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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7장 주일설교말씀] 그리스도인과 사회적 신분(고전 7:14-24)

복음의 능력 2024. 9. 10.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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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 7장 주일설교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제 목: 그리스도인과 사회적 신분

 

성 경: 고전 7:14-24

 

서 언

지난주에는 결혼에 관한 주님의 교훈을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 간단히 요약하면 결혼치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음행의 연고로 결혼하라. 결혼한 자는 분방치 말라!(그러니 방이 하나 있으면 좋다.) 그리고 성도에게 이혼은 안 된다. 불가피하게 그리 되더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배우자와 합하든지 해라! 믿지 않는 남편, 자녀, 나를 통해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이혼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다. 처녀 총각 가능하면 결혼치 말라. 그러나 이것을 올무로 하지 말라! 각기 은사가 다르니 은사대로 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삶인가를 깨달아 결혼을 하든지 않든지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본론 및 결론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굳이 상황을 바꾸려 하지 말라!

1. 종교적 상황 (할례, 무할례) /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18-19) 물론 이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내세웠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입교하는 사람들은 유대인의 이러한 할례에 대한 자세에 무언가 자신은 유대인 할례 받은 신자에 미치지 못하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바울은 할례에 대해서 자신이 유대인 이면서도 오히려 부정적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유를 얻은 성도가 육신의 모양을 내려고 할례를 받으면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종이 된다고 말씀함으로써 이것이 불필요할 뿐 아니라 오히려 사람으로 외적인 모양을 내게 하는 악이요, 스스로 율법의 종으로 매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무할례자이면 굳이 할례를 받으려고 하지 말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여기에 세례를 적용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할례는 원래의 의미를 벗어나 육신의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을 부추기는 자랑거리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이 타락했으나, 세례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고 그 외적 표증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주님께서 믿음의 표로 주라고 명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혈통의 장벽도 외적인 어떤 자랑거리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할례를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느냐 그렇지 않으냐! 인 것이다. 할례를 받은 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망할 것이요, 무할례자라 할지라도 말씀대로 살면 생명과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적용할 것은 결론 부분이다. 외적인 조건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례, 무세례, 직분, 은사,...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촉각을 기울여 힘써야 할 삶의 원리이다. 말씀만이 성도의 생명인 것이다.

) 지혜로운 건축자와 미련한 건축자( 7)

2. 사회적 신분적 상황 (, 자유자) / 종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염려치 말라! (21- 24) 자유할 수 있거든 자유하라! 그러나 이를 위해 너무 염려하고 애쓰지 말라!

왜냐하면 / 너는 주님께 속한 자유자다. (22) 그리고 자유자도 실은 주님께 속한 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유롭다고 해서 마음대로 방종해서는 안 된.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중심으로 모든 처신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23) / 이는 신분상이 아니요, 영적인 차원이다. 비록 육신은 종의 신분이나 육신의 종의 마음을 갖고 살지 말아. 너는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누려라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충성된 일꾼이 되어서 네게 맡겨준 그 일들을 자유롭게 순종하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눈가림만 하지 말고(이것은 종이다.) 주님 앞에서 하라! ( 이는 주님의 종이요, 자유의 종이다.)

여기에 진정한 사회혁명이 있는 것이다. 남과 북 TV 영화에서 남부인임에도 불구하고 흑인 노예에게 글을 가르치고 언제든지 원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여기에 신분상은 비록 노예와 상전의 입장이었으나 더 이상 신분상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오늘날 왜 수많은 노사분규가 있는가? 왜 가난한 자는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 부자들은 왜 자신의 부로서 아성을 쌓고 풀 줄을 모르는가? 바로 이와 같은 복음의 정신이 그들 안에 없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신자들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바로 자신이 자랑하고 신뢰하는 그것,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다고 고백하는 돈과 명예와 지위로 인해서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신의 머리에 쌓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라고 제외되지 않는다.

그들은 복음보다 사회적 신분 구분을 우선적으로 한다. 더불어 함께 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한 자를 용납하고 돕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교회 간에도 약한 교회는 더욱 약해지고 강한 교회는 더욱 강해진다. 저들은 약한 교회를 가리켜서 성령의 역사가 없어서 그렇다고 하고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바로 자신이 우리 교회가 이같이 성장한 것은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닌 줄 누가 아느냐?}라고 말할 줄도 생각할 줄도 모른다.

복음에 입각한 하나님의 나라는 없고 오히려 세속주의 물질주의 자본주의 개인주의적 사고만이 팽배해 있다. 이것은 사탄의 나라이다. 교회가 한 단체로서의 파워는 강하나 다른 지역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전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반목질시하는 모습을 본다. 하나가 되자고 하는 설교는 사실은 {단지 우리 교회만 하나가 되어서 파워를 형성합시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을 내고 우리의 영광을 나타냅시. 하나님은 우리 편만 되심을 보여 줍시다.} 하는 바벨탑을 쌓았던 이들의 외침정도 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가난하고 무식한 자는 교회에서 공동체로 대접받지 못한다. 이것은 크게 깨닫고 회개할 문제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회문제 해결은 영적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면서 자신을 희생하고 서로 종노릇하는 것뿐이다. 이제 결론을 맺는다.

결 론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4) / 이는 참으로 중요한 메시지이다. 세상의 기준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요, 어떤 지위에 있는가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성도의 기준은 신분과 삶에 있어서 그 영역이 중요한 것이 아니, 어디 있든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 구성원은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전도 종도 대통령도 청소부도 다 필요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각 분야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다 엘리트만 되려 하고 다 높아지기만 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바로 이것이 없어서 오늘날 이 사회가 점점 어두워 가는 것이다. 이 의식은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혹 어떤 이는 말한다. 아무리 나 혼자 해도 다른 이가 보조를 맞춰주지 않기에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갈등관계에 있는 상대방이 그와 같이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내게 향하신 말씀이기에 내가 순종하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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