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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원어성경말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행 3:1-10)

복음의 능력 2023. 12. 2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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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신약 히브리어 원어성경 말씀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자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보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보면서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더니 앉은뱅이가 일어나 뛰어다니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행 3:1-10)

 

앉은뱅이가 일어섬(1-10)

 

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유대인의 제 구시는 지금의 오후 세시이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새벽, 오후 3, 저녁) 기도하였다고 한다. 두 사도는 오후 세시를 기도 시간으로 정해 놓고 매일 기도하였다. 고넬료도 제 구시 기도 시간에 기도하였다고 했다(10:3 참조). 다니엘도 하루 세 번씩 기도하였다(6:10 참조). 성도들도 하루 세 번씩 기도하면 좋으나 세 번씩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루 한번은 꼭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여야 한다. 하루 한번 기도할 때에는 새벽 시간이 제일 좋다. 부득이 새벽에 기도하지 못한 사람은 저녁이나 점심 시간에라도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1:35 참조). 우리도 새벽에 일어나 한적한 곳에 나가서 기도하는 것이 좋다.

새벽에 일어나 예배당에나 산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 좋다. 예배당에 갈 형편이 안되면 다른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여야 한다. 기도할 때에 시간과 공력을 많이 들여 기도하여야 한다. 적어도 하루에 두 시간 이상은 기도하여야 한다. 직장 때문에 바쁘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한 시간은 기도하여야 한다. 루터는 하루에 두 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은 날은 마귀에게 지는 날이라고 하였다. 기도를 안 하면 마귀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힘써 기도하는 생활을 하였다. 기도를 해야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머문다. 성도가 기도를 안 하면 충전되지 않은 밧데리와 같아서 빛이 희미해지고 힘이 약하여진다.

베드로와 요한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성전으로 간 것은 협동정신이다. 두 사도가 서로 마음이 맞고 협동이 잘 되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는 나이가 제일 많은 제자이고 요한은 나이가 제일 어린 제자이다. 이 두 사람이 함께 다니며 기도도 하고 하나님의 일을 같이한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다. 연령적으로 차이가 있고 두 사람의 성격이 모두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말고의 귀를 벨만큼 성격이 과격한 사람이고 요한도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여 그들을 불에 태워 죽이자고 할만큼 성격이 과격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성격이 다 죽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자기는 죽어지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에 초대 교회의 기둥과 같은 위치에서 두 사람이 합심하여 하나님의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여 나갔다.

이 두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갈 때에도 함께 갔고, 겟세마네 동산에도 함께 가서 기도하였다. 예수님이 잡혀서 심판 받는 자리에도 같이 갔고, 부활 후 무덤에도 같이 갔었다. 이 두 사도는 서로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며, 서로 봉사하며,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손이 맞아 항상 함께 다니며 일해 나간 것 같다. 성전에 올라갈쌔 그들은 성령으로 일하지만 계속하여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생활을 하였다.

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는 한번도 걸어 본 적이 없고, 인간의 힘으로나 인간의 생각으로는 걸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자이었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서 좀더 크고, 영원하고, 생명적인 것을 구하려 하지 않고 병신된 육신을 위하여 썩을 양식을 얻기 위해 성전 미문에 앉아 몇 푼씩 구걸하였다. 이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인가 ! 그는 육신도 가련하지만 심령은 더욱 가련하였다. 그가 만일 성전에 들어가서 영생하도록 있을 양식을 구하였더라면 영원히 굶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첫째, 성전에 오기는 했지만 성전밖에 앉아 있었다. 둘째, 미문이라는 아름다운 문에 앉아 있지마는 말할 수 없이 더럽고 비참하였다. 셋째, 생각하는 것이 물질이요 요구하는 것도 물질이었으니 물질과 같이 망하고 말 자이었다.

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죽은 자를 살펴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오직 썩을 양식을 위하여 한푼의 물질을 구걸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가련한 일인가.

