 페레
요 15: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15:1-2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 여기 "참"이란 말의 헬라 원어 대조되는 "참"이 아니고, 불완전에 대조된 "완전", 그림자에 대조된 "실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택한 백성)을 가리키는 비유이다(시 80:8-15; 겔 15:1-8, 19:10-14). 그러므로 랍비 문학에서도 말하기를, "실물 중에 가장 낮은 것(포도나무)이 식물계의 왕인 것처럼,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낮아 보여도 장차 메시아 시대에는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점령한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이런 랍비 문학에서 이 비유를 인용하신 것은 아니지만 참고할 만한 말이다. 예수님은 참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을 성립시키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본래 참 포도나무가 아니며,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실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와 같으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포도나무)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서만 비로소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은,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중보자(中保者)되신 관계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뢰하여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신자의 의뢰심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일체 될 정도까지 깊어져야 한다. 그에게는, 독자적 의지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이런 이상적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우리 본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포도원의 농부라고 하였으며, 그가 가지들을 깨끗하게 하신다고도 하였다(2 절 끝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 그러나 인간 편의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성경은 많이 말씀한다. 마 11:12; 빌 2:12 참조.
그러나 위에 말한 일체 관계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일체를 말함이 아니니, 인격과 인격의 관계이면서 다만 신자 편에서 그리스도에게 종속하여 순종하는 관계를 말함이다. 2세기의 이단자 뫄타누스(Montanus)는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하나님 아버지)요, 말씀(그리스도)이요, 성령이다"라고 하였다(Epiphanius, Haereses). 이런 그릇된 사상에서는 신자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구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잘못이다. 신자는, 은혜를 많이 받아 그리스도에게 접근할수록 자기의 죄를 깨달으며, 주님과 자기와의 구분을 더욱 밝히 깨달아야한다.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예수님을 참 포도나무로 세우신 이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가 우리의 중보자를 영원 전에 세우시고(벧전 1:2), 그를 마침내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가 중보자를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셨다(마 3:17). 그리고 변화산에서는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라고도 하셨다(마 17:5). 하나님께서 신임하시고 세우신 중보자를 인간이 불신임할 것인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
3절 에데 휘메이스 카다로이 에스테 디아 톤 로곤 혼 렐랄레카 휘민
요 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 여기 이른바 "내가 일러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전도의 말씀, 곧, 복음이며, 오늘날은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작용으로 그렇게 되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신자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편(方便)이라는 교리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행각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바 성경에 기록된 말씀 곧, 복음과 율법을 의미한다. 성경이란 책은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이 말씀은 언어, 혹은 문자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로 되었다는 것이, 그것의 하나님 말씀 자격과 효능(效能)을 상실시키지 않는다. 헬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사람의 말은, ... 그 사람과 그 말과의 시간적, 혹은 장소적 거리에 따라서 효력의 다소가 좌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그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말씀과 함께 현림(現臨)하시어 계시다. 그는, 언제나 그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을 가지시고 그 말씀과 함께 임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게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나 성령에게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영감 되었고, 계속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관되며, 능력 있게 되는 것만큼, 거기서 섭취하여 전파되는 부분적 말씀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mpen, J. H. Koke 1911, pp. 502-503).
바빙크(Bavinck)는, 또한 하나님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에 대하여, 성경이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곧, (1)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라고 함(롬 1:16; 고전 1:18, 2:4, 5, 15:2; 엡 1:13). (2) 생명 있고 영존하는 말씀이라고 함(벧전 1:25). (3)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함(히 4:12). (4) 영이며 또 살리라는 것이라고 함(요 6:63). (5) 어두운데 비취는 빛이라고 함(벧후 1:19). (6) 마음에 심는 씨(생명 있는)라고 함(마 13:3). (7) 좌우에 날 선 예리한 검이라고 함(히 4:12), (8) 믿는 자들 속에 역사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살전 2:13).(Gereformeerde Dogmatiek. , pp. 501-504).
바빙크(Bavinck)는, 성경 말씀의 능력과 생명의 역사에 대하여 비유하기를, 손이 일하지 않을 때에도 일할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 말씀에 능력이 마술적으로 붙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말씀과 관계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바빙크(Bavinck)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개혁자들은, 성경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를 무인격한 마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늘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와 연락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은 무인격한 능력이 아니며, 늘 말씀과 함께 하시며, 말씀으로 활동하게 하시되 늘 같은 모양으로 역사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 말씀(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역사하여 혹은 회개시켜 가며, 혹은 강퍅케 하시며, 혹은 일어나게 하시며, 또 혹은 넘어지게도 하신다. 그가 이 말씀으로 역사하시되,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하시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ampen J.H Kok 1911, p. 503).
