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주일예배 설교말씀은 요한복음 6장에서 11장까지 사도 요한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들에게 복음의 떡을 주셔서 죄인들이 살아나게 했습니다.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흑암으로 어두웠던 곳에 빛으로 오셔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천 년 전 베들레헴에 이 땅에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며 빛으로 오셔서 영혼을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아기인가?(요 6-11장)
서론
이 아기는 어떤 아기인가? 그 대답들은 아래와 같이 무수하다.
● ”훌륭한 선생” - 그러나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말한 훌륭한 선생은 없다.
● ”훌륭한 모범” - 훌륭한 모범들은 남색가들, 주정꾼들과 파렴치한 정치가들 주변에서 서성이지는 않는다.
● ”광신자” - 그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한 광신자들도 없을뿐더러 그런 광신자들은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자기에게로 이끌지 않는다.
● ”종교 사기꾼” - 사기꾼들은 죽은 자를 살리지 못한다.
● ”가상의 인물” - 가상의 인물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릴 몸과 흘릴 피가 없다.
● ”신화” - 신화들은 연대표에 나와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아기는 대체 어떤 아기인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다! 이에 대한 이중적인 증거는 아래와 같다.
1. 지혜에 대한 증거(전지하심)
● 나다나엘의 증거(요 1:46-50)
● 사마리아 여인의 증거(요 4:16-29)
● 요한의 증거(요 2:24-25)
● 베드로의 증거(요 21:17)
2. 사역에 대한 증거
●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요 2:1-11)
● 병자를 고치시고 새 눈과 새 귀, 새로운 수족이 생겨나게 하심(요 5, 9장 등)
●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심(요 6:9-14)
● 나사로를 살리심(요 11:38-44)
오늘날 우리가 전할 메시지는 예수께서 요한복음에서 다섯 가지로 선언한 것임을 다음에서 보게 될 것이다.
생명의 떡(요 6:1-5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1. 배경(요6:1-34)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기적을 본 까닭에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무리들을 먹이셨었다. 다음 날, 무리가 다시 예수를 따르고자 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근본적인 것으로서, ”너희가 나를 따르는 것은 기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육신의 양식 이상의 것, 즉 영생을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라는 무리의 다음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대답하셨다(28-29절).
무리들은 예수에서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시는 것인 줄을 알았으므로 예수께 그 증거를 요구하였다.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조상들에게 먹였으므로 만약 예수께서도 자신이 선언하신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면 모세보다도 더 큰 기적을 행해야만 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래와 같은 네 가지 정확한 사실로 그들의 어리석은 유추(類推)를 일축하셨다.
1) 만나를 주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모세는 만나와는 조금도 상관이 없었다. 그는 단지 만나를 주어 모으라고 지시했을 뿐이고, 그나마도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었다(출16:14-16/요 6:32 참조).
2) 모세를 통해 준 것은 만나뿐이었다.
만나는 단순히 빵처럼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참된 생명의 떡을 주셨다(출 16:15, 31/ 요 6:35 참조).
3) 모세를 통해 준 떡은 육신의 양식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주시는 떡은 영적 생명의 떡이다(출 16:21상/ 요6:33, 54참조).
4) 만나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참된 떡은 온 세상에게 주시는 것이다(참조 16:32-35 /요 6:33 참조).
2. 선언(35절)
”...내가 생명의 떡이니...”
3. 조건(35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께서 요구하신 것은 오직 예수께 와서 그분이 주시는 떡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4. 결과(35절, 53-54절)
예수께로 가는 자는 만족을 얻는다. 하나님 아버지 집에서 먹었을 때는, 언제나 그들의 마음을 좀먹는 굶주림 대신 배부름을 얻게 된다. ”생명의 떡”은 아버지의 집에서만 얻을 수가 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먹으면 결코 주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생수(요 7:37-39 / 4:10-14)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1. 배경(37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
37절 첫 부분에서 우리는 배경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언급한 명절이란 초막절을 가리킨다.
1) 이 명절은 정규적인 명절이었다
이 명절은 일 년에 한 번씩 지켰다.
2) 이 명절이 기념하는 것
● 이 명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랑했던 것을 기념하였다.
