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7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말씀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말합니다. 좁은 문은 생명의 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문이기 때문에 찾는 자가 적습니다. 선택받은 사람만 들어가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넓은 문은 많은 사람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멸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과하여 들어가 생명으로 가야 합니다. 천국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찾는 이가 적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의 문을 통과하여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제목: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마태 7:13-14
요 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3-14)
주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길을 택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자
예루살렘 성에는 8개의 문이 있습니다. 현재 예루살렘의 Old City를 둘러싸고 있는 예루살렘 성은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성과 다른 예루살렘 성입니다. AD 135년에 하드리안 황제가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을 태양의 도시(히에로폴리스)로 바꿔버렸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예루살렘(Old City) 성은 AD 1537년~1542년 오스만 터키의 슐레이만 1세 황제에 의하여 재건된 성벽으로써 둘레가 약 3.4 Km이고 높이는 약 12 m 이며 모두 34개의 탑을 가지고 있는 커다란 건축물입니다.
성벽에는 총 8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의 사자 문(Lion's Gate, 스데반 문, 양의 문)과 황금 문(Golden Gate, 미문, 美門), 서쪽의 욥바 문(Jaffa Gate), 북쪽의 다마스쿠스 문(Damascus Gate), 헤롯 문( Herod's Gate), 새문(New Gate), 그리고 남쪽의 분문(糞門, Dung Gate)과 시온 문(Zion Gate) 등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다메섹 문과 같이 장사하는 문은 넓고 많은 사람이 드나드나, 예배하러 올라오는 문은 미문(美門, Beautiful Gate)이라고 그리 크지 않고 작은 문으로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이 문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셔서 천년왕국이 시작된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행 3:1-10에 보니 여기서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켜 걷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는 어느 문으로 들어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인생을 어느 시인은 두 가지 길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서 길이 난 곳 보다는 오솔길이라도 별로 다니지 않는 곳을 길로 만들며 가는 인생이 있습니다. 개척자의 정신은 길을 만들며 나갑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느 문을 택하며 살아왔습니까? 어느 길로 가고 계십니까? 앞으로 어느 문으로 가려고 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오늘 본문 마태 7:13-14에 보니 좁은 문을 택하기를 촉구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Enter ye in at the strait gate!”
주님 자신이 하늘의 영광을 마다하시고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가난하고 외로운 자로서 사셨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강림하실 때에 천군 천사의 찬양 속에 예루살렘의 화려한 왕궁에서 많은 축하를 받으며 탄생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 그것도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 혼인약속만 되어 있는 마리아의 몸을 빌려 잉태되시고, 베들레헴의 여관이 아니라 짐승들이 거주하는 동굴에 태어나셨습니다. 나사렛 동네에서 자라나시고 갈릴리 중심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주변 인간들과 더불어 주변에 사시다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화려한 생활과 수준 높은 생활의 넓은 문으로 오셨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따랐을 것이고 장례행사 및 추모행사, 동상을 세우고 무덤도 화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가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느니라”(요 14:6)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 율법 학사들, 제사장 신분을 가진 자들은 넓은 길을 택했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를 받으려고 안간힘을 썼고, 돈과 명예를 좋아했으며 잔치의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당연시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천대받고 소외되고 병들고 아픈 심령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 좁은 문을 택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믿고 따르는 것 자체가 좁은 문을 택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어렵습니다. 많은 고난과 아픔을 참아야 하며, 세상의 능욕을 견뎌야 하며, 때로 할 말이 있어도 입을 다물어야 하고, 때리고 싶어도 맞고 터져야 합니다. 들어도 못 들은 척 해야 하며 각종 비판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먼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에 세상의 것을 버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복을 받기 위해 교회에 나왔다가 당하는 고난을 보고 도망가고 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고난의 십자가가 없이는 영광의 부활이 없다는 교훈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들어가기도 쉽고 길도 넓어 고생을 하지 않습니다. 또 사람들도 많아 외롭지 않고 임시로 기분 좋게 살 수 있습니다. 흔히 하루 세끼 먹기 위해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오락, 취미, 즐김의 생활(엔터테이먼트 entertainment)을 합니다. 문제는 마음의 진정한 평화가 없고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과 '험한 길'의 이미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는 실천과 행동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서민의 집은 매우 작았고, 지붕도 낮았습니다. 그 작은 공간을 한두 개의 방으로 또 나누었습니다(three rooms house). 그 집으로 들어가는 문도 좁았습니다. 집과 집 사이로 이어진 길, 그리고 동네와 동네 사이를 연결해주는 들판과 언덕길 역시 좁은 길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반대로 넓은 길이 있습니다. 마차나 수레를 타고 그 튼튼하고 넓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부자 동네, 왕궁, 관공서, 부유층의 대저택을 만나게 됩니다.
