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헬라어 강해 중에서 예수님 중풍병자 치유와 죄 사함 논쟁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가르치고 있을 때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놓으려고 했습니다. 많은 무리 때문에 중풍병자를 메고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중풍병자를 많은 무리가 있는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중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생각하여 말하기를 신성 모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는데 당신이 무엇이기에 죄를 사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 있으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믿어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치유의 놀라운 역사가 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중풍병자 치유와 죄 사함 논쟁 사건(눅 5:17-26)
17절 카이 에게네토 엔 미아 톤 헤메론 카이 아우토스 엔 디다스콘 카이 에산 카데메노이 파리사이오이 카이 노모디다스칼로이 호이 에산 엘렐뤼도테스 에크 파세스 코메스 테스 갈릴라이아스 카이 이우다이아스 카이 히에루살렘 카이 뒤나미스 퀴리우 엔 에이스 토 이아스다이 아우투스
눅 5: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5:17
바리새인 - 누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교법사)들을 언급하고 있다. '바리새'는 '분리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파라쉬'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분리된 자'라고 불리워진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엄수하고 랍비들이 제정한 전통을 지켰다(막 7:3). 종교나 세속의 영역에서 세부적인 율법 규례들을 제정한 것도 그들이었다. 이와 함께 제사장 없는 회당에서 바리새인들이 평신도 예배에 끼친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성전과 제사장 직제가 없어진 후에도 바리새적인 합리주의가 계속하여 유일한 종교적 교육을 전담했다.
바리새인들은 또한 세상의 종말에 있을 부활(행 23:6)과 천사의 존재를 가르쳤고, 부활 후에는 인간이 보상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들은 메시아적 소망, 민족주의, 반로마 제국주의를 고취하였지만 그렇다고 열심당과 뜻을 같이 하지는 않았다. 또한 바리새인과 예수와의 반목은 극에 달했었다.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율법의 교훈을 무시한 데 대하여 그들은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의 죄사함이나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는 그들의 허영과 위선을 질책하셨고, 그들이 율법의 참뜻을 깨닫는데 실패했음을 힐난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에 얽매여 한쪽 방향으로만 치우쳐 매우 극단적이고 위신적으로 변해버렸다.
교법사(敎法師) - 교법사는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나 말로 NIV는 '율법 선생들'(teachers of the law)이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율법(written tradition과 oral tradition을 포함)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석학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경 연구와 율법 연구는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을 '교법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지만 바리새인들처럼 어떤 특정한 종교적 일파를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유대의 법적 전통의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 존경을 받았다. 요 5:16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시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이미 충돌한 바 있으며, 따라서 그들이 예수의 행동을 책잡기 위해 일일이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이해된다.
병을 고치는...함께하더라 -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의 사역에서 치유의 사역으로 초점을 옮기고 있다. 예수의 치유사역은 누가에게 있어서 대단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말씀과 치유의 능력이라는 이 두 요소는 본 기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종종 구약에서 하나님은 영육 간의 병을 치유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출 15:26; 렘 30:17; 호 7:1). 그리고 장차 오실 메시아도 위대한 치료자로 묘사된 바 있다(말 4:2). 본문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났음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바로 그 능력을 지닌 메시아이심을 아울러 증거 한다.
18절 카이 이두 안드레스 페론테스 에피 클리네스 안드로폰 호스 엔 파랄렐뤼메노스 카이 에제툰 아우톤 에이세넹케인 카이 데이나이 에노피온 아우투
눅 5: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5:18
한 중풍병자 - 중풍병은 뇌출혈로 인하여 반신 또는 팔다리 등 몸의 일부나 전체가 마비되는 증세를 나타낸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병이 죄 때문에 오는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 한 사람의 중풍병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동원되었다. 환자를 메고 온 저들의 열심과 노력이 결국 환자를 치유케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들이 환자의 가족인지 친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믿음의 세계란 결코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서는 것임을 보여준다.
