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도 알쓸잡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강해 중에서 은혜 위에 은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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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요 1:15-18
1. 오늘은 15절에서 18절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5절에의 말씀을 보니깐 세례 요한은 예수를 증거 했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증거 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증거 하는 것 그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실 때에 너는 세상에 가서 예수에 대한 증거 하는 삶을 살라고 보내신 것으로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과 저는 무엇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돈 벌고 세상적 즐거움을 누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예수를 모든 사람에게 증거 하라고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죽음을 앞에 놓고 감옥에 있으면서 디모데에게 부탁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1-2).
죽음의 순간까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예수를 증거 하는 일입니다. 어떤 개는 주인이 다른 사람과 말다툼하는 것을 보고 주인과 말다툼하는 그 사람에게 달려들어서 물어뜯었습니다. 물론 개의 주인은 그로 인해서 어려움도 당하고 물질적 손해도 봤겠지만 개로서는 자기를 먹이고 기르는 주인을 위해서 할 노릇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구원받고 은혜받는 성도들이 예수를 위해서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예수를 증거 하는 일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증거 하되 자기 혼자 속으로 증거 한 것이 아니라 외쳐서 증거 했다고 했습니다. 이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 하여 외쳐가로되, 소리 높여 외치는 세례 요한을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보게 됩니다. 이사야는 일찍이 세례 요한에 대하여 "외치는 자의 소리여"(사 40:3)라고 했습니다.
"외치는 자"는 세례 요한의 별명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자기 백성의 죄를 지적해서 큰소리로 외쳐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세상에 오셨는데도 영접지 않는 백성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쳐서 회개할 것을 독촉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에 대해서 크게 외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지금 자기가 증거하고 있는 예수에 대해서 거침없이 그리고 솔직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증거 하는 진리 되신 예수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열정적으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에도 확신을 가져야 하지만 특히 신앙에 대해서는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분들 가운데에서도 아직껏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신지 아닌지를 모르고 다니시는 분도 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히 하고 분명히 믿고 그 확신을 열정적으로 담대하게 죽음 앞에서도 증거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확신이 있는 분은 담대하게 큰소리로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 믿는 것이 부끄러워서 숨기는 분은 안 계십니까? 식탁 앞에 앉아서 기도드릴 마음은 간절하나 주위의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이 의식되어 기도드리지 않고 식사하는 분 없습니까? 혹 친구나 다른 사람이 여러분들을 향하여 "네가 예수를 믿느냐?"라고 물을 때 주저하지 않고 "나는 예수를 믿는다"라고 말합니까?
사도바울은 아그립바왕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에 자기의 간증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 말을 다 듣고 왕이 바울에게 "네가 나를 설득해서 그리스도인 되게 하려는 것이냐?"라고 말했습니다...."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은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왕 앞에 가서도 죄수의 몸으로 결박되어 서있으면서도 자기 목숨 살려달라고 자기 풀어달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에 대해서 증거 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세례 요한같이 사도바울같이 예수를 담대히 외쳐서 증거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의 내용을 살펴보시겠습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기 전부터 예수를 증거 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계시건 안 계시건 항상 예수에 대한 증거를 한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희를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것이요"(마 3:2-11).
이렇게 세례 요한은 곧은 원칙과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과 능력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영접하도록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정도 먼저 출생했고(눅 1:36) 사역의 시작도 예수님보다 먼저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막 1:14) 그분 예수는 나보다 앞선 분이고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고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고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분이고 그분은 크고 크신 분이어서 나는 그의 신발도 들 수 없는 형편없는 자라고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례 요한의 위대한 신앙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오직 예수 앞에서 자기라는 존재를 모든 면에서 인정하지 않고 예수만 위하고 존경하고 높이고 자랑하고 증거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왕 중의 왕으로 모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라고 했는데 예수 앞에서는 주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위대하고 존귀한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데는 주저치 않았습니다.
오늘날 어리석은 사람들 중에는 세상의 권세 좀 가졌다고 하나님을 비판하고 교회를 우습게 보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매우 안타까운 일이요,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아무 가치가 없는 자들로 밖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 깊이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마음으로 믿음의 생활을 하십니까? 사도바울은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롬 1:9)
내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순종하고 증거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하고 나는 그의 일꾼이요 전령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함께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이제 16절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더라" 충만하다는 말은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 말합니다. 그러니깐 수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어느 면에서 보든지 부족함이 없는 충분한 상태 완성된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뜻하는 바는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속성 전체를 갖추고 계신 부족함이 없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충만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말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충만함은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샘과 같습니다.