4절 메이나테 엔 에모이 카고 엔 휘민 카도스 토 클레마 우 뒤나타이 카르폰 페레인 아프 헤아우투 에안 메 메이네 엔 테 암펠로 후토스 우데 휘메이스 에안 메 엔 에모이 메이네테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절 에고 에이미 헤 암펠로스 휘메이스 타 클레마타 호 메논 엔 에모이 카고 엔 아우토 후토스 페레이 카르폰 폴륀 호티 코리스 에무 우 뒤나스데 포이에인 우덴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절 에안 메 티스 메이네 엔 에모이 에블레데 엑소 호스 토 클레마 카이 엑세란데 카이 쉬나구신 아우타 카이 에이스 퓌르 발루신 카이 카이에타이
요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15:4-6
이 부분에 사용된 어귀들 중, "거하라"는 말은 "머물라"라는 뜻이니, 이미 있는 자리에 머물라는 뜻이다. 5절의 "있으면"이란 말도 헬라 원어에서는 꼭 같이 "머물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여기 "머물라"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택하여(16절) 은혜 주신 그 자리에서 그들이 떠나지 않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그리스도 밖에서 그를 믿으려고 자율적으로 찾아가는 자가 아니고 벌써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인도된 자니, 그는 거기 머물러 있으려고 순종의 걸음을 걸을 자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인간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6:44).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시는데, 우리는 그저 순종할 뿐이다. 순종이란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의 말씀을 지킴이다. 만일 누가,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다 이루어 주시는 것인 만큼 나는 순종할 것 없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무생물 혹은 하등 동물로 취급하는 오착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으나, 우리로서 할 일은 그에게 순종함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시므로 구속(救贖)의 큰 사업을 완성하셨다(히 5:8-9).
7절 에안 메이네테 엔 에모이 카이 타 레마타 무 엔 휘민 메이네 호 에안 델레테 아이테세스데 카이 게네세타이 휘민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그 아래 말씀이 알려주는 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자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왕좌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그의 대리(代理)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권위를 높이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거한 생활의 유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약에 참여한 자로서 신종(信從)하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신분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쓸 수 있고, 또한 성령께서 그런 신자의 의지를 성화(聖化)시켜 주님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신다.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여 기구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상반 절에서 벌써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생활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 있다. 신자가 주님과 연합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계약 행위, 곧, 선택이 그 기본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순종이 그 실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 생활에서만 근근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계약과 생명에서 움직이는 내면적인 경건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무엇이든지 응답받는다는 진리는, 요한이 그 시선에서도 말씀한 바 있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라고 한 말씀이 그것이다(요일 5:14). 기도 응답을 받는 자들은 저렇게 내면적인 경건의 소유자들이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은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고(신 34:10), 히스기야는, 기도 하여 자기의 병을 고침 받았다(사 38:2-5; 왕하 20:5-6).
그는 기도하여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파멸시켰는데(왕하 19:14-19, 35),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 대로,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할 만큼, 경건하였다.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도들을 위시하여 일반 신자들 전체에게 허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져 주시는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이다.
히 4:14-16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약 5:17에 말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아니로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큰 죄인들도 회개하며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고(대하 33:10-13), 신약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눅 18:13-14에 말하기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였고, 계 3:19-20에는 말하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하였다.
8절 엔 투토 에독사스데 호 파테르 무 히나 카르폰 폴륀 페레테 카이 게네세스데 에모이 마데타이
요 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실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을 찍어 버릴 수밖에 없다. 실과나무를 심는 자는 목재를 쓰려고 심지 아니하고 열매를 따려고 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자는 나무와 같이 찍힘을 받을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자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행실을 바로 행함이고(갈 5:22-23), 또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함이다. 잠 11:30에 말하기를,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라고 하였다. 사람의 영혼은 귀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다(마 16:26). 예수님께서 사람의 영혼이 귀하다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세상 문화를 건설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영혼을 귀하다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겠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여호와의 빛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잠 20:27에 말하기를,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등불이 되게 하는 운동, 곧, 전도 운동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의인 99명보다 회개하는 한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눅 15:17).
9절 카도스 에가페센 메 호 파테르 카고 에가페사 휘마스 메이나테 엔 테 아가페 테 에메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이 구절부터 15절 까지는, 신자들끼리의 연합의 배경을 말해 준다. 곧, 신자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속죄 사업을 담당하시게 하신 것을 말함이다. 5:20-21 참조.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이루실 속죄 사업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이런 사랑에 거하는 것은 기븐 일이요, 괴로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그들의 갈망하는 보금자리인데 그들은 왜 거기서 떠날 것인가? 거기 거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계명(신자들끼리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킴이다.
10절 에안 타스 엔폴라스 무 테레세테 메네이테 엔 테 아가페 무 카도스 에고 타스 엔폴라스 투 파트로스 무 테테레카 카이 메노 아우투 엔 테 아가페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땅 위에서나 어디서든지 완전히 하신다(10:17-18, 12:43-50, 14:31). 그것이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방법이다. 그와 같이 신자도 예수님의 계명을 순종하므로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신자가 주님의 사랑에 거하는 방법은, 신비주의자들처럼 그의 사랑의 취미에 집중하여 즐기는 것이 아니고, 그의 계명을 지킴, 곧, 생활로 그 사랑을 나타냄이다"라고 하였다(Jezus vraagt niet een mystick zwelgen in liefdegenot, Maar activiteit, liefd toonen. - Het Heil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 1950, p. 346).
11절 타우타 렐랄레카 휘민 히나 헤 카라 헤 에메 엔 휘민 메이네 카이 헤 카라 휘몬 플레로데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 여기 이른 바 "이것"이란 말은, 윗절에서 가르친 내용을 가리킨다. 곧,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므로 그리스도와 사랑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 사랑을 받으면 그들에게 기쁨이 넘친다.
"내 기쁨"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기뻐하시는 기쁨을 가리킨다.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서 그렇게 기뻐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16:22). 우리가 이 기쁨을 가져야만 (1) 원망, 불평, 의심을 이기며, (2) 담력, 용기, 인내를 가지고 이 세상 모든 난관과 환란을 이기며, (3) 모든 수고로운 사랑의 책임들을 꾸준히 이행(履行)하게 되며, (4)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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