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도 알쓸잡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강해 중에서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말씀이신 그리스도(요 1:1-2)
마태, 마가, 누가의 공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나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집요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추적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들은 사건 기록이 많은데 비해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이나 세례나 시험에 관한 기사가 없다. 변화산의 기사나 최후의 만찬이나 겟세마네의 기사도 없고 수많은 비유나 이적담들도 없다. 대신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을 설명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는 목자요 너희는 양이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들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설명을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에 관한 묘사 내지는 설명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인간 중에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고 모두가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은 자신을 묘사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본체라는 말은 숫자적으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똑같다는 의미의 하나이다. 성부, 성자, 성령 세분 하나님은 존귀, 영광, 능력 등 모든 것에서 차등이 없으시다.
삼위의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서가 있을 뿐 누가 높거나 누가 낮은 것은 아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알리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 보여 주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이라는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전달시키고 설명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설명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 14:6-7)”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8-10)”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또 보내신다는 점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5-19)”
이 말씀 중 18절을 보면 우리는 세상에 보냄 받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우리도 보내신다고 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는 이 세상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유일한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의 자녀로 부르셨다. 예수님은 살아서 걸어 다니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셨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에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전 생애를 사시면서 어느 한 말씀, 어느 한 행동도 은혜롭지 않고 진리가 아닌 것이 없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생명의 샘이라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 와서 먹고 마시라’ 신자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이다. 이제는 불신자들이 짐을 가지고 신자들에게 와야 한다. 우리가 구속자가 될 수는 없지만 일차적으로 통과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온전한 사람들이 없었다. 중풍병자, 귀신 들린 자, 소경, 앉은뱅이 들이었다. 신자의 산앙은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 있을수록 훌륭한 신앙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에게 싸여 있는 사람, 그가 잘하는 사람이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끼리만 모이면 부족한 사람은 갈 곳이 없다.
신앙이 성장하고 난 뒤에 우리가 제일 못 참는 것은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를 못한다. 성장한 믿음의 사람이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키우는 토양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그 믿음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는 이렇게 보냄을 받았다. 우리는 은혜와 진리로써 우리의 영광을 취해야 한다. 은혜와 진리로 우리는 우리가 있는 터전에서, 혹은 만나는 사람 앞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는 사는 사명인 줄 알고 마음에 기억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2. 증거자 세례 요한(요 1:6,7)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요 1:7)”
눈을 뜬 자에게는 빛을 증명해 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빛을 설명해 주어야 하는데 빛은 설명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다. 장님에게 색깔을 구분하여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빛과 색깔’을 본 사람끼리는 구구하게 말이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장님에게는 ‘빛과 색깔’에 대하여 설명과 증명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부분은 죄라는 단어일 것이다. 우리는 보통 죄라는 것을 도덕성과 윤리성이라는 각도에서 제일 많이 감지하고 산다. 그러나 죄의 본체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반대되는 것, 거스리는 것 등이 죄이다. 가장 밀접한 관계가 사랑이라면 가장 먼 관계는 적대관계가 아니라 무관심의 관계이다. 오늘날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에 대하여 어느 학자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 정도는 마치 지렁이가 매니큐어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 설명이 가능할까?
혹자는 인간에게 종교심이 있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신앙에 가장 크게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종교심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에게 가장 불행한 요소는 도덕성과 윤리성이다. 기독교는 윤리 도덕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핵심이 되어 버린다면 윤리와 도덕만큼 기독교에 어려운 대상도 없고 종교심만큼 어려운 대상도 없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기적이요, 혁명이요, 불가사의한 일이다. 보고 나니 보지 못하는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세례 요한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자기를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믿게 되기를 소원했던 것처럼 우리도 빛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떠서 보게 된 빛의 세계들이 우리들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그걸 못 보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개안시키기 위하여 애쓰며, 내가 가진 축복을 찬양하면서 사는가? 신자들을 만나면 꼭 이런 느낌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떠서 놀라운 빛의 세계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서 살아야 하는 사회는 빛을 본 자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눈을 감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눈을 뜬 것이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눈은 단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갈 때만 필요한 것처럼 살아간다.