좁은 길은 예수님이 사셨던 마을길이었을 것이고, 넓은 길은 갈릴리의 부자 마을로 가는 길입니다. 넓은 길은 영광의 문이었지만 결국 시들고 부패하고 소멸해버리는 멸망으로 인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나 제자들에게는 좁은 길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던 것처럼, 낮은 데 몸을 두고 지극히 작은 자들의 형편을 챙기고, 가난한 생명을 회복시키며, 민중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살아가는 그 길을 택할 것을 권면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시는 삶을 보이시면서도 저 낮은 곳을 향하여 가시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다시 영광의 자리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빌 2:6-11에 보면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져야할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 따르면 영생이 보장된 영광의 삶으로 이어집니다(마 16:24)
어떤 부자 청년이 주님을 찾아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이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 물으니까 주님께서는 쉐마(신 6:4-9)와 이웃사랑(레 19:18)을 소개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청년에게 방해가 되는 것은 부요함임을 아시고 자기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이 청년은 지금까지 넓은 문을 택해 왔습니다. 사업도 잘 되어 많은 재물을 모았고, 사회의 지위는 다 누려보았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마음에 평안이 없었고 영혼의 구원 문제는 자신 없었기에 영혼의 피폐함을 느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제부터는 좁은 문을 택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바울은 어려서부터 넓은 길로 택하여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세상의 학문, 지위, 부귀영화를 배설물처럼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을 푯대로 향하여 가는 좁은 문을 택한 것입니다. 그 좁은 문이란 협착하고 찾는 이가 적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임을 깨닫고 나서는 다시는 넓은 문으로 가지 않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하여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 22-24)고 에베소 장로들에게 털어 놓았습니다. 바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체포당하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까지 갔습니다. 찬송가 323장(통 355장) 2-3절 가사대로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의 지닌 것을 아낌없이 드리리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혹 우리 가운데는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내가 받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고 가소서라는 생각으로 믿음 생활을 하는 이는 하나도 없기를 바랍니다.
선교하러 위험한 현장에 가는 이들은 좁은 길을 택했습니다. 많고 많은 길 가운데 목회의 길을 택하며, 십자가를 지겠다고 목사 안수 받는 것을 보면 눈물이 나옵니다. 좋고 알아주는 학교에 입학하는 길이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도전해 볼만한 합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대학교 시절 축제도 포기하고 도서관에 출입합니다. 좁은 길 택한 사람을 비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을 하고 있는 그 사람들은 좁은 문을 한번이라도 택해 보았다면 자격이 있지만 자신들은 넓은 문을 택하고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돌팔매질을 한다면 우스운 꼴 밖에 되지 않습니다. 콜로세움에서 사자의 밥이 되더라고 찬양을 부르며 순교한 이들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생긴 것을 기억해 봅시다.
우리 자신부터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감람원 제단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교회가 되십시다. 그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로 연결되어 있으며, 진리의 길, 희망의 길, 사랑의 길이 있습니다. 남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교회, 세상적으로 화려한 모습이 아닌 주님을 닮는 겸손하고 소박한 모습을 추구합시다. 진실하고 성실하며 겸손하고 성결한 생활을 추구합시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는 1909년 <좁은 문>이란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여주인공인 알리사는 작가가 사랑했고 후에 아내로 맞이하는 마들렌을 모델로 했다고 합니다.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를 대표하는 이 소설은 숭고한 사랑을 위해 좁은 문을 택하는 주인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육체적 사랑과 대비되는 정신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플라토닉 러브'는 플라톤이 자기 제자들과 밤새 마시면서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분위기에서 생겼다고 합니다. 이를 처음 쓴 사람은 이탈리아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마르실리오 피치노(1433-1499)는 플라톤의 에로스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단테의 개념 등을 결합하면서 '플라토닉 러브'라는 개념을 재해석하여 만들어내었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플라토닉 러브'는 플라톤이 묘사한 사랑이고, 그것은 즉 신적인 사랑입니다.
아름다운 삶은 종교적 죄의식 때문에 포기하고 고독속에서 방황하는 알리사는 사촌동생인 제롬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성스러움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며 인내합니다. 당시 넓은 문을 택하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새로운 인간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부단히 신앙적인 이상과 충돌하면서 갈등하는 한 연인의 모습이 지상에서의 사랑보다는 천상에서의 영혼과의 합일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녀는 제롬의 성공을 위하여 희생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도 그것은 사랑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혼과 혼 사이에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알리사는 제롬을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그를 거부합니다. 애타게 그리워했으면서도 모습을 감춘 채 알리사는 한 묶음의 슬픈 사랑의 일기를 남기고 떠나갑니다. 이 작품은 프로테스탄트적 이상주의의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좁은 문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길을 발견했으면 그 길로 인도하는 문이 좁고 험해도 그 길만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못 말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대학의 특징은 입학 허락을 받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학점을 받아 졸업하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입니다. 좋은 군인도 좁은 문을 택한 자들입니다. 같은 군대라도 훈련이 강한 부대에 지원하는 청년들은 좁은 문을 택한 것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들어가기는 쉽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구원의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택한 자는 아주 잘한 일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좁은문으로 주저 말고 들어갑시다.
찬송가 521장(통 253장)을 함께 부르십시다.
1.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문을 참 좁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길은 참 험하니
우리 몸에 매어 있는 그 더러운 죄짐을
하나 없이 벗어놓고 힘써서 들어갑시다
(후렴)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좁은문 들어가
영생으로 인도하는 그 생명길 갑시다
2. 이 세상의 많은 사람 큰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갈지라도 멸망길로 끝나니
세상 헛된 부귀영화 모두 내어 버리고
주의 말씀 순종하여 그 생명길로 갑시다
3. 구원의 문 열렸으니 주의 공로 힘입어
주저 말고 들어가서 생명길로 갑시다
구원의 문 닫힌 후엔 들어가고 싶으나
한번 닫힌 구원의 문 또 열려지지 않으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배 회복자로서 영적인 군인으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좁은 문을 택하신 것, 참으로 잘한 것입니다. 이 구원의 길로 꾸준히 걸어가서 예배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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