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요한계시록 회개 설교말씀]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계 2:12-17)

복음의 능력 2023. 5. 30. 09:35
반응형

요한계시록 2장에서는 버가모 교회에 예수님이 편지를 보내고 있다. 버가모 교회는 발람의 교훈을 따라가는 자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는 회개하라고 했다. 만약에 회개하지 않으면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운다고 했다. 성도는 거짓 복음과 싸우고 회개할 일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계 2:12-17)

 

Ⅰ.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의 제목에 대해 살펴보자.

1. 이 편지의 수신인은 "버가모 교회의 사자"이다. 버가모는 "신 트로이(런던도 한때는 그렇게 일컬어졌던 것과 같이)라고 하며, 옛 트로이의 폐허 위에 재건된 도시였는지, 혹은 같은 이름의 다른 도시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버가모는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고 또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시사 복음적인 교회를 세우게 하신 곳이다.

2. 버가모 교회에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여기서 그 자신을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진 이(1:16), 그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는 이"라고 하신 바로 같은 예수님이시다. 각각의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앞부분에서 일컬어진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칭호들은, 각각 그 교회의 상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이 있다. 에베소 교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잠에 취해 타락해 가고 있는 교회를 일깨우고, 바른 길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는 "손에 별들을 붙잡고,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것 이상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수 없다. 버가모 교회에는 타락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의 신앙과 풍습을 타락시키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의 검으로 그들과 대항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그 자신의 칭호를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진 이"라고 하셨다.

(1) 하나님의 말씀은 검이다. 그것은 공격과 방비를 겸할 수 있는 무기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질 때 죄와 죄인들을 모두 베어버릴 수 있다.

(2) 그것은 "날선 검"이다. 그 검으로는 아무리 굳은 마음도 찔러서 상처낼 수 있다. 아무리 단단하게 묶은 매듭이라도 잘라낼 수 있다. 그것은 혼과 영을 구분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영혼과 어떤 관습들로 인하여 다른 영혼처럼 되어버리거나 또는 매우 중요한 요소처럼 보이는, 그런 죄된 습성을 분리시킬 수 있다.

(3) 그것은 "좌우에 날선 검"이다. 그것은 상하 좌우 어느 쪽으로도 찌를 수 있다. 거기에는 율법을 어긴 사람들을 찌를 수 있는 율법의 "칼날"이 있으며, 복음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찌를 수 있는 복음의 "칼날"도 있다. 거기에는 찔러 상처를 낼 수 있는 칼날이 있고, 그리고 곪은 상처를 파헤쳐서 낫게 할 수 있는 칼날도 있다. 이 칼날에서 피할 수 있는 곳이란 없다. 오른쪽으로 피해도 거기에 칼날이 있고, 왼쪽으로 피해도 거기에 역시 칼날이 기다리고 있다. 그 칼은 어느 방향으로도 찌를 수 있다.

Ⅱ. 제목 부분에서부터 편지서의 본론 부분으로 옮겨갈 수 있는데, 이러한 방법은 다른 나머지 모든 서신에서도 같다.

1.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가 당하고 있는 시련과 어려움에 대해 주목하고 계신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라"(13절). 하나님의 종들의 수고와 노력은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그런 수고를 했는가를 바르게 이해할 때 더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이 버가모 교회의 선한 활동에 대해 그 광채를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이 교회가 세워진 고장의 그 환경 때문인데, 그 곳은 다름 아닌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었다. 우리의 위대하신 주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에서의 우리가 얻는 모든 이점과 기회를 주시하고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에서 우리가 또 당하고 있는 모든 시련과 낙심의 조건들 역시 주시하시면서, 그것들을 크게 참작하여 주신다. 버가모의 교인들은 사단의 위가 있으며, 사단이 세력을 뻗치고 있는 곳에서 살았다. 사단의 "통치권"은 온 세상에 미치고 있었으며, 그의 "위"는 사악과 과오와 잔악함 때문에 악명이 높은 고장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도시의 로마 집정관은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적대시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의 핍박의 자리가 곧 사단의 자리였다.

2. 주께서는 그들의 견실함을 칭찬하셨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고,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 이 두 가지의 표현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아마 결과를 의미할 것이요, 그리고 후자는 원인 또는 그 방법을 말할 것이다.

