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알쓸잡

[에스더 9장 강해 설교문] 부림절(에스더 9:1-10:3)

복음의 능력 2020. 7. 9.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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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알쓸잡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에스더 9장 강해 설교문 중에서 부림절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부림절

 

 

에스더 9:1-10:3

 

 

오늘은 에스더서 강해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앞부분에 있었던 내용을 기억하면서 정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역사적으로 정말 의미가 있는 1213일 날이 돌아왔습니다. 아달월 1313일이라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날은 거의 10개월 전 하만이 유대민족을 멸족시키기 위해서 제비를 뽑아 얻은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로 망하게 된 유대인들이 오히려 살아나고, 유대인을 멸망시키려고 준비하던 사람들이 망하게 되는 기막힌 일들이 현실로 눈 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우선 유대인들은 하만의 열아들들을 잡아서 죽이고, 나무에 달았습니다.

 

 

왜 이 하만의 열아들을 이렇게 처치했을까? 하는 것은 우리가 추측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이 하만의 열아들들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어떻게 하든지 유대인들을 없애 버리려고 하는 반유대주의운동에 앞장섰던 주동자들이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눈의 가시처럼 생각하고 있다가, 드디어 1213일이 되자 누구보다도 먼저 하만의 10 아들을 처치한 것입니다. 하만의 집안은 아버지와 아들들이 모두 장대에 달려 죽는 수치스러운 집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집의 부인이나 딸들에 대해서 기록은 없습니다만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들을 성경을 통해서 보면서 참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무엇인가 하면 참 세상을 우리가 한번 왔다가 가는데, 잘못하면 집안이 이런 꼴을 당하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머리를 들 수 없는 인간으로 살다가 가는가 하면 아버지 때문에 그 자식들도 머리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로 세상에 왔다가 가 버리는 참 망신스러운 집안이 되기 쉽다는 것을 우리가 마음에 기억하면서 어떻게 하든 하만의 집안 같은 이런 집안이 되지 않도록 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마음속에 다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만의 열아들들이 처치를 당하고 수산성에서 이틀 동안 800명이 유대인을 통해서 살해를 당했습니다. 모두가 다 유대인을 증오하고, 유대인을 착취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전국에 7만 5천 명이 모두가 살해를 당했습니다. 이것이 9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하나님의 심판이 유대인의 손을 통해서 페르시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우리가 이 내용을 보면서 그대로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하만의 10 아들을 죽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15절 가서도 수산에 있는 사람들 300명을 도륙했지만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했다. 16절에 가서도 페르시아 전국에 있는 유대인의 원수들 7만 5천을 다 도륙했습니다만, 그 재산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똑같은 말을 3번이나 써 놓고 있습니다. 무슨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811절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를 치려하는 자와 그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아하수에로 왕이 유대인들에게 내린 명령에는 유대인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전부 다 죽이고, 그들의 재산까지도 다 탈취하고 소유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대인들은 사람은 죽이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했습니다.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슨 의도로 재산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을까? 또 그것을 특별히 3번씩이나 기록했을까?

 

 

페르시아 사람들, 또 아니면 많은 지구 상에 있는 다른 부족들과 비교해서 하나님인 백성인 유대인들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하는 점을 보여 주는 의도적인 행동이었다고 저는 봅니다. 당연히 사람을 진멸했으면 재산은 빼앗는 것이 당시의 상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정복을 당한 사람이나 나라는 가지고 있던 것은 송두리째 탈취를 당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다르며, 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예가 창세기 14장에도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재산도 전부 탈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이 자기의 사병 400명을 데리고 뒤로 추격해 가서 드디어 약탈자들을 정복하고, 조카 롯과 그의 가족과 종, 그리고 모든 재산을 되찾아가지고 돌아오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와 같이 자기들을 구원해 준 데 감사해서 소돔 왕이 사람만 나에게 돌려주고 모든 재산은 그대로 가지고 가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나는 그렇게 못하겠노라.