그분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충만합니다. 지혜도 충만하고 건강도 충만하고 기쁨도 충만하고 은혜도 충만하고 능력도 충만하고 물질도 충만합니다. 믿음도 충만하고 성령도 충만합니다. 평강도 충만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충만한 예수는 누구에게든지 모든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믿고 주님 앞에 주시기를 원하시거나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는 교만한 자에게는 결코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누구든지 예수의 충만한 데서 받은 축복이 있는 분들은 다른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것은 다 예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죄인이 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주님의 은혜이지요"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하고 기쁨과 확신 가운데서 사는 자가 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님의 은혜자요" 질병에서 고침 받은 성도가 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이것이 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실패와 좌절과 낙망 중에서 예수께서 주시는 소망을 얻어 승리한 자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충만한 데서 받은 경험이 있는 자는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란 무엇입니까?
1) 첫째는 이 은혜는 값없이 얻은 것입니다. 순전히 예수를 믿기 때문에 얻는 축복입니다. 잘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2) 다음으로 은혜 위에 은혜란 넘치는 은혜를 말합니다. 이것으로 넘치는 은혜입니다. 바다의 파도가 한번 밀려오면 그 뒤를 따라 계속적으로 밀려오는 것처럼 한 번의 은혜로 끝나지 않고 은혜가 파도처럼 계속적으로 주어진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옛날에 시골에서 명주실을 낼 때에 실이 나오기 시작하면 끊일 줄 모르고 줄줄줄 나오는 것을 보게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한번 주시기 시작하면 계속적으로 명주실 나오는 것처럼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번 여러분들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기 시작하면 끊일 줄을 모릅니다. 한번 교회 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시작하면 끊일 줄 모르게 이곳저곳에서 은혜를 찾아야 합니다. 은혜의 줄을 찾아서 잡아야 합니다. 요셉은 갑절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도 갑절의 은혜를 받는 이가 있습니다.
이 은혜는 풍성하고 풍성하기 때문에 받는 자는 부족함이 없이 만족하게 되고 이 은혜를 받는 가정은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게 되고 이 은혜를 받는 교회가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는 기적의 교회요, 부흥의 교회가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직장에도, 여러분의 사업에도 하나님의 은혜 예수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가 절대로 필요한 줄 압니다. 여러분들의 지혜와 인간적인 수단이나 방법에 너무 의존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시고 기대하셔서 직장과 기업이 새로운 번영과 하나님의 축복으로 발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은혜 위에 은혜란 말은 적은 은혜에서 많은 은혜로 작은 은혜에서 큰 은혜로 점점 하나님의 은혜가 확장되는 것을 말합니다. 욥기에 보게 되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욥 8:7).
이 말은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처음엔 보잘것 없었지만 나중에는 크게 번창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란 말도 바로 그러한 말입니다. 처음에 교회에 나오실 때에 어떤 분들은 매우 서먹서먹해합니다. 그래서 겨우 교회 안에 들어와서는 한 구석이나 뒷 갓 줄에 앉았다가 예배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머리를 들기 전에 밖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갑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여러 번 다니다 보면 차차 자리가 잡혀갑니다. 찬송도 입을 반쯤 벌리고 따라 부릅니다. 강단에서 봐도 좀 안정된 느낌이 듭니다. 뒷자리 맨 귀퉁이에 앉았던 분이 조금씩 앞으로 나와 앉습니다. 처음에는 주일날도 가끔 빠지던 이가 빠지는 횟수가 적어집니다.
그뿐인가요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증거 합니다. 한 사람을 전도해 오더니 두 사람, 세 사람 주일마다 전도해서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합니다. 주일날 자기 혼자서도 겨우 왔다가 살짝 가던 이가 다른 사람을 전도해서 같이 오고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 하려고 항상 노력합니다.
교회 생활만 그렇게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변합니다.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찾아왔습니다. 얼굴에 미소가 찾아왔고 말씨가 달라졌습니다. 절망의 말이 변하여 희망이요, 부정의 말이 변하여 긍정의 말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격이 달라졌습니다. 근본적으로 새 사람 중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발걸음도 희망찬 발걸음이 되었습니다. 그의 가정생활이 달라졌습니다. 그의 직장생활이 달라졌습니다.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고 죽음이 생명으로 변하고 썩던 것이 새 생명을 얻고 어두움이 빛으로 바꾸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처음에 이 사람에게 나타난 은혜는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끌려서 또는 마지못해서 교회에 겨우 와서 앉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를 변하게 하시고 모든 생활에서 변화를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얕은 데서 깊은데로 점점 더 깊은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정말 세상적이요, 육신적인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고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영적인 부요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남아있는 동안 예수와의 은밀한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아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런 삶을 가리켜서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말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아주 적은 은혜를 주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크고 더 크고 더 많은 은혜를 주실 징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신 분은 계속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큰 은혜를 기대하시고 그 은혜를 요청하십시오. 지금보다 더 놀랍고 큰 은혜를 반드시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한 가지 은혜만 받았다고 생각하는 분은 두 가지 은혜를 기대하기 바랍니다. 아무리 따져봐도 세 가지 은혜밖에 받은 은혜가 없는 분은 30개 300개 30,000개의 은혜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지속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증대합니다. 여러분들이 직분을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전보다 더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려고 할 때에 가끔 낙심이 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 힘껏 잘해보려고 노력하는데도 안될 때가 있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은 누구도 원망하지 마시고 은혜의 기름이 떨어진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는 것 아니요.