●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그들을 보호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특별히 그들이 감사히 여긴 것은 아래의 사실들이었다.
(1) 이스라엘을 보존하신 것
(2) 만나와 물을 주신 것
(3)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
3) 의식(儀式)
이 명절을 지키는 데에는 다른 순서들을 압도하는 두 가지의 주된 의식이 있다.
● 행진(parade) - 레위기 23장 40절에 따라 구색을 갖춘 여러 나무에서 큰 가지를 취해 모아 사람들이 머리 위로 쥐고서는 장막이나 초막의 모양을 만든 다음, 성전까지 행진해 가서 제단 위에 장막을 짓는 것이다.
● 물 붓는 의식(pouring) - 제사장이 금으로 만든 약 1리터 들이의 빈 병을 들고 나타나면 그 빈 병에 물을 채워 넣기 위하여 실로암 못으로 행진해 간다. 제사장이 병에 물을 가득 채우고 나면 모든 사람들은 그의 뒤를 따라 수문(Water Gate)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성전 제단으로 걸어서 되돌아온다.
제사장이 들어설 때 모든 사람은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는 이사야 12장 3절을 암송하고 있게 된다. 그런 후에 레위 족속이 할렐(시 113-118편)을 찬송함에 맞추어서 제사장은 제단 위에 물을 붓는다.
이 전체의 의식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광야의 므리바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셨는가 하는 것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출 17:1-7). 제사장이 제단에 물을 붓기 시작하는 순간 예수께서는 서서 외치신 것이다.
2. 선언(37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여기서 ”외쳐 가라사대”라는 말에 주목하자. 헬라어에서 그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목청껏 외쳤다”는 뜻이다. 예수에서 외치신 까닭은 앞서 살펴본 배경을 참조해 볼 때 분명해진다. 제사장이 제단에 물을 붓고 있을 때는 음악이 울려 퍼지고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암송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격앙되어 있었다. 사실 예수께서야 말로 그 순간의 주인이 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온 이스라엘이 그분의 말씀을 듣도록 하시고 초청도 하셨다.
3. 조건(37절)
1) ”목마르거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막과 같아서 사람들은 애타게 마실 물을 찾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생수를 주신다.
2) ”... 내게로 와서...”
그리스도께 간다는 것은 사막 가운데 있는 사람이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물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온 마음과 뜻을 다하여 그리고 자기 자신의 발로 걸어서 그 사람에게로 간다는 뜻이다. 사막에서 물을 본 자는 그 물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3) ”... 마시라...”
오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들이 늘 물을 마시는 것은 아니다. 목이 마른데 물을 손에 담고만 있는 것은 소용이 없다. 그 물을 마심으로써 몸 안으로 흡수해야 하는 것이다.
4. 결과(요4:13-14)
생수를 마시면 영적인 기갈이 해소되며 영생과 죄사함과 소망, 사랑, 천국, 죄에서의 자유와 깨끗한 양심을 얻는다.
세상의 빛(요 8:12-20)
1. 배경(20절)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1) 연보궤
연보궤는 성전 안에 있는 「부인의 뜰」이라는 곳에 놓여 있었다. 벽주변에 트럼펫 모양의 연보궤들이 있었는데 각각의 연보궤는 특별한 세금이나 헌금을 위해서 설치되었으며 그곳은 늘 부산한 장소였다.
2) 때
때는 명절 이튿날이었다(요 7:37 /8:2 참조). 이 명절의 의식 가운데 두 번째로 두드러진 것은 성전 조명(Illumination of the temple)이라 알려진 것이었다. 이 의식은 밤에 부인의 뜰에서 거행되는데, 예수께서 바로 그곳에 계셨던 것이다.
● 기념 - 저녁 예식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던 빛을 기념하는 예식이었는데 그 빛이란 밤의 불기둥과 낮의 구름기둥을 말하는 것이다.
● 촛대 - 부인의 뜰 중앙에 거대한 촛대가 세워지면 명절 잔치가 계속되는 동안 매일 밤마다 그 촛대에 불을 밝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성전은 빛으로 환하게 되는데 그 빛은 성전 꼭대기로부터 발산되어서 마치 예루살렘 성 안에 다이아몬드가 깃든 것처럼 성전을 찬란히 밝히게 된다. 바로 부인의 뜰에 있는 이 촛대 곁에 서서 예수께서는 외치신듯하다.
