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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 하나님 말씀] 베드로와 요한이 심문받음(행 4:5-14)

복음의 능력 2023. 1. 12.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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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았다. 예수님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았다. 이런 와중에도 베드로는 복음을 전파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했다. 구원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없다.

 

베드로와 요한이 심문받음(행 4:5-14)

 

우리는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전하고 그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으므로 유대교 법정에서 재판받는 기사를 보게 된다. 그것은 기사들이 하나님에게나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봉사였는데 범죄로 고발당하였던 것이다.

Ⅰ. 재판이 시작된다. 이 사건을 다루기 위해 소집된 특별 재단인 것 같다. 상세히 고찰해 보자.

1. 재판이 시작된 시간(5절). 그리스도가 그들 앞에서 재판받을 때처럼 밤이 아니고 "아침"이었다. 아마도 전번 경우처럼 이 고소도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인 것 같다. 마음이 관대해졌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다만 내일까지 연기한 데 불과하였다. 어서 속히 그들은 사도들로 침묵을 지키게 하고 싶었고 공연히 시간을 허비하려 하지 않았다.

2. 장소는 예루살렘이었다(6절). 예수가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그가 그곳에서, 그들 앞에서 고난을 당한 것처럼 그들도 어려운 일들을 겪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예루살렘에서 구속이 도래하기 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속을 기다렸던가. 그러나 이제 구속이 임하였는데도 이를 바라지 않는 것은 그들의 죄를 더욱 가중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하여 신실한 도시가 창기의 소굴이 되었는가! (마 23:37) 예루살렘이 찬란히 빛나며 서 있는 광경 앞에서 예수님은 그 도시를 보시고 우셨던 것이다.

3. 법정의 재판관들.

(1) 그들의 일반적인 특징. 즉 그들은 "관헌"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었다(5절). 서기관들은 학식 있는 사람들로서 사도들과 변론하려 왔고 그들을 논박하여 일언반구도 못하게 하기를 바랐다. 관헌들과 장로들은 권세를 잡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이 답변을 못하면 그들이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근거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만약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았다면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저지하려던 자들은 세상에 학식이 있는 자들로 서기관들이 모였고 권세 있는 자들로 장로들의 법정이었기 때문이다.

(2) 그들 중 몇 사람은 저명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이 박해의 주모자였던 안나스와 가야바였다. 안나스는 산헤드린 회의 회장이었고 가야바는 대제사장인 동시에(본문에는 안나스가 대제상으로 불려지고 있지만) "재판정의 원로"였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일 년 간 서로 교체하여 대제사장직을 맡은 것같이 보인다. 이 두 사람은 그리스도를 적대한 주동적 인물이었다. 당시 가야바는 대제사장이었고 안나스도 현재 직책을 지니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둘 다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하여 추악한 짓을 하였다. 본문의 한 인물 요한은 안나스의 아들로서 여겨지며 요세푸스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잘 알려진 인물로 묘사된다. 이외에도 대제사장에게 의지하며 그에게 기대를 갖고 사는 그의 문중들이 다 모여 대제사장이 말하는 것을 지지하고 사도들을 반대하여 투표하려 하였다. 옳지 않은 것은 아무리 큰 친척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비웃음만 살 뿐이다.

Ⅱ. 죄수들이 법정에 소환되었다(7절).

1. 그들은 법정 앞에 끌려 나왔고 "그들을 가운데 세워 놓았다." 산헤드린 회의 장소는 원형이었고 그러므로 법정에 볼 일이 있는 사람은 그들 가운데 앉거나 섰다(Dr. Lightfoot)(눅 2:46). 그러므로 "악인들의 모임이 나를 둘러쌌나이다"(시 22:16).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나이다"(시 118:12)라는 성경 말씀이 응하였다. 그들은 적에게 둘러싸여 앉혀졌다.

