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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주일설교말씀] 이신칭의 교리(롬 3:19-31)

복음의 능력 2023. 1. 1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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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에서는 이신칭의에 대해서 말씀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주의는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여 거룩하게 산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거룩할 수 없다. 독생자 예수님을 믿을 때 의롭게 된다. 인간의 의지나 힘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믿음을 주시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하시니 믿게 되었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하시니 인간이 의롭게 된 것이다. 이신칭의는 하나님의 전적 주권이다.

 

이신칭의 교리(롬 3:19-31)

 

율법의 행위에서 칭의를 구하는 것은 허사요 오직 믿음으로만 칭의 받을 수 있다는 게 바울의 결론이다. 이것이 17절에서부터 계속 입증하려는 요점이요 28절에 가서 그의 강론의 요약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으니 "명백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회개의 여지가 없던 순전한 양심의 첫째 율법의 행위도, 제 아무리 고도로 개선된 자연율법 행위도, 의식율법의 행위도(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이해 주는 게 아니다), 죄를 가르쳐 주고 또 자긍 하게 하는 도덕율법의 행위도, 그 어느 것도 칭의를 가능케 할 수 없다는 얘기다. 타락한 상태 곧 그 바닥의 힘에 짓눌려 있는 인간이 어떠한 종류의 행위로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고 그걸 값없이 주시는 은사로 알고 받아들이는 참된 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아낌없는 은혜로서만이 해결될 문제다. 우리가 죄지은 일이 없었다면 율법에의 순종이 우리의 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나 일단 죄를 짓고 또 타락하게 되었은즉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로는 이전의 죄책을 속량 할 수 없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도덕율법에의 순종이 칭의를 가져오는 것으로 여겼다(눅 18:11).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를 들고 나온다. 그 하나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말하는 인간의 죄책이요 다른 하나는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Ⅰ. 그는 율법의 행위로 칭의를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인간의 죄책상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 논리는 간단하다. 곧 우리가 일단 이겨서 깨뜨려 버린 율법으로는 칭의도 구원도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형이 확정되어 버린 역적은 "에드워드 3세"의 25조 항을 들고 사면을 청원해 봤자 풀려날 길이 없다. 왜냐하면 일단 율법이 그의 죄악을 발견하고 그를 정죄한 뒤기 때문이다. 가령 그가 이 법을 어기지 않았다면 구제받을 길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그 법을 어겼다는 게 이미 기정사실로 된 이후에는 제아무리 뉘우치는 자세로 사면 조항을 들추면서 사면을 요구해도 풀려날 길이 없다. 이제 인간의 죄책상을 살펴보자.

1. 그는 특별히 유대인을 두고 꼬집어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율법을 자랑하며 그걸로 칭의 받을 수 있다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타락상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구약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 유죄판결은 유대인에게나 그 외 민족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니 그 이유는 그들의 율법에 이미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에 이미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 아래 있다고 자랑하며 그것에 대한 배짱이 대단했지만 그러나 "율법은 너를 유죄판결하여 정죄하지 않느냐"라고 바울은 얘기한다. 그 이유는 "모든 입을 막으려는"뜻에서이다. 의롭게 하고 정죄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택하시는 방법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그는 온갖 입을 다 틀어막고 만다. 의롭게 되었다는 자들은 간단히 유죄판결을 받아(유 15) 아무 소리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스스로 자기들의 입을 막게 될 것이다(마 22:12). "모든 악은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시 107:42).

2. 그는 일반적인 인간의 죄책상을 온 세상에 적용하고 있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 죄책이 있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흠정역). 이 세상이 죄악 속에 뒹군다면(요일 5:19) 그건 틀림없이 "죄책이"있는 것이다. 곧 죄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마땅히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니 본질상 모두가 "진노의 자녀들"이다(엡 2:3). 모두가 죄책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들의 칭의에 도취되어 있는 자들은 모조리 내어 던져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 앞에 죄책이 있다는 얘기는 무서운 말이다. 곧 만사를 통찰하시는 하나님, 그의 심판에 있어서 속지도 않거니와 속을 수도 없는 그분,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죄책을 면해 주지 않을 공정하고 의로운 심판관 앞이라는 얘기다. 모두가 죄책 아래 있다. 따라서 모두는 하나님 앞에 입고 나설 의가 필요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23절) 곧 본질상 뿐 아니라 실제로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곧 인간의 최고 목표인 바로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르지 못하더니" 하는 이 말은 사격수가 그 표적에 못 미치는 것이나. 다리기 선수가 상을 타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상을 타지 못하는 우승자가 아닐 뿐 아니라 철저한 패배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하는 말을 더 살펴보자.

