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알쓸잡

[에스더 7장 강해 설교문] 하만의 몰락(에 7:1- 8:8)

복음의 능력 2020. 7. 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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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알쓸잡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에스더 7장 강해 설교묹 중에서 하만이 몰락하는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만의 몰락

 

7:1- 8:8

 

 

지금 우리는 에스더서의 클라이맥스에 까지 왔습니다. 오늘 7장부터는 왕후 에스더가 베푼 두 번째 잔치 자리에 들어와서의 장면입니다. 지난밤 사이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만은 참을 수 없는 모욕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모르드개를 그렇게도 미워하고 그를 없애려고 온갖 계교를 다 썼는데도 하만이 오히려 모르드개에게 무릎을 꿇어 버리는 일을 지난밤 상이에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밤 사이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뜬 눈으로 새우고 한숨을 쉬고 있는데 왕궁에서 내시가 와서 왕비의 잔치 자리에 독촉을 하면서 데리고 갔습니다. 어제와는 딴판으로 도살장에 끌려온 소 모양으로 왕과 왕비 앞에 앉았습니다.

 

 

왕이 잔치 자리에서 먹고 마시며 기분이 좋아졌을 때, 다시 궁금한 마음을 왕비 에스더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에스더가 이틀이 지나도록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입을 열지 않으니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곧 나라의 절반을 달라고 해도 그대로 시행하겠노라이렇게 소청과 요구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면서 어떤 요구를 해도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

 

드디어 이제 왕후 에스더는 믿음과 용기를 다 모아서 왕 앞에 문제를 터트리고 있습니다.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 은혜를 입었으며 선히 여기시거든,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요. 또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라고 지혜롭게 말을 했습니다. 4절에는 거기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왕이 네 요구가 무엇이냐? 네 소청이 무엇이냐? 고 물었기 때문에 소청과 요구를 나누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해서 에스더는 자기와 자기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하나 에스더가 첨가한 것은 유대민족이 이렇게 진멸을 당하면 이것이 왕에게 유익이 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워낙에 성격이 급한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가 죽게 되고, 왕후의, 민족이 몰살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니까, 또, 그것이 자기에게도 조금도 좋은 일이 아니라는 왕후의 의견을 듣자 속에 있던 피가 끓어올랐습니다. 「도대체 그런 일을 꾸민 자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사실은 자기가 그렇게 만들어 놓고 자기가 한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악한 일을 꾸미는 사람들이 대개가 그렇습니다. 자기는 죄를 짓거나 악한 일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태연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왕후 에스더의 대답은 대단했습니다. 대적. 원수. 이 악한 하만! 이랬습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정리를 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이 에스더가 원래 그렇게 지혜로운 여자였는지 아니면 3일 동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혜를 주셨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두 가지가 다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워낙 총명한 여자인 데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지혜롭게 사용하셨기 때문에 왕 앞에서 자기 자신의 소청과 요구를 이야기하는데도 매우 머리를 쓰고 지혜롭게 하는 것을 봅니다. 주책없이 하지 않았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데서 실수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한다. 내가 열심히 일한다는 것에만 취해서 일을 순서를 뒤 바꾸고, 오히려 어렵게 만들어서 그르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에스더가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잘 살펴보았지요. 처음에 왕을 만나서 바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도 뒤로 미루면서, 잔치를, 마련하고 초청을 하고, 또 오늘도 잔치에서 왕의 마음을 달구어 놓고 드디어 일을 터트리는데도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지혜를 발휘합니다.

 

 

에스더는 자기의 생명과 자기 민족만을 살려 달라고 하지 않고 왕에게 유익이 없는 일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결국 이것은 왕의 마음에 결정적으로 분통이 터지게 하고 에스더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 말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에스더는 왕의 마음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하만과의 사이가 벌어지도록 만들었고, 자신에게, 대해서 왕이 더 신뢰하도록 하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이 시간에도 에스더는 자기 민족이 누구라는 것을 밝히지 않습니다. 아직도 유대민족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습니다. 자기와 자기의 가족과 자기 민족이 죽게 되었다는 것만 간곡하게 하소연합니다. 왕이 좀 지혜로운 사람 같으면 너의 민족이 누구냐? 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도 말려 들어가서 전혀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함께 장구치고 북치는 상황에 들어간 것입니다. 에스더가 왜 그러면 자기 민족을 대지를 않았을까?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유대민족이라는 것을 밝히면 왕이 충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이런 부분에서 배울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의 생긴 대로, 성격대로 함부로 떠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지혜를 가지고 사려 깊은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혜롭게 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지혜에 관한 책이 특별히 한 권이 들어 있고(잠언) 또 다른 책에도 많은 지혜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변에서 세상 사람들과 항상 접촉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하만이 얼마나 많아요. 우리 주변에 아하수에로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지요. 이런 사람들과 항상 접촉을 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나에게 이득이 있는 일이든, 내가 억울한 일이든지 어떤 상황을 만나도 지혜를 가지고 다룰 줄 아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통 보면 자기에게 조금만 손해가 생기면 예수 믿는 체면 다 벗어 놓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분통을 터트리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얼마의 돈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체면을 완전히 팔아 버리는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힙니다.