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베드로가 요한을 쳐다보고 요한은 또 베드로를 쳐다보았다. 두 사도가 서로 바라보며 눈과 마음으로 통하고 그 앉은뱅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통하고 그에게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주자는 마음이 시선으로 통하였다. 그리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았다. 우리를 보라 이것은 사랑과 긍휼의 말이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사도들에게 역사한 것이다. 그 앉은뱅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그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자기들에게 있는 생명의 주 그리스도를 주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우리를 보라고 한 것은 소망을 가지라는 뜻이며 우리가 좋은 것을 너에게 줄 것이니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배부르고 부요한 자에게는 숨겨져 있고 가난한 자, 원하는 자, 목마른 자만이 받기 때문이다(22:17 참조). 그 사람을 건져내려는 사명감이 두 사도의 마음속에서 넘쳐 나왔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 때까지 하신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마음을 품은 것이다. 소자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소자 하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천사를 보내어 늘 돌보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앉은뱅이 된 불쌍한 소자 하나라도 간과하여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가 없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주고자 하는 책임과 사명을 느끼게 된 것이다.

병든 소자 한 사람의 심령이라도 어떻게 하든지 살펴보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의 것을 나누어주려고 하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일군의 심정이다. 잃어버린 양 하나를 위하여 여러 가지 고생을 무릅쓰고 찾으러 다니다가 그 한 마리를 찾으면 기뻐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또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이었다.

3: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앉은뱅이가 처음에는 두 사람에게서 돈이나 몇 푼 얻을까 하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볼 때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들의 얼굴과 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쏟아져 나오고 거룩한 모습과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을 보고 깨닫게 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 거룩한 분위기에 싸이게 되었다. 성령의 감동 속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3:6-7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두 사도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한 것은 그 앉은뱅이가 물질을 구하기 때문에 그 물질을 구하는 사상을 깨뜨려 버리려는 목적이 있다. 그 마음이 없어지기 전에는 참된 생명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 명을 먹인 다음 날, 더 많은 무리가 모여 온 것을 보시고 너희가 온 것은 표적의 참 뜻을 보고 온 것이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왔다고 하셨다(6:26 참조). 이것은 그들의 떡을 구하는 사상을 깨뜨려버릴 목적으로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심으로 그들이 다 물러갔다. 그리고 영생의 말씀을 깨달은 열 두 제자만 가르치셨다. 물질을 얻기 위하여 모인 자들에게는 영생의 말씀이 심령 속에 들어가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집사나 장로나 무슨 직분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그 생각을 깨뜨려 버려야만 진리가 들어갈 것이다. 물질을 통하여 사람을 모은 교회는 영생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는 물질로 한 몫 보고 물질을 가지고 운동하는 것이 아니다. 참 교회는 주와 그 은혜의 말씀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20:32 참조).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의 종은 물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만 전해 주어야 한다. 물질 문제를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만을 생명으로 받는 자들이 참된 성도요 참된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생명이요, 능력이요 지혜요, 구원이다. 전도자는 이 예수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고 그를 의뢰하고 그를 힘입어 영혼이 먼저 살아서 일어나면, 그 표적으로 그 육신의 병도 나을 수가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할 때에 이 앉은뱅이는 성령의 감동으로 무슨 거룩하고 신령한 것을 주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 들여 영혼이 살아났다. 또 걸으라고 하는 말을 힘을 써서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일어선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가 넘쳐 있었는데 믿음을 가지고 사모하는 그 앉은뱅이에게 그것이 역사하여 영과 육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만능의 역사가 일어나는 길이요, 하나님의 선물을 초자연적으로 받는 길이다. 그리하여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 때에 앉은뱅이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서 일어나게 되었다.

앉은뱅이는 두 사도와 함께 성전에 들어가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앉은뱅이가 일어서게 된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앉은뱅이가 믿음이 있는 증거는 바라보라 할 때에 순종하여 바라보았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할 때에 은과 금보다 더 좋은 것을 줄 것을 믿었다. 그리하여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손을 잡아 일으킬 때에 순종하여 벌떡 일어섰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할 때에 베드로가 자기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고 성령에 붙들려 하나님의 명령으로 한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쳐다볼 때에 이 사람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여 걷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았다. 이 사람을 일으켜 세우라는 감동이 오고 능력이 오고 역사가 오므로 베드로가 그대로 순종하여 말한 것이다. 그 때에 일어 설 수 있는 그 능력이 앉은뱅이에게 임했다.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거룩한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분명히 믿었다. 그리하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명령이 내려올 때에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였다. 그 때에 발과 발목의 뼈가 힘이 나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붙들어 주므로 벌떡 일어섰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신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께 잘 이용당하였고 앉은뱅이는 잘 순종하여 복을 받았다.

앉은뱅이가 일어서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명령을 그대로 받아 들여 순종할 때에 일어설 수 있다. 베드로와 요한도 결점이 많은 사람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실수를 하였다. 예수님께 십자가를 멀리 하라고 마귀 노릇하던 때도 있었다.