몸이 건강하지 않아서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는 것 아니요. 돈이 없어서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없어서 충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없어서 충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셨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은혜를 사모하지도 않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지도 않고 은혜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파도가 몰아치고 깊이가 수십 길이 되는 넓은 바다일지라도 배를 타고 가면 그 험난한 파도를 헤치면서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인생의 바다에서 70-80년 동안을 살려면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은혜에 배를 타야 합니다. 은혜의 배를 타고 항해하는 인생에게 순탄한 항해가 있게 되고 가다가 무서운 파도가 밀려온다 할지라도 잘 싸워서 승리할 수가 있게 됩니다.
3. 다음으로 17절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 말씀은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은 불완전하지만 예수를 통해서 주신 은혜와 진리는 완전한 것임을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르실 수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 광야에서 주신 율법은 무조건 복종만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통해서 주신 은혜는 복종의 관계보다 더 완숙한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어른들은 자녀들을 교육할 때에 아주 엄격하게 키웠습니다. 자녀들은 어른 앞에서 절대적 복종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의 말씀에 복종치 않는 것은 다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합니까? 부모와 자녀가 어릴 때부터 사랑을 마음대로 표현하면서 자녀들을 교육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부모의 뜻을 자녀들이 잘 이해하고 그 부모가 뜻하는 바대로 사랑 안에서 순종하면서 성장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어떤 교육이 더 좋고 행복한 교육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을 두려움과 위협과 벌칙으로 묶어져서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위험만을 주었습니다만(히 12:18) 예수를 통해서 주신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 것이어서 두려움이 내포되어있지 않고 사랑으로 가르치고 다스리기 때문에 재앙이 아니라 사랑과 구원과 축복입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즉 사랑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늘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그 뜻을 잘 헤아려 그 뜻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깨달은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해한 성도 여러분!
받은 은혜를 남에게 나누어주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깨달은 하나님의 뜻을 믿고 그대로 따라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도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어서 사시고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인 은혜를 베풀면서 살아가므로 은혜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히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이 은혜의 동산을 가꾸며 살아가는 은혜의 동산지기가 되시고 하나님의 뜻을 넓혀가는 복음의 일꾼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끝으로 18절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무슨 말씀이냐 하게 되면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품 안에 계시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말씀입니다.
창조이래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물론 광야나 산상에서 때로는 성전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 주시기는 했습니다 (출 30:2,사6:1-7,겔 1:28) 그러나 완전한 실체가 아니라 부분적인 환상이나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에 불과했습니다 (고전 13:12)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육안으로 직접 뵈오면 죽는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출 33:30,민4:20)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에 불과했습니다 (고전 13;12) 이스라엘 사람듬에게는 하나님을 육안으로 직접 뵈오면 죽는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출 33:30,민4:20) 이스라엘의 조상 모세도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율법을 받았다고 기록되어져 있으나 (출 33:17-34:9) 모세도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율법을 받았다고 기록되어져 있으나 (출 33:11,신34:10) 그역시 하나님을 직접 뵈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출 33:17-34:9) 모세도 하나님을 충분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출 33:18).
그런데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하나님의 실체를 똑똑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가리켜서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품속이라는 말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의 더할 수 없는 친밀함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또 예수께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 안에 거하면서 그 안에서 기뻐하고 항상 즐거워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품속이란 - 가슴속을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예수는 본성과 본질에서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말은 - 외아들, 독생자라고 말하지만 유일하게 태어난 아들 또는 유일하게 태어난 하나님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다 종합해 보면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도 신약도 모두 예수가 초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하신 말씀은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물질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거나 행복하게 하거나 평화롭게 못해 줍니다. 진정한 행복은(1) 하나님이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2)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아야 합니다. (3)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모두는 예수를 통하여 이러한 풍성한 은혜 아래에 살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같이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외치는 소리가 되어 흑암에 있는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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