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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 설교말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마 5:3-12)

복음의 능력 2021. 5. 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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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 설교말씀 중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교훈의 말씀을 통해서 의에 주리고 갈증을 내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에 주려야 합니다.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음식만을 탐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복음을 먹어야 합니다. 복음을 먹지 않으면 속 사람은 살 수가 없습니다. 결국 주려서 힘들어합니다. 또한 복음을 먹어야 만이 영적인 갈증을 해소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시간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 영혼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항상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목: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설교자 : 윤사무엘 목사

 

본문 말씀:  마 5:3-12, 렘 5:1-11

 

요 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6)

 

주 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가 되어 배부름을 받자

 

오늘은 산상보훈(山上寶訓)에 나오는 팔복(八福 Beatitude 중 네 번째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do hunger and thirst after righteousness” (마 5:6) 말씀을 살펴보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팔복 내용 하나하나가 복음의 내용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복 있는 자’(영어로는 the+형용사 혹은 they앞에 ‘Blessed are’)는 단수가 아니고 복수개념입니다. 즉 “복 있는 자들”이란 심령이 가난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 온유한 자들, 오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입니다. 복수 개념은 공동체의 개념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 있는 가정, 복 있는 교회, 복 있는 나라/마을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의(히브리어=쯔다카, 헬라어=디카이오)의 뜻은 정직한 것, 바른 것, 올바른 것, 옳은 사람, 올바른 생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가 ‘의’입니다. 의의 반대는 불의요 죄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17-19)

 

로마서 1장 29-31절에 보면 죄의 목록이 나오는데 그 첫째가 불의(unrighteousness) 입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저를 옳다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불의는 죄의 뿌리입니다. 교만과 불순종과 관계가 있습니다.

 

주님의 두가지 비유를 통해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을 살펴보십시다. 천국은 마치 그 종들과 회계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했습니다(마 18:23-34). 요즘말로 이를 설명해 봅시다.

 

어느 기업에 회장이 있었습니다. 자 회사의 한 사장이 경영을 잘못하여 엄청난 부채 10억을 지게 되었습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몇 번 이런 사고가 생기니 참을 수 없어 그 회장이 사장을 소환하여 모든 부채를 당장 해결하도록 지시를 했습니다. 만일 갚을 수 없으면 사장의 모든 재산을 압수하고 부인과 자녀들은 말단 회사의 하급 직원으로 채용하여 월급 없이 장기간 일을 해야 한다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에 사장은 통사정을 하여 어떻게 하든지 부채를 정리할 테니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 사정하는 모습이 하도 딱하여 회장은 불쌍히 여겨 큰 마음을 먹고 모든 부채를 없는 것으로 정리하고 내보냈습니다. 이 사장은 너무 기뻤습니다. 의기양양하여 회장실에서 나와 본부 사무실 밖을 나가는데 마침, 자기에게 백만 원의 빚을 지고 있는 부하 직원을 만났습니다. 그 직원에게 당장 빚을 갚으라고 촉구를 하니 그 직원이 통사정을 했습니다. 이 사장은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 부하직원을 경찰에 고발하여 투옥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있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소식이 회장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괘씸하게 여긴 회장은 그 사장을 다시 불러 나는 자네의 사정을 듣고 불쌍히 여겨 큰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자네는 어찌 부하직원의 몇 푼 되지 않는 부채를 탕감해 주지 않으니 너는 참으로 불의한 양반이로군 하고 그 사장을 구속시켰습니다.

 

이런 청지기가 불의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십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니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4-25)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요청을 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에 의인 50명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6번씩 줄여 가며 마지막으로 의인 10명을 찾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요청에 하나님께서 긍정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 롯의 가정을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의를 말할 때는 먼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시편에 보면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그 행사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 그 행사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저가 자기 백성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사 그 행사의 능을 저희에게 보이셨도다. 그 손의 행사는 진실과 공의며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시 111:1-8)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을 의롭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에 대하여도 옳은 생활, 사회에도 의가 행하여지도록 생활하는 것이 의의 참 뜻입니다. 여덟 번째의 복 있는 사람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마 5:10),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 하나님 편에 있다가 따돌림을 받는 자를 말합니다.

 

의의 관계 면에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로 자신에게 올바른 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합니다. 자기 양심으로 판단해 보면 자신의 신앙생활이 올바른 것이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도 자신을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도덕적인 양심면에서 자신이 바르게 살고 잘하고 있다고 할 만큼 생각하는 수준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도 마 5:20에 말씀하신 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이웃과 공동체 혹 나라의 정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역사상 정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이 많았습니다. 고대시대부터 법은 항상 정의의 법이었고, 전쟁도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명분을 내세워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힘써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하셨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고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의 표상이십니다. 메시아 오심을 예언한 이사야의 말씀을 보면 구구절절이 주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해 말씀하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지상 선교하시면서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6-7)“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사 11:2-5)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운 나라이며 공의와 정직이 기준입니다.