변화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서는 졸기만 하다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그 곳에 초막 셋을 짓자고도 하였다. 또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혈기가 나서 환도를 빼어 말고의 귀를 깎았다. 열 두 제자 가운데 혈기를 제일 잘 부린 사람이 베드로인 것 같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도 예수님 따라다니는 것을 포기하고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고 바다로 갔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도 실수가 있었다. 안디옥에 내려가 이방인과 같이 먹다가 예루살렘에서 형제들(유대인들)이 내려오니 안 먹은 체하고 돌아앉아서 외식을 하다가 바울에게 책망을 받았다.

실수가 많고 인간적으로 부족한 것이 많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주시고 종으로 쓰셨다. 사도들이 부족한 면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쓰신 면이 중요한 것이다. 모든 앉은뱅이가 이러한 방법으로 일어서야 한다. 교회 안에 믿음의 앉은뱅이가 많이 있다.

신앙으로 걸어가지 못하고 주저앉아서 믿음에 진보가 없고 달음박질을 못하는 사람이 믿음의 앉은뱅이이다. 믿음이 진보가 되어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힘을 써서 달음박질을 하여야 되는데 앉은뱅이가 되어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상태에 있으면서 몸만 예배당에 왔다갔다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신앙의 앉은뱅이들이 일어서려면 하나님의 능력의 장중에 붙들려 하나님께 이용당하는 베드로와 요한 같은 종이 필요하다. 베드로와 요한도 인간적으로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완전한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고, 아무리 완전한 것 같아도 반드시 결점이 있다. 로마3:10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였다. 성도가 완전한 사람을 찾아 교훈을 받겠다고 하면 마지막에는 미혹을 받게 된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내가 완전하다하면 그 사람을 따라가게 되어 미혹을 받는다. 사람은 누구나 다 부족하고 결점이 있다. 노아, 아브라함, 다윗, 요나, 엘리야와 같은 사람들도 다 결점이 많이 있었다. 인간적인 결점이 있더라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핍박 속에서도 모든 것을 믿음으로 통과시키면 하나님의 영권이 입혀진다. 또 하나님께 붙들려 하나님의 뜻대로 이용당하면 그 종은 훌륭한 종이다. 우리 성도는 은이나 금에 기대를 걸지 말고 더 크고 거룩한 것, 더 영원하고 더 참된 것을 소망해야 한다.

우리를 바라보라는 것은 위엣 것을 찾으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썩어질 것을 찾지 말고 썩지 않을 것을 찾고, 잠시 후에 없어 질 것을 찾지 말고 영원한 것을 찾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 안에 깊이 들어가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그를 힘입어 사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 “걸으라할 때에 그 말을 받아들여서 믿고 순종하여야 한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오른손을 잡아 일으킨 것은 그가 일어 서고자할 때에 도와 준 일이다. 오른손은 힘있는 손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를 붙들어 주고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나사로가 주의 명령대로 살아 나올 때에 수건을 풀어 준 것도 그를 도와 준 일이다.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앉은뱅이가 일어서서 제 집으로 가지 않고 성전으로 들어갔다. 나은 다음에 제 집으로 뛰어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쓸모가 없다. 이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따라서 성전으로 들어갔다. 신앙의 앉은뱅이가 일어선 다음에는 영적 성전 생활을 하고 좀더 깊은 지성소 생활을 하여야 한다. 앉은뱅이가 나은 다음 성전에서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앉은뱅이가 전에는 이렇게 기쁘고 즐거운 생활을 알지 못하였다. 과거에는 은전이나 금전 몇 푼씩 구걸하여 먹고살았는데 이렇게 좋은 세계를 새로이 발견했다. 이제 이 세계를 발견하고 보니 너무 좋아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성전에 들어가는 생활과 하나님을 찬미하는 생활을 하였다. 앉은뱅이가 나은 다음에 육신과 세상 중심 생활로 돌아가지 않고 신앙 중심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3:9-10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성전에서 그 사람이 그렇게 뛰며 기쁨에 넘쳐 찬송하는 것을 모든 백성이 보고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그 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인 것을 알고 심히 놀라며 어떻게 하여 낫게 되었을까 하고 기이히 여겼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는 인간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 결과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게 된다.

 

[신약 히브리어성경]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연못에서 치유(요 5:1-18)

요한복음 5장에서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다. 이 사람은 혼자 물이 동할 때 못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이 병자를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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