 

 

물론 정당하게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싸우느냐 하면 지혜롭게 싸우라. 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지혜를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를 얻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더가 왕 앞에서 하만을 고발할 때 얼마나 무섭고 단호하게 말했는지 세 가지 단어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대적, 이 원수, 이 악한 하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하만을 공격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보면 여자가 독하기는 독한가 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또한 얼마나 마음에 한이 맺혔겠어요. 또 에스더의 마음에 하나님의 백성을 몰살시키려는 하만을 볼 때마다 치를 떨었겠습니까. 그래서 당연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겠다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져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어떻게 원수라고 해서 이렇게 잔인하게 몰아붙이고, 잔인하게 그 최후를 마치게 하는 것인가? 여기에서 자비를 베풀 수는 없었을까? 설혹 왕에게 고발은 하더라도 하만이 생명을 잃지 않도록 배려할 수는 없었을까? 이런 문제를 가지고 에스더를 비판하는 성서학자들도 전에는 더러 있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고, 원수를 위해서 복을 빌라고 했는데 그렇게 독하게 했을까? 구약시대에도 원수가 주리면 먹을 것을 갖다 주고, 목마르면 마실 것을 주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상반되는 행동과 말을 하는 것일까? 하는 문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자기를 대적하는 자를 심판하실 때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손을 통해서 심판하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미워한다든지 원수들에게 보복을 할 때에는 이것은 하나님의 손에 사용되는 도구라는 입장에서 보복을 했지, 자기가 한을 풀지 못하는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복을 한 것이 아닙니다. 즉 이스라엘을 위해서 보복을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 원칙이 서 있었습니다. 이것이 구약 시댑니다.

 

 