2. 선언(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니....”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했던 빛을 기념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바로 그 빛이신 것을 선언하셨다.
3. 조건(12절)
”...나를 따르는 자는...”
예수는 우리가 그저 바라보는 데 그치는 빛이 아니라 따라가야 할 빛이시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이 「쉐키나」(Shekinah)의 영광을 바라만 보고 따르지 않았다면 결코 아무 곳에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4. 결과(12절)
”...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모든 사람은 무지(無知)라는 마음의 어두움, 죄라는 도덕적 어두움, 지옥이라는 피할 수 없는 어두움 가운데서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분을 따르기만 하면 영원히 빛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진리 곧 말씀을 우리에게 비추시고 가르치시는 성령을 주신다.
선한 목자(요 10:1-30)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세 가지 선언들(”생명의 떡, 생수, 세상의 빛”)은 모두 구원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0장의 선언은 그 성격이 다르다. 이 선언은 이미 믿고 있는 자들에 대한 그분의 보호와 연관이 있다.
1. 양떼를 돌보심(13-14절/ 요 14-18장)
1) 개인적인 관계
시편 23편 4하반절에서는 ”...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하였다. 이 구절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양떼가 우리로 들어갈 때 목자는 그의 지팡이를 써서 한 번에 한 마리씩 들어가도록 해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각의 양들에게 주의 깊게 돌볼 필요가 있는 부상이라도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만약 개별적인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목자는 그 양에게 붕대를 감아주거나 기름을 발라 주어서 상처를 진정시킨 뒤에야 지팡이를 들어서 우리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이처럼 각각의 양을 돌본다는 점에 있어서 목자는 양과 개별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2) 안전케 해 주심
요한복음 10장 7절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라”라고 하셨다. 따뜻한 철이 되어 양들이 우리에서 나와 언덕에 오를 때면 밤이 되어도 양떼들은 마을로 되돌아가지 않았었다. 이때 목자는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서 작은 양우리를 지어야 했다. 우리의 벽은 돌이나 진흙으로 쌓고 목자는 본문에서 말한 대로 문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입구에 가로누워 잠으로써 양떼를 짐승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일단 하나님의 우리 안에 들어가게 되면 문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안전케 보호하신다.
2. 양떼를 인도하심(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목자는 언제나 앞장서서 양떼를 인도한다. 목자가 뒤에 가서 양떼를 밀어붙이는 일은 없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인도하신다.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든지 예수께서는 늘 함께 하시며 통과해야 할 곳이 있다면 그곳은 이미 예수께서 앞장서서 지나가 계신 곳이다. 우리가 걸어가는 곳마다 그곳은 이미 예수께서 지나가신 곳이다. 단, 우리가 그분을 따를 때에만 그렇다는 것이다.
3. 양떼를 사랑하심(14절)
”...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사랑”이라는 말은 ”안다”는 말과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말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다”는 것은 몹시 친밀한 사랑이라는 말과 바꿔 쓰이곤 한다. 우리 신자들은 성삼위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다.
4. 양떼를 위하여 죽으심(11, 15절)
팔레스틴에서는 목자가 그의 양떼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다. 출애굽기 22장 13절에서 보듯이 양 한 마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되면 그 목자는 자신의 과오도 아니고 자신이 훔치지도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사체를 가져와야만 했다. 이 때문에 목자들은 양떼를 지키다가 자주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며 그분의 양무리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다.
부활과 생명(요 11:1-27)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1. 배경(1-24절)
예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난 뒤였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계셨다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 있었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부활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으나 마르다는 그 말씀을 오해하여 마지막 날 있을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바로 이 장면에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 것이다.
2. 선언(25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해 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벗어나셨으며 우리가 죽음에서 벗어날 길을 닦아 놓으셨다.
3. 조건(26절)
”이것을 네가 믿느냐?”
4. 결과(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 아기는 어떤 아기인가?
● 생명의 떡(요 6:35)● 생수(요 7:38)
● 세상의 빛(요 8:12)
● 선한 목자(요 10:14)
● 부활이요 생명(요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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