2. 그들이 물은 질문. 그것은 다음과 같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를 행하였느냐"라고 묻는다(그들은 주님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였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느뇨? 마 21:23). 질문은 계속된다. "누가 너희에게 이러한 교리를 가르치라고 명하였는가. 또 누가 이런 기적을 행하도록 너희에게 권능을 주었는가. 우리가 너희에게 그런 일을 명령도 허락도 안 하였으므로 근거를 대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라고 힐문한다. 어떤 이는 생각하기를 이렇게 질문한 것은 기적을 행할 때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관습에 근거한 것이라 한다(19:13). 유대 나라의 귀신 쫓는 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곤 하였다. 그러므로 이들 재판자들은 제자들이 병 치료할 때 무슨 이름을 사용하는지 알았고 그들이 설교할 때 전제하는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그들은 사도들이 예수와 그리고 그를 통한 죽은 자의 부활과 병고침을 전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2절). 그렇지만 그들은 사도들을 괴롭히기 위하여 질문하였고 그들에게서 범죄적인 단서를 잡아내려고 노력하였다.

Ⅲ. 그들이 행한 변명. 변명한다고 해서 자신들의 결백을 밝히고 안전을 도모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스승 이름을 들어내고 그에게 명예를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주님은 그들이 총독들과 임금들 앞으로 끌려갈 것과 그러므로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지겠고 그것이 "그들에게 찔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막 13:19).

1. 이 변명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이루어졌다. 성령은 베드로를 이 사건에 직면하여 전보다 더 강하게 인도하셨다. 사도들은 자신의 보호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이런 때 어떻게 할 것을 지시하신 대로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또한 이때에 주시겠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성령께서 "그들이 말할 시간에 말할 바를 얻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필요할 때를 아시고 신실하게 우리를 변호하신다(막 13:11).

2. 이 말씀이 주어진 것은 베드로에게였다. 그는 아직도 사도들의 대변자로서 "백성의 관헌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같은 법정의 재판자들에게 스스로를 변명하였다. 왜냐하면 권세를 지닌 그들의 악함을 말함으로 권력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권력을 다시 성찰케 함으로써 그들에게서 악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관헌과 장로들이니 시대의 징조에 대해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너희의 직책상 반대할 것이 아니라 너희가 메시아 나라로 받아들이고 앞장서야 할 것이 아니냐.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관헌들이요 장로들이므로 너희가 그들을 잘못 인도하여 실수하게 하면 너희가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리라"라고 말한다.

3. 무엇을 변명하였는가. 그것은 변명이라기보다 엄숙한 선포였다.

(1)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였다는 것이 재판식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었다(9, 10절).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만약 우리가 심문을 받고 범죄자로서 답변을 요청하고 그것이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 때문이라면, 이것이 구금의 원인이요 고소할 문제라면, 그리고 그가 무슨 방법으로 누구에 의하여 온전하여졌는가 묻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답변할 수 있도다. 즉 백성들에게 말한 것으로 되풀이하여 말하겠노라. 이 일에 대하여 모르는 척하는 너희들 또한 너희뿐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아, 이것을 알라. 이것은 너희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이니 존귀하고 권세 있으며 압도적인 이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하여, 즉 너희가 멸시하여 나사렛 예수라 칭하고 너희 관헌과 백성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하느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사 가장 높은 존귀와 위엄을 수여하신 바로 그분에 의해 이 사람이 온전하여 너희 앞에 선 것이라. 이는 주 예수의 권능의 표적이라"라고 말한다.

①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의 무리가 앉은뱅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행한 것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선한 일이었다. 그것은 생계유지를 위해 일할 수 없는 구걸하고 있는 사람에게 친절한 행위였다. 그것은 또한 성전과 성전으로 예배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이 거지가 구걸하는 시끄러운 소리에서 자유롭게 하였으므로 도움을 주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 선한 행위 때문에 고소되었다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도다(벧전 2:20; 행 4:14, 16). 이 일로 인하여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이 오히려 수치를 느껴야 하리라"라고 말한다. 선한 사람이 선행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즉 잘하고도 처벌을 받는 것이 기독교인의 운명이다.

② 그는 이 놀라운 일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 "이 사람이 치료된 것은 우리의 권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해서니라"라고 말한다. 사도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거나 법정에서 좋게 보이려고 기적에 의해 자신을 나타내려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상관없도다. 다만 주님만이 높임을 받을지어다"라는 태도이었다.

③ 그는 재판석에 앉은 사람들 자신을 고발하여 그들이 예수의 살인자이었다고 한다. "그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도다. 그런 즉 너희가 무엇이라고 답하리오"라고 말한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서(그가 목적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에게 죄에 대해서, 다른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양심을 찌를 수밖에 없는 죄인 그리스도를 죽게 한 데 대해 확신시키려 한다. 그들이 행한 바를 인정시키기 위하여 베드로는 한 사실도 빼놓지 않고 그들에게 말한다.