(1) "너는 내 이름을 굳게 잡았다. 너는 나와의 관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내 이름으로 너희가 일컬어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아내가 남편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것같이 너희도 나의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이것을 너희는 너희의 영광과 특권으로 굳게 붙잡고 있다. "

(2) "너희를 이처럼 충실하게 한 것은 믿음의 은혜이다. 너희는 복음의 위대한 교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였으며, 기독교의 신앙에서도 떠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너희의 믿음을 굳게 지켰다. "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충실한 신앙생활에 영향을 끼친다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도 그들의 성실함, 그리고 하나님과 양심에 대한 충실함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나름대로의 충실한 신앙을 유지하려고 하는 이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을 파선시키는 암초 위에 그들의 선한 양심 역시 파선시킨다. 그런데 우리의 은혜로우신 주님은 그들이 살았던 장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살았던 시대적인 환경에 대해서도 그들의 신앙을 충실히 지킬 수 있도록 교회의 충실성을 증진시켜 주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그들 가운데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그들의 신앙을 충실히 지킬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누구이며, 그의 이름에 어떤 애매한 점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한 기록이 없다. 하여간 안디바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였으며, 그것 때문에 순교를 당했고,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그의 믿음과 충성을 그의 피로 보증하였다. 그리고 그 곳에 살았던 다른 나머지 신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보았지만, 그들 역시 그들의 용기를 읽거나 그들의 성실함을 저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것이 그들의 명예에 대해 추가해서 언급된 치하이다.

3. 주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태만을 책망하셨다(14절).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그리고 네게도 내가 미워하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들 가운데는 우상에게 받쳐졌던 제물을 먹는 것이 율법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며, 단순한 간음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했던 것처럼 부도덕한 예배를 통해 그들을 부도덕한 생활로 유인하는 자들이었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보자.

(1) 때로 영적인 불결과 육체적인 불결이 공존한다. 때로 타락한 교리와 타락된 예배는 타락된 교제로 사람들을 이끌고 간다고

(2) 이단사설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그들의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손쉽게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타락된 교리와 행동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 계속 사귐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것이며, 온 세상을 죄로 물들게 하는 처사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동참하는 자들이" 된다고 비록 교회가 그러한 이단 사설에 빠졌거나, 부도덕한 생활을 하고 사람들에 대해 육체적인 형벌을 내릴 권리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교회의 사귐에서 추방할 권리는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법을 정해 주신 그리스도께서는 그것 때문에 노여워하실 것이다.

4. 주께서는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16절).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살펴보자.

(1) 회개란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은 복된 의무이다.

(2) 회개는 또 개개인의 의무인 동시에 교회와 공동체의 의무이기도 하다. 함께 죄를 범한 자들은 함께 회개하여야 한다.

(3)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죄를 범한 사람들이 어떤 묵인 아래 그들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한 그러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회개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4)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의 타락된 지체들을 벌하실 때에는 그 교회가 그러한 자들과의 교제를 계속하는 것 때문에 그 교회 전체를 책망하시며, 온 사회에 대해 그의 책벌의 소나기를 쏟아부어 주신다.

(5)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점 이상으로 깊은 상처를 내며, 치명적인 손상을 주는 점이 또 없다. 말씀의 위력을 가지고 죄인들의 양심을 찔러 줄 수 있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 죄인은 자신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위협이 실현되면 죄인들은 도리어 멸망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검은 조만간에, 그들에게 확신을 주든지 또한 혼란을 가져오게 하든지 하기 위해 죄인들을 붙들고 계신다.

Ⅲ. 이 편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다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주적인 경각심을 환기시킨 뒤에는, 이기는 자에게 줄 커다란 은총이 약속되었다.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이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17절).

1. 감추어진 만나. 그리스도와의 사귐에서 얻어지는 그리스도의 영이 주는 영향과 위로는 시시각각으로 땅에 사는 인간들을 돕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늘에 사는 성도들과 천사들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을 땅에 사는 성도들이 미리 맛보게 하여 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만나가 감추어져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기쁨에 동참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만나는 지성소 가운데 있는 언약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

2. 흰 돌 위에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 흰 돌은 죄의 허물로부터 놓임을 받게 된 것을 말한다. 고대의 관습에서 형벌을 면제받게 된 사람에게는 흰 돌을, 형벌이 선고된 사람에게는 검은 돌을 준 것에서 유래되었다. 새 이름이란 양자로 들어가게 된 가정 즉 양가(養家)의 이름이다.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 사람은 그 양가의 성을 따라야 한다. 그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은 그가 양자로 들어간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그 사람도 언제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참고 견디면 그가 아들이 된 것과 상속자가 되었다고 하는 그 증거를 알게 될 것이다.

[신약 히브리어성경]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연못에서 치유(요 5:1-18)

 

[신약 히브리어성경]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연못에서 치유(요 5:1-18)

요한복음 5장에서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다. 이 사람은 혼자 물이 동할 때 못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이 병자를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성도

skh12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