 

 

만일 내가 너의 모든 재산을 가지면 후일 네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부자 된 것은 나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 내가 재산을 주었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 할 테니,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적인 지조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은 모든 족속의 복의 근원이 되신다고 했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복을 받되 하나님의 손에서 받아야지, 어떤 사람의 손에서 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어서 수치요, 자존심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아마 이런 정신이 수산성을 비롯해서 페르시아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살아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비록 신상은 포로로 잡혀와서 죽지 못해 사는 입장에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축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우리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데 어찌해서 다른 사람의 재산에 손을 대서 남보기에 초라한 모습을 보이겠느냐? 하는 것이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좀 스스로에게 적용을 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교회 내에서 재산에 관한 문제, 돈에 관한 문제는 아직도 해결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잘하는데, 돈 문제에만 가면 본색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면에서는 전혀 흠을 잡을 수가 없는데, 재정적인 이해관계에만 부딪히면 인간적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말입니다. 참 이것은 크리스천으로서 보여서는 안 되는 모습이요,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루하루의 삶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을 미워해서 죽이려고 하만과 한 패가 되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권세가 있는 사람들이었고, 고관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재산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일확천금을 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을 다 몰살시키고도 재산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은 웬만한 결심을 가지고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사울 왕을 보세요. 왕이 되었는데도 돈에 대한 욕심은 버리지 못해서 하나님이 전부 다 멸하라는 아말렉 자손을 멸하지 못하고, 재산도 살리고 왕도 살려서 자기의 명예를 취하고, 배를 채우던 일들을 생각합니다.

 

 

20세기 황금만능주의가 판을 치면서 경제가 곧 부를 말하며, 경제가 힘을 말하는 이 시대에 와서 사람들이 전부다 돈의 노예가 되다 보니,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다른 것은 다 좋은데 돈 앞에는 신앙의 절개와 고매한 인격을 송두리째 팔아먹어 버리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제가 말씀드립니다. 몇 푼 안 되는 이해관계 때문에 이웃관계에서나 또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의 관계에서 뒤에서 욕하게 만든다든지 뒤에서 손가락질하게 만든다면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나라 사람들이 자기들의 원수를 다 멸한 다음에 드디어 절기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죽을 줄 알았다가 살아난 날을 기념해서 그 절기의 이름을 부림절이라고 붙였습니다. 부림절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24절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부림절이라는 이름은 부르라고 하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제비를 뽑는다」혹제비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유대나라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하만이 제비를 뽑아서 자기들에게 좋은 날이라고 뽑았던 12월 13일이 도리어 유대인들에게 행운의 날이 되었으니까 얼마나 의미가 깊습니까? 그래서 부림절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날을 기념하여 그들은 서로 잔치를 하고, 선물을 나누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을 살려주신 것을 영원히 잊지 않고 기념하기로 마음에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을 지키되, 그 당시에 일어난 사건들을 목격한 사람 만, 지키다가 끝나는 절기로 그치지 않고 대대로 지키기로 다짐을 합니다. 27절을 봅니다. 부림이라는 절기를 정한 다음에 뜻을 정하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각오를 단단히 하고 하는 말이지요. 자기와 자손과 자기들과 화합한 자들이 이 날을 지키기로 작정하고, 또 한 지방이나 도시에서만 지킬 것이 아니라, 각도 각읍, 각 집에서 대대로 이 두날을 기념하여 지키되, 이 불임일을 유대인 중에서 폐하지 않게 하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 날을 가문의 유산으로, 민족의 유산으로 남겨 주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것을 한번 기억하고 잊어버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망령된 일이라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자기들에게 주신 이 은혜는 자자손손이 이 날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손들에게 그날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 부림절의 영적인 의미는 22절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2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달 이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할 날이 되었음이라. 이것이 부림절의 영적인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부림절의 의미가 무엇이냐?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 날입니다. 누구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로 또 죽음이 변하여 생명이 된 날입니다. 죽을 줄 알았더니, 흥하게 되었습니다. 이거야말로 하나님의 손에서 온 축복이요, 하나님의 손에서 온 구원입니다. 이것을 영원히 기념하자 하는 것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다는 말씀을 보면서 생각나는 시편의 말씀이 있지요. 시편 30편으로 잠깐 넘어갑시다. 이 시편은 부림절을 노래하는 것 같은 인상을 우리에게 줍니다. 301절에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대적으로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아멘. 여러분 부림절을 통해서 하만과 그의 그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기뻐하지 못하게 되었지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모든 원한을 갚으려고 했지만, 그들이 모두 망하게 되었으니, 원수들이 기뻐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5절에 그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11절을 봅니다. 누가 이와 같이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했습니까?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띠띠 우셨나이다. 이것이 부림절입니다.

