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8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적으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실 때도 아무것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많은 부와 명예를 얻으려고 합니다. 정욕적인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보다는 세상의 욕심을 위해서 믿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렇게 믿음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고 했을 때 베드로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막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세상의 부와 명예를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의 것은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천국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세상의 정욕적인 것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신앙생활하는 것이 세상의 정욕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믿음과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목: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마 8:18-27
요 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 8:20)
주 제: 예수님을 좇으려면 자기 사생활을 다 버리고 오직 주님만 택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하여 마태, 빌립, 요한 등 주님의 제자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 그 길이 그렇게 험난할 줄 알았더라면 쉽게 주님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에 가는 길도 쉽지 않습니다. <천로역정(존 번연)>을 보십시오. 기독도(Christian)가 천국에 이르는 길은 좁은 길이요 험난한 길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버리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각종 병자들이 치유 받는 것을 보고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저들이 주님께로 모여든 목적은 구경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갈릴리 반대편으로 건너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 한 서기관이 주님을 좇기를 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마 8:19)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 8:20, 눅 9:58)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주님께서는 일정한 거처가 없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안치할 무덤도 없어서 아리마대 요셉의 새로 구입한 가족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복음 외에 가지신 것이 없으셨습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우리는 가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좇는 일은 환경이나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의 소원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좇아가겠다는 서기관의 마음에 여우도 들어갈 자리가 있고 공중의 새도 들어갈 자리가 있지만 주님께서 들어갈 자리는 없구나 라는 말씀의 의미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낮추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낮은 계급의 가정에 태어나셨고, 하늘왕국의 대왕, 영광의 왕, 모든 천군 천사의 사령관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낮추시고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빈곤과 굴욕의 생애를 택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동일한 환경에 처하셨습니다. 수고, 역경, 궁핍은 그분께서 매일 당하신 경험의 부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갈채를 받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군대를 지휘하지 않으셨고, 세상의 나라를 통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자들의 환심을 사거나 세상의 명예를 얻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국가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어떤 지위를 얻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과 함께 거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회의 인위적 차별을 전혀 무시하셨습니다. 그분은 귀족계급의 사람들, 부자들, 재간 있는 사람들, 학자들,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또 제자 중에 하나가 와서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니 주님께서는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셨습니다. (마 8: 22) 얼른 보면 매우 냉정하신 말씀 같습니다. 어찌 부친의 장례까지도 거부하게 하시는가? 그러나 이 제자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 순서가 ‘나로 먼저 가서’ 함으로 부친의 장례에 우선 순위를 두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주님을 따르면 주님께서 함께 부친의 장례에 참여하셔서 집례를 하실 것을 주님께 그 일을 부탁하지 않았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누가복음 9장 61-62절이 보충되어 나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주님, 제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저로 먼저 제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고 하십니다. 믿음은 우선권의 선택입니다. 주님이냐 세상이냐? 주님의 가족이냐 나의 가족이냐?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행복이냐 불행이냐? 등.
갈릴리 건너편에 가시기 위해 배를 타시는데 헌신된 제자들만 주님을 좇았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에는 어디든지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 가되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찬송가 324장(통 360장)을 부르면서 고난의 길(Via Dolorosa)을 걸어갔습니다.
1) 예수 나를 오라하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후렴)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2) 겟세마네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 하네 피땀 흘린 동산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3) 심판하실 자리까지 주와 함께 가려 하네 심판하실 자리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4) 주가 크신 은혜 내려 나를 항상 돌아보고 많은 영광 보여 주며 나와 함께 함께 가시네
비록 폭풍의 현장 속으로도 주님과 동행하면 걱정이 없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가는데 주님께서는 고단하여 배에서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a great tempest in the sea)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갈릴리의 동쪽에는 해발 600미터가 되는 골란고원[도피성이 있었음]이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가 지중해보다 212미터 낮은 지역에 있기에 800미터 높이의 골란입니다. 또한 서쪽에는 지중해 바람이 불어와 밤에 동쪽에서 불어오는 열풍과 합쳐서 늘 크고 작은 풍랑이 있습니다. 이날 밤에는 더 심한 풍랑이 닥친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는 이 갈릴리 어부 출신이 많아 이만한 풍랑이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하였는지라 주무시고 계시는 주님을 깨웠습니다. 옳습니다. 어떠한 풍랑이 불어오든 우리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만이 주님을 깨울 수 있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save us, we perish, 마 8:25). 주님께서는 일어나셔서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였습니다.