19절 카이 메 휴론테스 디아 포이아스 에이세넹코신 아우톤 디아 톤 오클론 아나반테스 에피 토 도마 디아 톤 케라몬 카데칸 아우톤 쉰 토 클리니디오 에이스 토 메손 엠프로스덴 투 이에수
눅 5: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5:19
지붕에 올라가...달아 내리니 - 팔레스틴의 가옥은 대개가 뚜껑이 있었다. 팔레스틴 지역은 날씨가 덥기 때문에 여름에는 공기가 순환할 수 있도록 지붕을 덮개로 만들었다. 덮개를 열면 집 안으로 바로 공기가 들어올 수 있다. 중풍병자를 지붕에서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가옥 문화 때문에 내릴 수가 있었다.
20절 카이 이돈 텐 피스틴 아우톤 에이펜 아우토 안드로페 아페온타이 소이 하이 하마르티아이 수
눅 5: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5:20
저희 믿음을 보시고 - 확신 있고 열심 있는 믿음은 끝내 결실을 얻게 된다. 예수는 그 믿음에 확실히 반응하신다. 예수는 행위 보다도 먼저 믿음을 보신 것이다. '저희의 믿음'이라고 했을 때 '저희'란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을 말함이 분명 하나 그 가운데 '중풍병자의 믿음'도 포함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은 어려움에 처한 자를 돌보는 다른 자들의 중재(仲裁)에 응답하신다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 남의 신앙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자들은 예수께서 그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구원은 그와 예수 사이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실제로 그가 믿음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본문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는 그를 치료하기로 선택했으며 그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자신의 긴박한 필요성에서 절실한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예수가 그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라고 명령했을 때 그가 그 명령대로 행한 것은 그가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람아... 받았느니라 - 예수는 여기서 자신이 죄를 사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 병자의 죄가 '사함 받았다'(sins are forgiven, NIV)고 말한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용서의 근원임을 암시하는 겸손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주장은 옳았다. 그러나 그들의 실수는 자신들 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 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예수의 선언은 죄가 그의 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뜻을 내포하는 말은 아니다. 예수 당시에는 흔히 병의 원인이 죄라고 여겼는데 예수의 제자들 조차 그러했다(요 9:2). 그러나 본문의 문맥 속에서는 죄와 병을 연결시키는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예수는 육신의 질병에 시달리는 병자에게 보다 근원적인 질병 곧 죄의 문제로 관심을 집중토록 유도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부분적인 구원이 아니라 전인적(全人的) 구원이라는 것이다.
즉 그 구원은 영적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또 육적 구원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 임하는 구원은 예수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영육 간의 전인적(whole personal)인 구원이다. 예수의 치유 또한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완전한 것이다.
21절 카이 에륵산토 디알로기제스다이 호이 그람마테이스 카이 호이 파리사이오이 레곤테스 티스 에스틴 후토스 호스 랄레이 블라스페미아스 티스 뒤나타이 아피에나이 하마르티아스 에이 메 모노스 호 데오스
눅 5: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5:21
참람(僭濫) - 이것은 '신성모독'을 나타내는 말이다. 헬라어 '블라스페미아'는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대한 범과(犯過)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인 모독일 수도 있고(계 13:6), 그의 이름, 그의 말씀(딛 2:5), 혹은 천사적 존재(유 1:8-10;벧후 2:10-12)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죄를 사하실 때(막 2:7), 메시아이심을 주장하실 때(막 14:64), 또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다고 주장하실 때(요 10:30)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유대 법은 이렇게 공공연하고 명백하게 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신을 모독하는 자를 정죄하여 돌로 쳐죽이는 벌을 내렸다(H. W. Beyer, TDNT. I. 621-625).
22절 에피그누스 데 호 이에수스 투스 디알로기스무스 아우톤 아포크리데이스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티 디알로기제스데 엔 타이스 카르디아이스 휘몬
눅 5: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5:22
무슨 의논을 하느냐 - 예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간파하였다. 비상한 통찰력으로 그들의 의논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의 신적 전지성(omniscience)의 일면을 볼 수가 있다.