(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있어서 부족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1:21)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위치, 곧 하등동물들이 오직 객관적으로 영화롭게 할 수밖에 없는 위대하신 창조주를 적극적으로 영화롭게 할 위치에 놓여 있었지만 그러나 인간은 죄 가운데서 여기에 이르지 못하고 말았으니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그분을 욕되게 하고 말았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거기에 미친 사람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딱하기 짝이 없다.

(2)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거리가 없다. 모르고 그랬다는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려고 허둥대는 가운데 우리의 처지, 가진 것, 행위 등 그 어느 것을 가지고 떠들어 봤자 그건 오히려 영원히 우리에게 불리한 금반어(禁反語)가 되고 말 것이다. 곧 우리 모두는 죄를 범했다는 꼬리표 구실을 할 것이요, 그걸로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자랑할 수는 있다. 곧 근시안적이요 마음속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인간들, 똑같이 타락해 있으며 기꺼이 죄악에 뒤범벅이 되는 인간들 앞에서는 그게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죄악을 대해서는 오래 참으실 수 없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

(3)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일에 부족하다. 영광의 시작인 칭의, 곧 하나님의 인정에 이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인간에게 덧입혀 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인 성화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영화롭게 되고자 하는 온갖 바람과 소망을 내 던져 버린 것이다. 순수한 정직을 가지고 하늘에 이르기는 다 틀렸다. 그리로 가는 통로는 이미 다 막혔다. 생명의 나무에로 통하는 그 길에는 천사가 번뜩이는 칼날을 들고 지켜 서 있는 것이다.

3. 율법에 의한 칭의 기대를 철저히 배제하는 의미에서 그는 다시 한번 율법으로 확신시키고 있다(20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우리를 유죄판결하여 정죄하는 이 율법이 우리를 의롭다 할 리 만무하다. 이 율법은 "옳고 그른 것"을 재 보여 주는 곧은 자와 같은 것이다. 율법의 바른 용법과 의도는 상처를 들춰내는 데 있는 것인 만큼 치료제가 될 수 없다. 파고드는 게 어찌 치료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죄가 뭔지 알려면 율법의 엄격성, 그 범위, 그리고 그 상징적인 면을 면밀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이 자를 놓고 재보면 어디서부터 우리가 빗나가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 바울은 바로 이런 점을 지적해서 말하고 있다(7:9).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1) "의롭다 하심을 입을 육체가 없다." 그렇다 타락한 인간 그 어느 누구도 불가능하다. "그도 또한 육체이기 때문이라"(창 6:3)는 말씀처럼 모두가 죄악투성이요 타락했기 때문에 곧 우리 모두가 육체이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 우리 본성에 남아 있는 타락은 우리 자력에 의한 칭의, 곧 육체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관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것은 앞으로, 영원히 배제하고 말 것이다(욥 14:4).

(2) 그의 앞에, 곧 하나님 보시기에서 칭의가 불가능하나 교회가 보는 관점에서의 율법에 의한 행위의 칭의를 여기서 그는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모두가 교회부지 안에 살고 있었으며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의 민족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선 양심에 비춰볼 때 곧 "그의 앞에서"는 율법의 행위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다. 사도는 시편 148편 2절을 언급하고 있다.

Ⅱ. 칭의가 기필코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만 기대한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율법의 행위로는 칭의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죄책을 입은 인간은 영원히 진노 아래 머무를 수밖에 없는가? 절망뿐이란 말인가? 죄악 때문에 입은 상처는 불치의 병이 되고 말았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21,22절). 우리에게 다른 길이 열려 있으니 곧 복음 안에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칭의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다. 곧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의," 예정하시고 공급하시면 영접해 주시는 그분의 의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 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마치 그리스도인의 갑옷을 가리켜 "하나님의 전신갑주"(엡 6:10)라고 하듯이 말이다.

1. 이제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 이 의가 드러났다는 점부터 보자. 복음이 제시하는 칭의의 가도는 고속도로다. 탁 트여 있다. 누구든 다 들여다볼 수 있다. 구리뱀은 이미 높은 장대에 달려 있다. 어둠 속을 헤매도록 내버려 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들여나 보이고 있다는 얘기다.

(2) 그것은 "율법을 떠나서"다. 그는 여기서 유대 기독교인들의 방법론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곧 이들은 기필코 그리스도와 모세를 하나로 묶어 율법을 견지하며 그 의식을 지키자는 가운데 이방 기독교인들에게도 이걸 강요하려 든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칭의는 "율법을 떠나서"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도입한 의야 말로 완전한 의인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구약 성경에 이미 이것을 가리켜 보여 준 모형과 예언과 약속이 들어 있었다는 얘기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칭의의 제 길을 가리켜 보여 주고 있으니 곧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 하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우리의 의라고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행 10:43). 율법과 선지자를 그렇게도 들먹이기 좋아하는 유대인에게 이건 하나의 장점이 될 수도 있다.