오늘 불고 있는 풍랑으로 인해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니 주님의 말씀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O ye of little faith) 하십니다. 풍랑과 폭풍이 지날 때 우리는 더욱 굳건한 믿음을 가집시다. 이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rebuked the winds and the sea)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and there was a great calm.) 찬송가 371장(통 419장)에 보니
1) 구주여 광풍이 일어 큰 물결이 뛰놀며 온 하늘이 어둠에 싸여 피할 곳을 모르니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안 돌아봅니까 깊은 바다에 빠지게 된 때 주무시려 합니까
(후렴) 큰 바람과 물결아 잔잔해 잔잔해 사납게 뛰노는 파도나 저 흉악한 마귀나 아무것도 주 편안히 잠들어 누신 배 뒤엎어 놀 능력이 없도다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해 잔잔해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해 잔잔해
2) 구주여 떨리는 내 맘 저 풍랑과 같아서 늘 불안에 싸여서 사니 날 붙들어 주소서
세상의 풍파가 나를 삼키려 합니다 지금 죽게된 날 돌아보사 곧 구원해 줍소서
3) 사나운 광풍이 자고 큰 물결이 그치니 그 잔잔한 바다와 같이 내 마음이 편하다
구주여 늘 함께 계셔 떠나지 맙소서 복된 항구에 즐거이 가서 그 언덕에 쉬리라
이처럼 주님을 좇아가는 자는 풍랑이 일어도 겁을 낼 것 없습니다. 세상을 좇아가는 사람은 그 풍랑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실패하고 마침내 멸망받습니다. 베드로가 주님만을 바라보고 갈 때는 바다 위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결을 바라보고 풍랑을 의식하여 주님을 놓쳤을 때는 금방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연뿐만 아니라 마귀의 어떠한 역사도 잠재우십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어서라기보다는 두려움 때문에 주님께 간청한 것인데,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상황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때 주님께서 베푸신 능력을 굳이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지금,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도 그때와 똑같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비록 적은 믿음을 가지고서라도 주님께 간청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능력을 베푸십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지금도 얼마든지 그 능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나의 문제는 주님께 그만큼 간절히 간구하지 않은 것과 주님의 능력을 심각하게 기대하지 않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크신 능력을 기대해야겠습니다.
첫 번째로, 배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때때로 침묵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시35:22)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시 83:1) 그것은 하나님이 때때로 침묵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내력을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참고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지 시험과 훈련을 하기 위해 침묵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기를 기다리십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온전히 수용하기를 기다리시며 침묵하실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우리들이 간절히 기도하기를 원하실 때 침묵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기도하고 외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다윗처럼 하나님께 더욱 매달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때로는 새벽을 깨우리로다 하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깨워야 합니다. 우리들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기도로 깨우는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그 풍랑 가운데서도 주무실 수 있음을 보이십니다. 생사화복은 온전히 하나님께 달려 있기에 주님의 평화는 바로 풍랑 가운데에서도 가능함을 보여 주십니다. 참된 평화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모든 것이 평온한 가운데 잠잘 수 있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쉴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평안히 주무실 수 있음은 주님의 승리에 속합니다. 우리도 어떤 폭풍과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주님을 모시고 있으면 결코 불안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큰 전쟁이 나고 천재지변이 나도 아무 것도 모르고 엄마 품에 평온하게 잠을 자고 있는 어린이처럼 말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주무실 때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크게 두려워하고 불안했습니다. 당연히 풍랑과 거센 파도를 보면 불안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주님을 깨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들이 죽겠나이다” (마 8:25) 예수님을 깨우면서 우리들이 죽겠다고 하며 간절하게 예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급한 기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배에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노아의 방주처럼 구원선입니다. 주님께서도 베드로의 배를 빌려 말씀을 전하신 후 그 배에 고기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가 큰 어려움을 봉착했을 때 주님을 모신 교회는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있음은 우리의 믿음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깨셔서 제자들을 책망하실 때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8:26)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대장부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우리들이 소유할 때 이 세상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생활을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교회의 큰 어려움이 있을 때 주님께서 평화를 회복시켜 주시며 예배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회복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8:26) 바다가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바다를 향해서 명령을 하실 때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자연까지 지배하신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풍랑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본문은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풍랑이 일어날 때 믿음으로 답하면 풍랑이 도망가고 기도로 소리치면 잠잠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과 기도,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풍랑도 잔잔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의 풍랑, 가정의 풍랑, 나라의 풍랑도 예수님께서 잠잠케 하시면 잠잠해집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에 믿음이 있는가, 우리들이 기도 생활을 하는가 입니다. 배가 잔잔할 때는 평안하게 가지만 빨리 못 갑니다. 풍랑이 일어났을 때 돛을 잘 달면 바람에 밀려서 더 빨리 갑니다. 독수리는 강한 바람이 불수록 더 높이 날 수 있습니다. 극심한 고난이 올수록 우리의 천국배는 더욱 주님 가까이 달려갑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서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7절),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71절)고 묵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풍랑을 인하여 천국에 더 힘차게 달려갑시다. 찬송가 373장(통 503장)을 부르면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1)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2)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3) 내 걱정 근심을 쉬없게 하시고 내 주여 어둔 영혼을 곧 밝게 합소서
4) 이 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큰 믿음 줍소서 아멘
주님을 따르는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의 성전에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면 다시 힘을 얻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따라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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