“하나님께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요 1:6-7)” 세례 요한은 빛을 보는 자이다. 하나님을 보는 자이다. 본 자가 안 본 자에게 증거 할 수밖에 없다. 설명이 아니라 증거 할 수밖에 없다. “빛이 있다. 나는 본다” 그 빛이 이 땅에 오셨고, 그 일을 완성했고, 지금도 빛을 비추고 계시고 우리를 또한 빛으로 세상에 보내신다. 우리는 빛으로 세상에 들어와 있다. 이것이 설명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눈을 감은 자에게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색깔을 구별하고 있다. 그러니 누가 더 오래 참아야 하고 누가 더 많이 용서해야 되며 누가 더 많이 양보하면서 기다려야 하는가? 눈을 뜬 자이다. 우리에게 희생이 따라야 하고 빼앗겨야 되고 우리가 더 많이 고생하고 수고하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애를 써야 한다. 우리가 눈을 뜬 자이기 때문이다.
요한을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다. 개중에는 요한의 제자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도 있다. 우리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장님들이 올바른 길로 인도함을 받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들이 눈을 떠야 따라올 것이 아닌가? 눈을 뜨기까지는 설명을 해서 그들을 납득시킬 수 없다. 참고 견디면서 주님 안에서 빛을 증거해 주어야 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오늘 우리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을 주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명령을 받고 있다. 그들의 눈이 뜨일 때까지 참고 견디고 당하는 것이 신자의 생활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며 나는 그의 손에 붙잡힌 바 되었던 일들이 이렇게 많았었노라 자랑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3. 무지(요 1:9-13)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불신자들을 향하여 가지는 오해는 ‘왜 이 당연한 말씀을 믿지 않는가?’하는 의문이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진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9-10)”
빛이 왔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고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가 오셨으되 피조물이 그를 알지 못했다. 11절에는 자기 땅에 왔으되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않았다고 하였다. 나는 믿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렇기에 불신자들을 보면서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기가 예수를 믿게 된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기적인지를 쉽게 망각한다. 그래서 전도하는데도 믿지 않으니 그저 답답해한다. 우리는 믿는 모든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 부분이 기독교 복음이 제시하는 축복과 복음 담겨 있는 자리이다.
성경은 가장 중요한 우리의 우리 된 특권과 사랑과 확신과 축복의 기초를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으로 제시한다. 예수님은 빛이시다.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오신다. 우리를 만드셨으나 지음을 받은 자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미 믿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얼마만큼 하나님을 안 믿는가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이유는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신자의 상징만은 아니다. 죄악 된 인류의 상징이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3)” 인간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일일이 간섭하시고 더 많은 어떤 것들을 베푸신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근본적인 기적과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더 많이 찾아오신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는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사 1:10)”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 백성을 향하여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또 믿는다. 그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기를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오셨고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큰 기적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예수를 믿고 영접하는 자가 되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모세를 보내서 출애굽 시키셨다.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아브라함을 불러 내시고, 다니엘을 보내 사자의 입을 막으시고, 엘이야에게 갈멜산 승리를 이루게 한 그 자랑스러운 역사들이 이어져 내려와 내린 결론이 ‘성전 문을 닫아라 더 이상은 너희 얼굴을 보기도 싫다’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 전 역사에 확실한 증거를 잡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성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의 가장 큰 비극은 일어난 기적, 즉 이미 손에 잡은 우리들의 축복들과 약속들과 특권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자가 아니요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이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롬 8:31)”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39-41)”
이 말씀은 소경과 소경 아닌 자가 있는데 소경 아닌 자를 심판하신다고 하였다. 이 말씀이 가지는 상징은 너희 중에 소경 아닌 자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무력한 삶을 벗어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사실이요 얼마나 대단한 기적을 통과한 것이요 우리에게 비교할 수 없는 자랑인가를 스스로 확인하는 길 밖에 없다. 이미 우리는 그 기적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거기에 초대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놀라운 이 반열에 선 것이다. 우리를 흔들 자가 없고, 방해할 자가 없다. 이것을 누리고 승리하고 감사하고 찬송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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