그래서 시편 같은 데에 보면, 다윗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여, 저 원수를 멸하시옵소서. 저 원수의 자녀들이 한 사람도 장수하지 못하게 하옵시고, 모두가 구걸하는 걸인이 되게 하옵소서. 하는 기가 막힌 저주를 하는 것도 시편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 집의 남자는 늙어 죽는 자가 없게 하옵소서. 하고 잔인하게 기도하는 것도 봅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렇게 잔인한 말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나? 하고 생각을 하게도 됩니다만, 구약적인 입장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구약적인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사용되는 입장에서 모든 사건을 대했기 때문에 여기에는 인간적인 정이라든지 하는 다른 것이 개입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대단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우리는 보복 수단으로 삼지 않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에게 맡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에 우리에게 특별히 하나님이 주신 명령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이 점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에스더가 하만을 고발하니까 하만의 입장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왕이 에스더의 말을 듣자마자화를 이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 사람도 가출형이에요. 너무 열이 받쳐서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왕과 하만은 지금까지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왕의 오른팔이나 다름이 없는 사람이지요. 이렇게 가장 가까운 측근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에 그가 일시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밖에 나가서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만이 이때에 냉정하게 판단을 해서 행동을 하고 왕에게 자신의 입장을 조리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못 가졌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왕이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 바로 뒤따라 나가서 자초지종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왕이 이미 허락하신 일이고, 왕비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나도 모르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왕께서도 모르시지 않습니까? 왕에게 대해서 불충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또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일단은 순식간이 목이 날아가 버리는 일이 지연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만이 그렇게 처신 하지를 못했습니다. 아마 제가 볼 때에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하만의 분별력을 어둡게 하셨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하만의 하는 일이 절대로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변명할 용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가 떳떳하게 왕을 위하고 국가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고 한다면 자기 생명이 금방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할 말을 다 할 수 있었을 것이요, 자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소신껏 밝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체면 때문에 일을 벌이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일을 하니까 궁지에 몰리자 당황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을 짓을 해도 떳떳한 일을 가지고 생명을 걸어야지, 치사하고 유치한 일을 벌여 가지고 문제를 만들어 놓으면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하만에게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왕이 나가고 나니까 누구에게 생명을 구걸했습니까? 에스더에게 매달렸습니다. 참 기가 막힙니다. 앞에 엎드려 가지고 빌고 사정을 합니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사람의 행동은 계속 어리석음을 범하게 마련이고, 악한 자가 지혜로운 것 같아도, 세상에 곰보다 더 미련해지고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들어가는 것을 봅니다. 궁중의 법도는 철저한 것입니다. 왕궁의 먼발치에서라도 왕이나 신하들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장관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나라가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왕비가 앉은 의자에 손을 짚고 허리를 숙이고 있으니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때에 왕이 들어왔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왕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릅니다. 왕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만이 어리석었다는 이야깁니다. 가뜩이나 에스더가 잔치를 두 번이나 초대하면서 하만을 꼭 데리고 오라고 하니까 마음속에 은근히 뭔가 꺼림칙하게 생각을 했었는데 그 꼴을 보았으니 이제는 더 두고 볼 것도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왕으로서는 할 수 없는 정말로 막말을 했습니다. 내 앞에서 왕비를 강간하려고 하느냐?이제는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다. 옆에 있던 군사들이 순간에 달려들어 하만의 얼굴을 쌌습니다. 사형수에게 하는 행동입니다. 죽는 사람의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조그만 배려입니다. 인격에 대한 최후의 예의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인심이 돌아서 버렸습니다. 인간의 심리가 망하는 사람을 동정하는 법이 없습니다. 장사 안 되는 식당에 안 가는 것과 같습니다. 안 되는 사람은 끝까지 되지 말라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가 봅니다. 그 정도가 되었으면 옆에 사람들이 생명이라도 살려 달라고 해야 할 텐데, 오히려 한 신하가 나와 가지고 저 하만이 모르드개를 미워해 가지고 죽이려고 장대를 달아 놓았는데 고가 오십 규빗이나 됩니다(30m)고 일러바칩니다. 이것을 보면 하만은 자기 주변과 왕실에 자기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니까 숨을 죽이고 있었을 뿐입니다. 사람 짓을 해야 사람이 붙지, 짐승과 같은 짓을 하니까 사람들이 말을 못 해도 속으로는 다 등을 돌린 것입니다. 그 사람이 권세가 있을 때에는 그가 잘하든 못하든 간사하게 뭐 이득을 보려고 붙는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의 권세가 무너져 버리면 하루아침에 발가버겨져 버립니다.

 

 

왕이 그 말을 듣자 모르드개가 자기의 생명을 살려준 은인인데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당장 그 장대에다가 하만을 달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잠언 26:27절을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바로 그거예요.

 

 

그러므로 억울한 사람을 모함한다든지 하는 야비한 짓을 하는 사람은 결국은 그 함정에 자기가 빠져서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꼭 하만과 모르드개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소하고 감정적이고, 떳떳하지 못한 일에 조금이라도 악한 꾀를 가지고 함정을 판다든지, 장대를 세운다든지, 돌을 굴린다든지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안 믿는 남편이 혹시 그런 일을 벌인다고 하면 금식을 해서라도 한사코 말려야 합니다. 성경은 거짓말이 없어요. 결국은 자기가 빠지고 자기가 치이고 자기의 목이 매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런 일들을 가지고 금식하고 철야하면서 우리 남편이 바르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의 시대가 악해져서 세상이 타락해 가도 이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기도하는 성도가 없다는 이야깁니다. 그런 짓쯤은 얼마든지 해도 돈만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들이 아닌지 돌아보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하만이 그 장대에 달렸는데, 왕과 하만의 신뢰와 깊은 관계가 어쩌면 이렇게 썩은 밧줄이 끊어지듯이 끊어질 수가 있습니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정치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어제까지 그렇게 생명까지 내놓았던 동료와 주종관계가 하루아침에 끊어지는 것을 자주자주 봅니다. 그래서 정치라는 것이 더러운 것이고, 세상에 몸담아서는 안 되는 곳이 정치라는 말이 있지요. 그만큼 정치라는 세계가 원래 그렇습니다만, 왕과 하만의 관계가 이렇게 순식간에 무짜르듯이 잘려 버린 것을 보니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이 내린 것이 분명합니다.

