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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 성경 좋은 말씀] 성전에 성육신 한 그리스도(눅 2:21-24)

복음의 능력 2023. 1. 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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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고 8일째 할례를 받아야 했다.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서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고 했다. 

 

성전에 성육신 한 그리스도(눅 2:21-24)

 

우리 주 예수는 "여자에게서 낳으므로" "율법 아래 있게" 되었다(갈 4:4). 그는 아담의 딸의 아들이므로 "모세"의 율법 아래 있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목에 그 멍에를 메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무거운 멍에였고, "장차 올 선한 것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또한 율법의 제도는 사도 바울의 말대로 "약하고 천한 세상의 초등 학문"(갈 4:9)이지만, 그리스도는 거기에 복종하셨으니, 그것은 그가 더 좋은 은총을 가지고 그것을 취소시켜, 우리에게서 제거하려 함이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그가 저 "율법 아래 있게" 되시고 거기에 순복 한 모습을 두 가지 볼 수 있다.

Ⅰ. 그는 율법이 지정한 날에 "할례를 받았다"(21절). 곧 "제8일이 다 되었을 때", 곧 그가 난 지 7 밤이 지난 그날에 그들은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

1. 그 의식은 "고통스러운" 수술이었다("필경 당신의 피의 <잔인한> 남편이니이다." 출 4:25). 그러나 그는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감수하셨을 것이다. 아니 "그러므로" 그는 거기에 순복하사, 그의 초기의 복종, 곧 피 흘리기까지 견디는 복종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때 그는 방울방울 자기의 피를 흘렸다. 그러나 후에도 그는 그 피를 붉은 시냇물처럼 흘렸다.

2. 그 할례는 본래 "이방인"을 전제로 하고, 그를 하나님과의 계약에 받아들여지게 하는 의식이었으나, 그는 항상 그의 "사랑받는 아들"이었다. 아니 그것은 "죄인"을 상대로 하는 의식이지만 ─ 죄인의 그 의식으로 그의 더러움을 제거해야 된다 ─ 그에게는 잘라버려야 할 아무런 불순함이 조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복종했다. 아니 "그러므로" 그는 거기에 복종했다. 즉 "육체"의 모양뿐만 아니라 "죄 있는 육체"의 모양을 가지고자 하셨기 때문이다(롬 8:3).

3. 그렇게 하면 그는 스스로 "율법 전체에 빚진 자"가 되지만(갈 9:3), 그는 복종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복종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은 자유인으로 태어났지만 종의 형체를 지고 싶어서였다. 그리스도가 할례를 받은 이유는 이렇다.

(1) 자기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인정하고, "육체로는 그리스도가" 그 민족의 "태생임"을 입증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친히 붙들어 주려" 함에서였다(히 2:16).

(2) 그가 친히 우리들의 죄의 담보물이 되어 우리의 안전을 지키는 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구드윈(Goodwin) 박사의 말에 의하면, 할례는 우리의 "끈"인데, 그것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이 "율법에 빚진 자"임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기가 할례를 받음으로써, 말하자면 자기의 손을 할례에 대시고, "우리를 위한 죄(속죄제물)가 되셨다."

의식(儀式)의 율법이 제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소나 염소의 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피를 바칠 수 있게 끔 한 것이다. 제물은 미리 할례를 받지 않고는 바쳐질 수 없는 법이다.

(3) 그는 교회의 어린 자손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정당화시킴과 동시에 존귀히 여기기 위해서였다. 이 규례는 계약의 인을 치는 제도요, 할례와 마찬가지요(롬 4:11), 오늘날의 세례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의해서 생기는 의에 인을 치는 제도이다. 그리고 분명히 그가 제8일에 할례를 받음은 그가 30세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믿음 있는 자들의 자녀들의 세례를 그들이 성장하기까지 미루어 두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믿음 있는 자들은 자기 자식들을 유아기에 세례를 받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헌신케 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의식의 변화가 실체를 바꾸지는 않는다.

관례에 따라 그가 세례를 받을 때에 명명식이 있었다. 그는 "예수" 혹은 "요수아"로 호칭되었다. "그가 모태에 있기 전에"(1:31) "그 천사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렇게 이름 지어 준"것이다. 그리고 천사는 나중에, 상정된 아버지 요셉에게도 말해 주었었다(마 1:21).

① 그것은 요한이란 이름처럼(골 4:11)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흔한 이름"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도 그는 "자기 형제들과 동등됨"을 취하시고자 하셨다.