 

 

우리에게 이 부림절이 있습니까? 우리 개개인에게 이 부림절이 있어요. 저는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3번은 부림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망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거듭난 날은 영원히 살게 된 날입니다.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토록 이를 갈고 탄식해야 할 우리가, 영원히 찬송하고 영원히 기뻐해야 할 우리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중생받은 날은 우리에게 있어서 부림절입니다. 이 가운데서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서 중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은 아멘 해 보세요. 아멘 - 할렐루야.

자, 우리 모두는 내가 그 날을 기억하든, 그날을 기억하지 못하든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었든, 그런 것이 없었든 간에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날은 부림절입니다. 영원히 기억해야 할 날입니다. 죽었던 내가 살아난 날입니다.

 

 

또 있지요. 둘째는 우리의 육신이 죽는 날입니다. 우리에게서 생명이 떠나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요,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끔찍하고 슬픈 일입니다만, 사실 죽는 사람을 가만히 보면, 숨만 끊어졌다 하면 이것은 정말 기가 막힌 세곕니다. 그 앞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정말 기가 막힌 날이 아닙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육신이 떠나는 날은 부림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는 날입니다. 죽음이 생명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허무가 영원한 찬양으로 바뀌는 놀라운 날이 됩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이렇게 기가 막힌 부림절이 죽음을 의미하는 데도 믿는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죽음 다음에 나타나는 영광을 믿음으로 기대한다면, 하루빨리 죽었으면 할 텐데, 한 사람도 그런 사람이 없거든요. 아마 이것은 인간의 본능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일 것입니다. 만약에 이 본능이 없으면 아마 빨리 죽으려고 아우성을 치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어요. 그런데 인간에게 이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겨 주셔서 쉽게 죽으려고 하지 않고 악착 같이 더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죽음은 우리에게 영광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부림절입니다.

그다음에 또 우리에게 부림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실제 사건에서 부림절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망할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는 여러분, 경험이 있지요. 죽을 줄 알았는데 기가 막히게 회생하고 일어난 기적 같은 경험을 여러분 개개인이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 과거에 없었다면 앞으로 한두 번을 있을 것입니다. 눈 앞이 캄캄해서 이제는 마지막이구나. 생각했는데, 다음날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아멘하고 감격한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날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부림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부림절이 자주자주 찾아온다고 믿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축복입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살기 때문에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한 가지 모순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유대민족은 죽을 줄 알았는데, 살아난 1213일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그 날을 못을 박아 기념하기로 작정을 했는데, 오늘 우리 입장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일이 생기면 한두 번 정도는 기억을 하고, 감사헌금도 하고, 한두 번 정도는 생각하면서 특별한 기도 시간을 갖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감격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 동안 같은 은혜를 놓고 감격하는 예가 거의 없고요. 그것을 자자손손이 기억하도록 교훈하는 가정도 제가 볼 때는 거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보면, 제가 죽기 위해서 태어난 생일날은 감사하다고 생일 헌금은 쏟아져 나오는데, 중생한 날을 감사하다고 헌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혼한 날은 기념해서 특별한 감사를 하기도 하고 꽃꽂이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내가 그 기막힌 은혜를 깨달은 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한 그날! 그 은혜! 그것이 너무 기가 막혀 평생 동안 잊을 수 없어서 그 날을 해마다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예물을 드리는 사람! 거의 못 보았습니다.

 

 

이것이 모순인 것 같아요. 여러분, 이 부분에는 우리가 한번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잊어버리지 아니할 것을 끝까지 붙들고, 대대손손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이 축복을 찬양하기를 원하고 있는가? 아니면 별로 중요하지 아니한 것을 손에 쥐고, 날마다 해마다 감사하고 있지 않는가?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감사의 내용을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주신 축복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는 사람은 좋아하십니다. 잊어버리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이것은 성경적입니다. 잊지 않도록 힘쓰십시다.