④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를 위해 그리고 그의 박해자들을 향하여 확고한 증거로 내세운다.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도다. 그들이 그의 생명을 취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생명을 주셨도다. 그러므로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아무리 반대하여도 소용없도다"라고 한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며 그들이 백성들을 기용하여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그를 훔쳐갔다"라고 어리석게 유도한 짓을 부끄러워 말고 시인하라고 한다.

⑤ 그는 이 사실을 방청인들에게도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에 의하여 모든 이웃들에게도 이 말이 처져 각양각색 사람들 즉 높은 자에서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이 사실을 알게 하려고 했다. 즉 이런 말이다. "여기 참석한 모든 사람들아 이 사실을 아시라. 그리고 각자 돌아가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게 하라. 너희가 이 사실이 전하여지는 것을 막고 억누르려 아무리 애써도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아심으로 온 이스라엘도 이 기적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졌는데 이 이름은 장식품으로 불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한 뜻의 계시로써 그것을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될 것이라" 말한다.

(2) 그 이름의 권위로, 그들이 행한 이 예수의 이름에 의해서만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 이제 그는 특별한 사례를 떠나서 이 신앙이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와 그들이 행한 기적에 의해서 세워지도록 계획된 특수 종파나 파당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신앙도 유대인들 가운데 있는 철학자나 이와 같은 부류의 이단과 같이 마음 내키는 대로 참석도 하고 떠나기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신앙은 인정되고 확인된 거룩하고 신적인 것으로 설립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은 관심을 기울여 복종해야 하며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이름을 믿고 부르는 것은 무관심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①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의 섭리에 따라서 그 이름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11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 즉 교회의 건축자들이 되어야 할 너희 백성의 관헌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버린 돌이라. 교회는 하나님의 건물이기 때문에 마땅히 너희가 교회의 건축자들이 됐어야 할 것이라. 여기 너희에게 머릿돌이 주어졌나니 건물의 튼튼한 기초가 되어 거기 중심 기둥이 세워지고 그 위에 모든 건물 골조가 세워져야 했으나 너희가 이 돌을 버리어 제해 보리고 쓸모없는 돌로 던져버려 거침돌이 되었도다. 그러나 이 돌이 이제 머릿돌이 되었도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거부한 이 예수를 세우사 그의 우편에 앉히시고 그를 모퉁이 돌과 머릿돌로 쓰시어 통일을 이루는 중심점이 되게 하시고 능력의 원천으로 삼으셨느니라"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본문에 이 인용문을 택한 것은 얼마 전에 그의 귄위에 관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질의에 대한 답변으로 그리스도 자신이 이를 사용했기 때문인 것 같다(마 21:42). 성서는 우리의 영적인 투쟁에서 믿을 만한 무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안내자로 삼아야 한다.

② 우리는 그 이름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므로 감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이름을 안식처로 삼지 않고 우리의 도피처와 강한 성으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타락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의 없고 우리가 전적으로 구원받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타락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2절).

즉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병든 몸을 고칠 다른 이름이 없듯이 죄진 영혼이 구원받을 다른 이름이 없는 것이다. "오직 그로 말미암아,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은 소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다른 종교는 없다. 모세가 전한 종교도 이제 예수의 가르침이 선포되었으므로 이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고는 구원이 없는 것이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도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다음 사실을 더 살펴보자.

첫째,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중요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즉 진노와 저주에서 피하여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이것이 늘 마음 가까이 있어야 한다.

둘째, 우리의 구원은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거나 자신의 가치나 능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파괴케 할 수는 있으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없다.

셋째, 사람들 가운데는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인 척하는 많은 이름들이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여러 종교들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회해와 상호 교통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가장하나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넷째,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에 의해서만이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하나님으로부터 바랄 수 있고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 된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닌 명예로 그 이름만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에게 말할 때 간구할 유일한 이름인 것이다. 이 이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이 이름을 선택하셨고 그러기에 이 이름은 우리에게 자유롭게 수여된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인 것이다. 이 이름은 "하늘로부터" 주어졌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위대한 이름일 뿐 아니라 천하에서도 큰 이름이다. 왜냐하면 그는 천상계와 지하계에서 모두 권세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그러기에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 가운데" 주어졌다. 우리는 "우리의 의이신 주님"의 이름에 의해 구원받아야 한다.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모르고 그에 대한 실제적인 신앙도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인가. 이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빛으로 살 수 있을까는 우리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은 알아야 한다. 어떤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랑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덕택이요 다만 그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변함없이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곧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사 45:4)는 말씀의 뜻이다.