 

이런 나라를 이루는 것이 성도의 임무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자체가 공의입니다. 로이드 존슨의 주석에 보면 돌아오는 탕자 비유에서 보듯이, 사람이 배가 조금 고프면 돼지우리를 찾으나, 많이 고프면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하는 뜻은 적극적인 성품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이 두 가지는 우리 육신의 가장 큰 욕망 욕구, 혹은 갈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헬라 문법으로 보면 속격은 부분을 나타내며 대격은 전체를 말하는데 여기서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일은 전체를 나타내는 대격을 쓰고 있습니다. 총체적인 갈급함이 있습니다. 주리는 것, 대단히 급한 일입니다. 목마른 것도 또한 대단히 급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겸하면 얼마나 갈급(渴急)하겠습니까? 이것은 인간 심령의 가장 강력한 욕망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몸이 불편한지 하나님의 성소에 오르지 못할 때 영혼이 갈망한 모습을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시 42:1)고 기도했습니다. 또 호세아는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호 8:11)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 마르다”(요 19:28) 하신 말씀은 단순히 육체적인 갈증보다는 온 인류의 영혼 구원에 대해 갈급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욕망이 있습니다. 지식의 욕망, 물질의 욕망, 우정의 욕망, 사랑의 욕망, 권세의 욕망, 명예의 욕망, 영광의 욕망 등 여러 가지 욕망이 있습니다. 이 모든 욕망 외에 우리의 마음속에는 의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옳은 사람이 되면 좋겠다, 의로운 생활을 하면 좋겠다, 누구나 이런 욕망이 이따금씩 우리 마음속에 생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악하기로 유명한 로마 황제 네로도 사형 허락에 대한 첫 번 사인을 할 때에 ‘차라리 글을 안 배웠더라면’ 하고 탄식했습니다. 독재자 히틀러도 때때로 ‘나는 이 정치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한가히 그림이나 그리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홀로 앉아 있는 시간이면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런 악하고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는 사람들도 의에 대한 욕망은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에 대한 옳은 생활에 대한 욕망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가, 얼마나 계속되느냐 하는 것이 악하고 선한 사람으로 갈라놓는 것입니다. 주린 사람이 음식물을 찾는 것처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이 위에 대해 얼마나 갈급 해 합니까?

 

돈에 대하여 혈안이 되어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하여 갈급 한 이도 또한 많이 있습니다. 지식에 대하여 갈급 한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지위 권세에 대하여 갈급 한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말라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명동에 나가 보면 지나다니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만 명에 달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이나 의에 목말라 헤매면서 의를 찾습니까? 그리고 우리 자신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의,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오직 의, 사회에서도 오직 의만이 실현되기 위하여 주린 사람이 음식을 찾듯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갈급 해 하는 이가 우리 사회에 몇이나 됩니까?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둘째로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갈급한 이에 대한 욕망만 있어도 복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지는 못했으나 지을 마음은 간절했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마음에 간절히 부르짖기를 ‘나는 아직도 죄를 계속하여 짓습니다. 그러나 꼭 이 죄를 끊기를 원합니다. 오 주여, 이 죄를 꼭 끊게 하여 주세요. 오 주여, 나는 아직도 죄의 악한 습관을 한 가지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나쁜 버릇을 못 고칩니다. 그러나 꼭 고치고 싶습니다. 오 주여 생각에도 말에도 행동에도 꿈에도 죄 짓지 않게 해 주세요. 우리 가족이 다 감화되지 못하였습니다. 어떻든지 금년에는 감화되게 해 주세요. 우리 사회에 얼마나 불의가 많습니까? 좀 더 옳은 사회 깨끗한 사회 좀 더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게 해 주세요.’ 이상과 같은 간절한 소원이 있으면 그는 벌써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왜? 그런 사람의 심령 속에는 새 생명이 싹트고 또 움직이며 장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의 새 생명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첫째 바른 판단, 바른 욕망입니다. 팥죽 한 그릇 보다도 장자의 명분이 귀한 줄을 아는 바른 욕망 돈 명예 권세보다도 의에 목말라할 줄 아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른 선택입니다. 모세와 같이 애굽의 향락보다도 양심의 편한 편을 선택하는 바른 선택이 새 생명의 증거입니다. 모세는 의 아닌 물질, 의 아닌 지식, 의 아닌 명예, 의 아닌 사랑은 쓸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셋째로 이처럼 의에 기갈(飢渴) 한 이는 사실 다른 욕망이 그렇게 크게 시험하지 못합니다. 이 큰 욕망에 다른 것들은 점점 적어집니다. 아론의 지팡이처럼 다른 작은 뱀들을 잡아먹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는 벌써 성신의 역사가 있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의에 주리는 사람에게는 셋째로 배부름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주리는 자에게 의의 풍성한 양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5) 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요 6:37-38) 예수께 나아와 그를 믿음으로써 외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의의 배부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간절히 의를 사모하던 바울도 주께 나아와서 의를 얻은 것을 우리는 다 잘 압니다. 의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나 가정, 교회나 국가에 하나님으로 충만하며, 예수님으로 풍성하게 채워지고, 성령님으로 충만한 축복을 받게 됩니다.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부스러기가 남았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들어갈 하늘나라의 모습을 보니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1-2) 이 얼마나 풍성한 축복의 모습입니까?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9) 바울 사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루터도 칼빈도 주께 나와서 그를 옷 입듯 함으로써 의에 배부름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서만 점점 의로운 데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에 갈급 한 이는 그리스도께 나옵니다. 온전히 그를 생명의 주로 삼습니다. 의의 욕망이 미지근하여 주께 나오는 발걸음이 더디지만, 그러나 나오는 자마다 의의 배부름을 얻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미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말씀을 깊이 묵상해 봅시다.

 

예루살렘 도성에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멸망당했습니다(렘 5:1).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가정은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회,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나라는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마 6:3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의를 갈망합시다. 의를 전심으로 찾읍시다. 의를 먼저 구합시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악인의 팔을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시 37:16-17)

 

기도: 주님, 불의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주님의 바른 길, 관계, 구원의 길로 걷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목마르고 주리게 하셔서 훗날 하나님의 의로 배 불리게 하옵소서.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게 하시고 주님 나라 갈 때까지 “내 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옵소서” (시 23:3).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에스라 8장 주일설교] 바벨론 출발에서 예루살렘 도착까지(스 8:1-36)

안녕하세요. 오늘은 에스라 8장 주일설교 중에서 바벨론 출발에서 예루살렘 도착까지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유다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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