 

 

그다음에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10장 마지막에 보면, 유대인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고, 유대인 중에 존대하여 그 허다한 형제에게 괴임을 받고, 그 백성의 이익을 도모했다.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약 21년 동안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모르드개는 중반기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죽임을 당하는 때까지 계속했는지 중간에 그만두었는지는 모르지만, 모르드개가 총리가 되어서 굉장한 권세를 휘두르게 된 것은 분명히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모르드개에게 권세를 주시고, 에스더에게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시간 기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414절에 가면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네가 왕후가 된 것이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했는데, 아니냐? 가 아니라 바로 그때를 위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위기를 당할 때, 하나님이 에스더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에스더에게 왕후라는 막강한 자리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을 우리가 검토해 볼 때에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세상 정치적인 어떤 권세를 주실 때는 반드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판단하기로는 하나님이 정말로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세상에서 권세를 주시지 않는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정치적인 세계는 너무나 더럽고, 정말 하나님이 보실 때에 증오하실 수 있는 부분이 많은 것이 정치곕니다. 그러므로 정치가가 된다는 것은 신자들에게 상당한 모험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권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부패하도록 되어 있고, 권세를 쥐고 흔드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 부패도는 증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수천 년의 인간의 역사가 증명하는 법칙입니다. 부패하지 아니한 권세가 하나도 없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유대인의 위기는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생겼습니까?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생겼습니까?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것은 정치적인 문젭니까? 종교적인 문젭니까? 종교적인 문제지요. 하나님에게만 절해야 하는 내가 왜 인간에게 절을 하느냐? 나는 하나님만 받들고 하나님만 경배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이 긍지 때문에 인간에게 절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유대인에게 위기가 왔습니다. 유대인들이 핍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와 모르드개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이 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또 주님께서 마태복음 5장 11절에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나 때문에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모든 악한 말을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만 경배하고, 하나님만 섬기며 모든 삶의 원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오고, 모든 삶의 궁극적인 종착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고집하면서 오직 신앙 일변도로 이 세상을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반드시 작고 큰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백성인데도 세상 사람들에게 전혀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더 좋아한다면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동류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빛과 소금의 생활로 무엇인가 다른 것을 보여 주려고 하면, 그들로부터 어떤 정신적인 압박이 올 수 있고, 구체적인 어떤 핍박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신앙 문제 때문에 항상 모르드개와 하만이 충돌하듯이 오늘 우리도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투를 할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 합니다. 모르드개와 같이, 에스더와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일사각오의 자세를 가지고 우리가 신앙생활하지 아니하면 잘못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웅덩이에 빠지고 맙니다.

 

 

또 하나 우리가 정리할 것이 있습니다.

에스더서의 주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섭리 놀랍고 영광스러운 섭립니다. 에스더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처음부터 마지막부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그의 살아가는 백성을 끝까지 인도하고 계시는 것을 우리가 지켜보게 됩니다. 그래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는 극적인 장면을 우리는 눈 앞에 역력히 그려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오늘 이 하나님 여기에 계시고,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인생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모두의 인생을 섭리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스더서에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지 아니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현실에 하나님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손은 변함없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것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한번 세상에 왔다가 가는데, 이 한 번의 인생이 하만과 같은 인생이 되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유치하고, 쩨쩨하고, 아니꼽고 그야말로 사람 같지 아니한 인간이 되어 살다가 자기도 망하고, 자기의 가문도 망하는 이런 비참한 존재가 되지 말고, 에스더와 모르드개처럼 꿋꿋하고, 뜻이 있고 분명히 살만한 가치가 있어서 사는 사람이 되어서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누구를 경외하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고, 오직 그 분만 순종하려고 하는 이 자세가 흐트러지지 아니할 때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사람답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와 같은 은혜를 받으면서 남은 여생을 살고, 또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부림절의 기적이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여호와 하나님만 높이고 경배하는 자를 반드시 복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생을 힘 있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역대상 1장 강해 설교문] 소중히 기록된 이름들(대상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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