 

 

불과 이틀 사이에 하만에게 일어난 일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한번 임하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악한자를 심판하시는 것이 가끔은 느린 것 같고, 어떤 때는 하나님이 심판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가 오해를 할 때가 있습니다만, 일단 하나님이 심판을 위해서 손을 대시기 시작하면 그것은 대단히 빨라서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시편 3735-36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니악인이 한 때 세력을 얻은 것이 얼마나 큰지 큰 나무를 보는 듯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지날 때에 보니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더라.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대단히 빠르게, 무섭게 철저하게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살 동안 참으로 이런 문제 저런 문제는 하나님이 심판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 우리 원한을 풀어 주셨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더디게 심판하시고, 어떤 때는 심판도 하지 않으시고 가만히 계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6:10절에 있는 대로 하늘에 있는 거룩한 영들이 하나님 앞에 주여, 언제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시겠습니까? 하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에 하나님은 조금만 더 기다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왕이 하만에게 한 태도도 정상이 아니지요. 아무리 하만이 큰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가장 심복이요, 신하 중에서 가장 높은 신하가 처형을 당하는 마당에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도 않고, 사실을 조사해서 확인해 보지도 않고 당장 나무에 달아 버렸다는 것은 왕치고는 참 형편없는 왕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왕이 이렇게 충동적으로 무슨 일을 행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하수에로 왕은 그런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보더라도 하만을 처리하는 데는 더 잘 그런 성격이 드러난 것 같습니다. 아하수에로 성격으로 돌리는 것도 옳은 것입니다만 누가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까? 왕이 지금 하나님의 손에 쥐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린 칼이지,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자기의 뜻대로 소원대로 다 하는 것 같지만, 우리가 볼 때에는 하나님에게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8장에 들어가면 이제 하만은 사라지고, 왕의 노가 풀어졌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살아남았고, 모르드개는 유리한 위치에 오르게 되었습니다만, 하만이 없다고 해서 왕명으로 공포된 법이 무효가 된 것은 아닙니다. 법이 그대로 살아 있어요. 이것을 어떻게 폐지시키느냐? 왕의 마음을 어떻게 돌려서 왕 자신이 내린 명령을 취소하게 하느냐? 하는 것은 에스더에게 달린 중요한 문제요, 참으로 이것은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왕이 자기가 내린 법이기 때문에, 하만의 꾀에 빠져서 도장을 찍었고 지금은 잊어버리고 있지만, 왕이 이사실을 알게 되면 자기의 명예와 권위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에스더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또 한 번 번득이는 지혜를 동원합니다. 무엇이냐 하면, 모르드개를 앞에 내세웠습니다. 8장에 들어가면 모르드개를 왕 앞에 소개하면서 자기의 사촌오빠라는 것을 비로소 밝히는 것입니다. 왕으로서는 더욱 기쁘게 되었습니다. 모르드개가 공로를 세운 것도 있고, 하만이 또한 없어져서 한편으로는 허전하던 차에 모르드개가 왕비의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고는 대단히 기뻐하며 하만의 지위를 그대로 계승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에스더의 지혭니다. 왕이 내린 법을 취소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자기 힘을 키워야 되고, 자기의 배후를 든든히 해야지 왕을 설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로 하여금 왕을 도울 수 있는 처리를 했습니다. 왕이 이것을 모르고 있지만, 그러나 에스더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착착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이제는 에스더는 혼자가 아닙니다. 든든한 모르드개가 있는 이런 위치에서 드디어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3절을 보면, 에스더가 또 한 번 모험을 한 것 같습니다. 왕이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대범하게 또다시 들어간 것 같습니다. 들어가서 이제는 자기가 유대민족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6절을 보면 어찌 내 민족의 화당함을...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오지요. 그리고 자기가 유대민족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왕이 꽤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설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페르시아의 전통으로는 포로로 잡아온 집의 딸을 왕후로 세울 수 없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대개 이해가 되는 말이지요. 왕후는 지체가 있는 집안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 왕의 체통이나 나라의 체면도 서는 일이니까요.