(4)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한 복판에 "기름 부음 받은 구주"로 모시는 그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칭의를 가져오는 신앙은 그리스도를 그의 3직 곧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 이 모든 면에서 그를 구주로 섬기는 것이니 그를 의지하고 그를 영접하여 그에게 매달리는 면에 있어서 모두 그러해야만 한다. 이러한 신앙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도입한 이 의와 관련을 맺게 된다.

(5) 그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것"이다. 이 표현에서 그는 지금까지 주창해 오던 것을 다시 밝히고 있다. 곧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기만 하면 똑같이 되며 그리스도를 통해 모두 하나님 앞에 환영이라는 얘기다. 곧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곧 이 칭의는 "모두에게"(에이스 판타스), 곧 전체 일반에게 제공되어 있다. 스스로 제외하고 빠지지 않는 자들을 복음은 결코 제외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이 칭의는 "믿는 모두에게"(에이스 판타스 투스 피스튜온타스) 제공되어 있다. 이들에게 주어질 뿐 아니라 왕관으로서, 예복으로서 입혀진 것이다. 이들은 그들이 믿음으로 이것과 관계가 지어지며 여기에 따르는 모든 혜택과 특권에 대한 권리가 부여되는 것이다.

2.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한다는 얘긴가?

(1) 이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위해서다(24절).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다(도레안 테 아우투 카리티). 이것은 오로지 이 "은혜로" 된 것이다. 곧 칭의와 성화를 부정하는 천주교에서 얘기하듯이 우리 안에 이뤄진 은혜가 아니라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도 보이지 않는데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에 의한 것이다. 이걸 더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도 값없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은혜를 아주 순순한 면에서 정당하게 이해하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었다"(창 39:4)는 얘기가 나오지만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곧 그 주인은 요셉이 하는 일이 성공하는 것을 본 것이다. 요셉을 잘 봐줘서 은혜를 베풀 만한 뭐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거저"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진짜 거저 주어진 것이요 우리 속에 그걸 받을 만한 뭐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한 것이다 그것이 거저 온다는 말은 맞지만 그러나 그건 그리스도께서 비싼 값을 지불하고 산 것이기에 아직도 값없는 은혜의 영광은 불변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거저가 아닐 수 없는 것은 이 대속적인 만족을 제공하고 받아들인 것이 바로 이 은혜이기 때문이다.

(2)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의 영광을 위해서다(25, 26절). "이에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이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삼으셨으니……"

①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시대에도 "속죄소"(일라스테리온, 2435)라는 모형으로 나타났듯이 위대한 속죄 제물이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죄에 대한 속죄가 이뤄지고 우리의 행위와 우리 인격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은혜의 보좌이다(요일 2:2). 그는 우리 화해의 처음과 끝이시다. 화해자일뿐 아니라 화해의 본질이니 우리의 제사장, 우리의 속죄물, 우리의 제단, 이 모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속죄소 안에 계셔서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고 계시는 것이다.

② "하나님이……세우셨으니" 하나님, 피해자 측에서 먼저 손을 써서 화해하기 위해 중재인을 세우셨으니 곧 이 일에 그를 "예정하셔서"(프로에데토, 4388) 영원 전부터 그의 사랑의 조정자를 정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부으시며 마침내 자격을 부여하셔서 이 죄악 세상이 속죄 제물로 드러내 보이셨다(마 3:17; 17:5 참조).

③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그의 피에 대한 믿음으로, 흠정역) 우리가 이 속죄 제물과 관련이 맺어지게 된다. 그리스도는 속죄 제물이다. 곧 상처를 낫게 하는 붕대가 주어진 셈이다. 신앙은 이 붕대를 상처 난 영혼에 감는 것이다. 그리고 이 칭의 문제에 있어서 이 신앙은 속죄를 가능케 한 "그리스도의 피"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 피가 없이는 속죄가 불가능하며 그것도 자신의 피가 아니면 어느 것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게 신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율법 시대의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린 이유다(출 24:8). 신앙은 우슬초 다발이요 그리스도의 보형을 흩어 뿌리는 피다.