Ⅳ. 재판정에서 기소한 조항은 이 변명으로 무의미하게 되었다(13,14절). 이제 그리스도께서 하신 약속 즉 "그가 그들에게 말과 지혜를 주리니 그들을 고소하는 자가 반박하거나 부정하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1. 그들은 앉은뱅이가 치유된 사실이 좋은 행위인 동시에 기적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치료에 대해 증언하기 위하여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서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반증하거나 비난하므로 "논박할 수는 없었다"(14절). 또 마침 안식일도 아니었었다. 안식일이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근거로 말하였을지도 모른다.

2. 그들은 그들의 거만함과 권위로 베드로와 요한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이 제사장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하여 얼마나 극악하게 피맺힌 원수처럼 여겼는가 하는 것과(이 사실은 그리스도를 위해 얼마나 겁먹은 소심한 마음으로 그를 변호했는가, 특히 베드로 그는 계집종이 두려워 그를 부인까지 하였는데 이제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히 증거 하는"(13절) 이 모든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이 사도들을 굴복시키지 못한 것은 앉은뱅이 치료 못지않게 기적이었다. 아마 그들의 모습이특이하고 놀랄 만한 어떤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관헌들에게 겁을 먹고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 앞에 담대하였다. 그들의 이마에는 위엄이 서렸고 그들의 눈에는 광채가 있었고 그들 목소리에는 공포를 주지는 않았지만 명령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예언자들처럼 그들의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다"(사 50:7; 겔 3:9).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신실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의 용기는 흔히 그들에 대한 잔악한 핍박자로 당황케 만든다.

(1) 그들의 놀라움이 커감을 볼 수 있다.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그들은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또 스스로 이들에 대하여 물어보고 그들이 천한 출신으로 갈릴리에서 태어나고 나면서부터 어부였고 교육을 받은 것도 무슨 고등 교육의 혜택을 받지도 못하였고 랍비들의 근처에도 접근 못하였음을 알았다. 그들은 이들이 법정이나 또는 여러 모임에 대해 정통하지도 못하였고 자연철학이나 수학이나 정치학에 대해 그들과 얘기를 나누어 보면 아무것도 알지 못함을 쉽게 알 수 있는 그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메시아와 그의 나라에 대해서 말을 시키면 그들은 분명히 증거를 대면서 확신 있게 적절하고 유창하게 구약 성서를 알맞게 인용하며 말하였으므로 심판석에 앉은 제일 박식한 재판관도 그들에게 답변할 수도 없었고 도대체 그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이었고(이디오타이, 4:13) 범인"이었으며 공적인 활동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들이 자랑스럽게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말 그대로 "얼간이"(idiofs)였다. 그들은 마치 "자연 미물"이나 대하는 것처럼 경멸 어린 눈초리로 그들을 보았고 그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자유롭게 처신하는 것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2) 그들은 대단히 놀라서 사도들의 말을 막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그들은 "사도들이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성전에서 이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던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과거를 돌이켜 그들의 모습을 되살려 보았다. 또한 그들의 종들과 주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려왔다. 왜냐하면 이제 도저히 이들을 바보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사도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고" 그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과 그를 수행하며 그에게 훈련을 받았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자 무슨 이유로 그들이 담대해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그들의 대담성은 그들이 누구에게 교육을 받았는지를 보여 주고도 남았다. "예수와 사귐을 가진 자," 그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자들은 스스로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사도들과 얘기를 나눠본 이들은 "그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던 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사귐이 사도들을 그토록 거룩하고 신비하며 영적이고 쾌활하게 하였다. 이 사귐이 그들을 세상에서 뛰어나게 했고 다른 은사로 충족케 하였다. 그들이 변화산에서 얼굴이 빛났던 것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으리라.

[구원과 복음의 원어설교말씀] 이스라엘 조상의 하나님(출 3:15)

 

[구원과 복음의 원어설교말씀] 이스라엘 조상의 하나님(출 3:15)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했습니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며 이삭의 하나님이며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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