 

 

만약에 에스더가 포로로 잡혀온 유대민족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순간에 에스더를 아하수에로 왕이폐위시킬 가능성도 있습니다. 에스더는 자기 신분이 굉장히 불리하게 몰릴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만 살아남았다고 안심하지 않고,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권력과 자기들의 자기의 영광까지도 앞에 내어 놓고 왕에게 도전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3절 끝에 보면 울면서 구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나의 생명이 왕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처분만 바라겠습니다. 하는 것이지요. 역시 여자의 눈물을 강합니다. 그래서 왕이 약간 충격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4절을 보니, 에스더에게 금 홀을 내어 밀어서 에스더로 하여금 정식으로 이야기하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에스더가 왕이 내린 명령을 취소시켜 달라고 간청을 하자, 분명히 이 문제는 왕의 체면이나 권위에 관계되어서 중요한 문제인지 알면서도 앞뒤를 가리지 않고 금방 취소해 버리고, 에스더와 모르드개에게 일임해서 조서를 다시 써서 왕의 이름으로 공포하라고 허락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는 이 일에 대단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신중히 한 흔적이 있습니다. 페르시아 왕궁 안에는 하만이 내린 조서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기세가 등등해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바꾼다는 것은 상당한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1월 달에 유대인을 죽이라는 조서가 내렸고, 그 1월을 넘기지 못하고 하만이 죽었습니다만. 다시 그것을 번복하는 조서를 내리기 위해서 두 번째 조서를 내리는 것은 3월 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2달 동안 모르드개가 치밀하게 준비를 하고 시행을 했습니다.

 

 

, 여러분 한두 가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만과 같은 악한자에게는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놀라울 정도로 빨리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시편 37:10절에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 지라도 없을 지로다. 얼마 지나면 우리가 악인을 찾으래야 찾을 수 없는 깨끗한 심판을 하나님이 하시는 때가 올 것입니다. 언젭니까? 우리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땝니다. 우리는 그날을 바라보고 현실에서 아직도 권세를 휘두르며 선한 자를 압박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세계의 나라마다 있고, 우리 주변에 많이 있어서 괴롭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소망을 가지고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보복을 하려는 마음은 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구약시대에 사는 사람들처럼 보복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눅6:35절에,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 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클 것이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로 마음에 기억할 것은 하만이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부른 처음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시시하고 너무나 형편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문제에 걸려서 넘어졌으니, 하만은 어떤 사람입니까? 교만한 사람입니다. 너무나 교만했기 때문에 자기 교만의 콧날이 약간 다쳤는데도 감정 소화를 못해서 일을 벌여 놓은 것이 이렇게 엄청난 자기의 비극을 초래하고 만 것입니다

 

 

최초의 문제는 감정입니다. 교만에서 오는 감정처리가 잘못된 것입니다.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항상 우리는 감정! 그리고 못된 부분! 약점! 자주 실수하는 습관! 이런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다니엘을 모함하던 사람들도 제일 처음에 가졌던 문제는 악한 감정이었습니다. 감정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다니엘을 모함했습니다만, 그러나 다니엘이 빠졌던 사자굴에 자기들과 자기의 처자들이 함께 던져져서 사자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는 비참함을 우리는 봅니다. 하만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므로 여러분! 내가 교만합니까? 이 교만부터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 야고보서 4:6절에 약속한 그대로 교만하지 아니하면 조그마한 문제로 감정이 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만하면 조그마한 문제 때문에 감정이 상합니다. 그래서 큰 일을 벌이게 되고, 그것 때문에 결국은 자기가 망하게 됩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교만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아닐 문제가 교만하기 때문에 사소한 감정 하나 다루지 못하다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해를 끼치고 자기도 망하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이런 데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하수에로 왕도 자기가 약속한 소청을 남김없이 다 들어주시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소원을 얼마나 잘 들어주실까. 아멘! 눅11:13절에 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너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아하수에로 같은 왕도 왕후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약속을 해놓으니, 자기의 체면이니 자기의 권위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 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아하수에로 왕과 비교할 수 없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 얼마나 다 주시겠습니까? 믿습니까? 그러므로 에스더처럼 진지하게 간절하게 구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응답받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국가 대표 기도문] 나라의 위기와 축복에 관한 기도문

안녕하세요. 오늘은 국가 대표 기도문 중에서 나라의 위기와 축복에 관한 기도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전능하신 주님, 특별한 섭리와 경륜 속에 한 민족을 선별하시고 지금 시대에 이 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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