23절 티 에스틴 유코포테론 에이페인 아페온타이 소이 하이 하마르티아이 수 에 에이페인 에게이라이 카이 페리파테이
눅 5: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5:23
어느 것이 쉽겠느냐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되물어보는 예수의 질문 속에 내포된 전형적인 '가언적 양도논법'(假言的 兩刀論法; hypothetical dilemma)의 뿔에 찔려 꼼짝 못 하게 되었다(6:9). 어떤 의미에서 생각하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와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들이 말하기에는 모두 똑같이 쉽고, 행하기에는 똑같이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언급이 표면적으로는 더 쉽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죄 사함은 반드시 외적 증거로 나타나지 않아도 되는데 반해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은 외적 증거가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물음의 핵심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하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둘 다 어려울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고서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해 보이는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돌리게 하는 데에 있다.
24절 히나 데 에이세테 호티 엑수시안 에케이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에피 테스 게스 아피에나이 하마르티아스 에이펜 토 파랄렐뤼메노 소이 레고 에게이라이 카이 아라스 토 클리니디온 수 포류우 에이스 톤 오이콘 수
눅 5: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5:24
인자(호 휘오스 안드로푸) - 복음서에서는 이 용어가 90여 회 나온다. 그중 본서에만 26회 나올 만큼 인자 개념은 본서의 핵심 사상이다. 요 12:34를 제외하고는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신 용어(6:5, 22; 11:30; 마 8:20; 막 14:41; 요 3:14)인 '인자'가 원문의 표현상 여자적(如字的) 의미로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인자'라고 칭하신 데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1)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관계된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곧 그가 하나님이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신 것을 의미한다. (2) 이는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니엘이 이상(異象) 중에 본 '인자'가 장차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였던 점(단 7:13)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며 '네가 그리스도냐'는 대제사장들의 질문에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라고 하신 예수의 대답(막 14:62)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3) 그러나 예수께서 인자로서의 종말론적 영광을 누리기 의하여서는 그 이전에 반드시 이 땅에서의 각종 수난과 죽임을 당하여야만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다(22:42).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정녕 열 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부릴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마 26:53) 시도 때도 없이 대적들로부터 당하는 각종 모욕과 수난을 감내해내셨는데(4:29; 11:53, 54; 20:20; 22:63-65; 23:11) 여기에 예수께서 자기를 가리켜 '인자'라 칭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25절 카이 파라크레마 아나스타스 엔오피온 아우톤 아라스 에프 호 카테케이토 아펠덴 에이스 톤 오이콘 아우투 독사존 톤 데온
눅 5: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5:25
하나님께 영광을...돌아가니 - 중풍병자가 치료받은 것은 예수께서 난언한 말씀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풍병자에게 주어진 '일어나 걸어가라'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명령을 따르는 일은 신앙에 바탕을 둔 순종으로써만 가능하다. 병자가 치료를 받자 그 사람 자신과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가 나타난다. 메시아의 사역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였다(2:14).
26절 카이 에크스타시스 엘라벤 하판타스 카이 에독사존 톤 데온 카이 에플레스데산 포부 레곤테스 호티 에이도멘 파라독사 세메론
눅 5: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날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5:2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면은 본서에 여러 번 나타난다(25절;2:20;7:16;13:13;17:15;18:43;23:47).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누가의 중요한 목적들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이한 일을 보았다 - 원문은 '기이한 일'을 '파라독사'라 표현하였는데 이는 '기대와는 반대되는', '기대에는 어긋나는'(contrary to expectation)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NIV는 이 부분을 '주목할 만한'(remarkable)이라 번역한다. 영어의 '역설'을 나타내는 paradox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이를 보건대 예수 주위에 있던 무리들은 예수께서 그 중풍병자를 고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의 기대를 뒤엎고 중풍병자를 그 즉시로 치료하시자 무리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수는 그들의 의표(意表)를 찔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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