④ 신앙에 의해서 속죄 제물과 관련을 맺은 자들은 모두 "전에 지은 죄의 간과"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속죄 제물이 된 이유는 바로 여기 있으니 곧 속죄다. 이걸 위해 그는 오래오래 참으시는 집행유예를 보여 주신 것이다. "길이 참으시는 중에" 우리에게 회개할 틈을 주셔서 하늘에 가게 하려는 신의 인내가 우릴 지옥에서 건져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전에 지은 죄"를 구약 성도들의 죄로 보고 이 죄도 그리스도께서 시간이 차서 속죄하셨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앞뒤를 다 내다본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을 "하나님의 인내를 통해 지나간"으로 보자. 우리가 죄악의 현장에서 붙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신의 인내 덕분이다. "하나님의 인내를 통해서"(엔 테 아노케 투 데우)라는 말을 26절에 집어넣어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라는 귀한 두 열매를 강조하는 희랍사본도 여럿 있다. 곧 "속죄를 위해서"(디아 텐 파레신, 3:25)라는 말에서의 속죄와 "하나님의 참으심"이라는 말에서의 집행유예가 바로 그것이다. 열매 못 맺는 포도나무가 포도원에 남겨진 이유는 그 주인의 인자함과 정원사의 조정 때문이다. 중개자와 속죄물이 없이는 용서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한시도 참으실 수 없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양자에 있어서 밝히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의다. 이쪽 편 세상 지옥에 항상 죄인이 항상 있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덕분이다.

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고 있다." 바울은 이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으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하는 식의 표현을 봐서도 그걸 알 수 있다."우선" 하나님은 속죄물 그 자체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처럼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이 밝히 드러난 때도 없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보다 못한 것이 죄를 속하려 들 때는 어느 때고 그 죄를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의 아들에게서 죄를, 물론 전가된 죄를 발견하시고 그는 그 아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 아들, 우리를 위해 스스로 죄가 되었기 때문이다(고후 5:21). 따라서 비록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외아들이지만 그에게 우리 모두의 죄짐이 얹혀 있는 것을 보시고서 그는 기꺼이 그에게 매질을 아끼지 않으셨다(사 53:10). "다음으로" 그는 이 속죄물에 의한 사면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 보여 주고 계신다. 곧 "자기도 외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자비와 신뢰가 더없이 하나로 뭉쳐지고 의와 평화가 서로 입 맞추었으니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들의 공의를 위해 만들어 준 속죄, 이것을 받아들이며 회개하는 신자들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의 해위일 뿐 아니라 의의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담보물을 쾌히 받아들여 놓고 그에 대한 원금을 다시 받겠다고 나서는 건 하나님의 공의에 안 맞는 일이다(요일 1:9 참조). 그는 의로우시다. 곧 당신의 말씀에 신실하시다는 얘기다.

(3)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이렇게 하므로 인간의 자랑이 설 자리를 잃고 만다(27절). 어떠한 육체도 당신 앞에서 자랑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시종일관 창의와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이 허풍을 배제하는 방향에서 이끌어 오셨다(고전 1:29-31). 만일에 칭의가 율법의 행위로 가능했더라면 이 자랑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 그렇지 않다고 보는가?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면 우리 스스로의 머리에 왕관을 쓰는 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법" 곧 이신칭의의 길은 이 자랑을 영원히 배제하고 만다. 왜냐하면 신앙은 의존케 하며, 스스로를 비우게 하며, 스스로를 부정하게 하는 은혜요 저 보좌 앞에 갈 자의 왕관을 내어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의화 되는 것만이 가장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믿음의 법"이란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신자들이라고 법 없이 내버려진 게 아니다. 신앙도 일종의 율법이다. 그것이 진리 안에서라면 어디서고 작용하는 은혜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에 자랑할 데가 없고 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서 그는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28절).

Ⅲ. 본장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그는 이신칭의의 범위를 제시하며 그것이 유대인에게만 국한한 특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통용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이미 그는 22절에서 차별이 없다는 말을 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1. 그의 주장과 입증을 들어보자(29, 30절).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그는 이런 가정은 얼토당토않다는 점에서부터 이론을 펴 나가고 있다.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께서 저 사특한 소수의 유대인에게만 자신의 은총을 국한하시고 기타 모든 인류는 영원한 절망 속에 내버려 두신다는 게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문제인가? 이점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의 선하심에 대한 생각과 일치한다. "여호와께서는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 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 모두에게 한 가지 동일한 길만이 있을 뿐이다. 유대인들이 제 아무리 차별을 두려 해도 그 차별이 있을 수 없다.

2. 그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알고 있는 율법이 이 교의에 의해서 무효화되는 게 아니냐 하는 반론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31절). "그럴 수 없느니라. 비록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게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헛되이 주어졌다거나 우리에게 무용하다는 얘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가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그러면서 그 지위와 기초를 확고하게 하느니라. 율법은 아직도 우리의 과거를 확신시켜 주고 미래를 향하게 하는 데 효용가치가 있다. 물론 그게 직접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걸 중보자의 손에 들린 것으로 알고 그걸 소유하고 거기에 복종하며 은혜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폐기하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멀고 오히려 이 율법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다." 신자들에게 도덕률의 이행을 부정하는 자들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씀이다.

[히브리어성경 로마서 6장 말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난 성도(롬 6:9-11)

 

[히브리어성경 로마서 6장 말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난 성도(롬 6:9-11)

로마서 6장에서는 성도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것을 말씀한다. 성도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났다.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므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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