② 그것은 구약 성서에서 그를 상징해 주는 위대한 두 인물의 이름이었다. 즉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와 같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령관이었고, 가나안 정복자였다. 또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이름이다. 그는 대제사장이므로 관을 쓰기에 적합했고 "자기의 보좌에 앉은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던 것이다(슥 6:11, 13).

③ 그 이름은 그의 과업에 대해 중대한 의미를 주었다. 예수는 "구원자"를 의미한다. 그는 그의 신성의 영광으로부터가 아니라 그의 은혜로운 작정으로부터 중보자가 되기로 지명된 자였다. 그는 "구원을 가져온다."

Ⅱ. 그는 정전에 "현신(現身)되었다." 이것은 "그녀의 결례의 날이 찼을 때"(22절), 율법을 염두에 두고, 또 율법이 지정한 시기에, 그가 난 지 40일이 되는 날에 있었다.

많은 사본들과 신빙성 있는 사본들은 ‘아우톤’을 ‘아우테스’로 읽어서, "그들의 결례 날" 곧 어머니와 아기의 결례 날로 읽는다. 왜냐하면 율법의 원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는 씻어야 할 불순함이 없었지만, 할례를 받았듯이 결례식도 받았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할례"로 ─ 우리가 그와 연합하여 교제하는 밀을 빌어 또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골 2:11) 영적 할례로 ─ 우리가 "할례 받게" 되듯이, 역시 그리스도의 "정결함"을 통해서 우리도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 가지고 들어온 더러움과 부패에서 "영적으로 정결함"을 받게 된다.

이제 율법에 따라서,

1. 아기 예수는 장자이므로 "주께 드려졌다"(현신되었다). 즉 성전의 한 뜰에서 바쳐졌다. 그 율법이 여기에 인용되어 있다. "첫 해에 난 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칭하여야 하리라"(23절). 멸망시키는 천사가 애굽의 첫 태생을 죽일 때, 이스라엘의 첫 태생들은 특별히 보호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도 첫 해에 난자이므로, 그는 아론의 집의 후손 이상으로 확실한 권한에 의해서 제사장이었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중의 "장자"요, "주께 거룩한 자라고 칭함" 받는다. 다른 사람들은 결코 그런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다른 장자들처럼, "주께 드려졌다." 비록 그는 이제 막 아버지의 품에서 떠나 왔지만, 제사장의 손으로 아버지에게 "드려졌다." 제사장이 그 아버지에게 소개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 그가 "주께 바쳐졌다"는 사실은 그가 자신을 중보자로서 주께 "드림"을 상징해 주는 것이다. 그때 그는 "주께로 이끌리고 나아가게" 된다(렘 30:21). 그러나 그는 율법에 따라 "대속을 보았다"(민 18:15). "처음 난 남자는 대속함을 받아야 하리니." 그 값은 "5 세겔"이었다(레 27:6; 민 18:16) 그러나 가난한 자의 경우에는 제사장이 값을 감해 주든가 안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에 속전(贖錢)에 대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주께 드려졌다." 그것은 그가 "되돌아오기"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귀"는 평생토록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문설주"에 대고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그는 사무엘처럼 거기서 섬기기 위해 성전에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사무엘처럼 "그가 사는 날 동안" "주께 바쳐졌다". 또 "손으로 만들지 않은" 참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겼다.

2. 그 어머니는 자기의 예물을 바쳤다(24절). 그녀가 장차 대(大) 제물이 될 자기의 아들을 주께 드렸으니, 다른 예물은 드리지 않아도 변명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지금은 효력이 없지만) "율법에 쓴 바대로", 그녀는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비둘기들"을 바쳐야 했다. 능력이 있었더라면, 그녀는 "번제물로 어린양을 드리고, "속제물로 비둘기"를 바쳐야 한다. 그러나 가난하다면, 그래서 어린양을 살 돈이 없다면, 그녀는 "번제와 속죄제"를 위해 각각 한 마리씩 "두 마리의 비둘기"를 드려야 한다(레 12:6, 8).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그에게 대해 죄를 졌을 경우에는 슬픔과 수치를 감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그 두 경우에 모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 우리에게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나 죄로 인한 슬픔, 그 두 가지의 근거가 결여되어 있은 적이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이 죄 속에서 "잉태되고" "출생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사정은 우리들의 사정과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율법 아래 있게 되었으므로, 율법에 동의한 셈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그에게 모든 의를 이룸이 되었다." 죄의 고백에 연합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일이다. 그러므로"누가 '내가 나의 마음을 깨끗케 하였노라'라고 말할 수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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