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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장 성경 좋은 말씀] 일곱 교회들에게 주신 교훈(계 3:1-22)

복음의 능력 2021. 12. 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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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장에서 예수님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데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사데 교회는 책망을 받았는데 죽어 있다고 했습니다. 육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을 듣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 교회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이 토해 버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면서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일곱 교회들에게 주신 교훈(계 3:1-22)

 

요한계시록 3장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들의 목사들에게 주신 교훈이다. 그것은 신앙과 행위의 온전함, 바른 신앙의 보수, 확신 등을 강조한다.

1-6, 사데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고 계신다. 성령을 일곱 영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과 통찰력을 나타내신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 곧 성령과 본질적으로 일체가 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와 지식, 또 그의 통찰력은 완전하시고 충만하시다.

주께서는 사데 교회의 목사의 행위를 아셨고 그의 행위에 근거하여 그를 판단하셨다. 우리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혹은 불완전한 말만 듣고 사람을 판단하기 쉽지만, 주께서는 그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신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마음과 인격의 표현이다. 사람의 말은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감출 수 있고 심지어 위선적일 수도 있으나, 사람의 행위는 그것을 그대로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사람의 마음도 판단하시지만, 특히 행위에 근거하여 사람을 판단하신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다. 그와 그의 교회는 사람들의 보기에 매우 활동적이었고 또 그렇게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활동적이라는 것이 교회가 건전하다는 표시는 아니다. 이단들도 매우 열심이 있고 이방종교인들이나 공산주의자들도 그러하다. 열심이 있다는 것이 진리를 소유한 표시는 아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이냐, 어떤 성질의 열심이냐가 중요하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이었다. 죽었다는 말은 영적 의미이다. 그는 육신적으로는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죽었다고 간주되었다. 그의 활동은 참된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행위들은 위선적이었다. 참된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헛되다. 그의 믿음은 생명 있는 믿음이 아니었다. 참되고 선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이 말씀을 보면, 사데 교회의 목사는 아직 완전히 죽은 상태는 아닌 것 같다. 그에게 남은 바가 있었다. 그것은 복음 신앙의 뿌리이었고 연약한 생명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죽을 처지에 있었다. 그 남은 것을 그냥 내버려 두면 결국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목사는 그것을 굳게 붙잡아야 했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행위의 온전함은 경건과 거룩, , , 진실을 가리키고, 행위의 결함은 죄와 도덕적 부족을 가리킬 것이다. 사데 교회의 목사에게는 행위의 온전함이 없었다.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성도가 받고 들은 것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진리이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그것을 다시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해야 하였다. 생각한다는 말은 기억한다는 말이다. 과거의 기억은 유익하다. 특히 구원의 기억이 그러하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통일찬송가 405). 우리는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회개케 하셨고 예수님 믿게 하셨는지 기억하고 회개해야 한다. 과거에 받은 은혜에 대한 기억은 오늘과 내일의 신앙생활에 힘이 된다.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셔도 그 목사가 일깨지 않으면 주께서 도적같이 그에게 임하실 것이며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보통, 교인들의 영적 상태는 목사의 영적 상태를 따라가지만, 사데 교회는 예외가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영적으로 죽었으나, 그 교회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주와 함께 다닐 자들이었다. 그들은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흰옷은 순결을 의미한다.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흰옷이며 의롭다 하심을 얻는 참 믿음 곧 속죄 신앙이 흰옷이다. 또 이 의 안에서 바른 믿음을 지키고 선행에 힘쓰는 것이 성도들의 흰옷이다. 그러나 흰옷을 입은 자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많은 이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죄의 낙을 누렸다. 노아 시대에도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는 다 멸망을 당했다. 좁은 길로 가는 자들은 적다.

[5-6]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우리는 흰옷 입은 목사, 흰옷 입은 직분자들, 흰옷 입은 성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흰옷 입은 무리의 수에 들어야 한다. 성도가 구원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고 또 그 의 안에서 의를 행하는 것이 흰옷이다. 그러나 죄를 짓는 자는 흰옷을 더럽히는 자요 영적으로 죽어 가는 자이다.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 흰옷 입은 자와 흰옷을 더럽히는 자, 둘 중의 하나이다.

흰옷 입은 자들의 구원은 확실하다. 주께서는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지우지 아니하고 그것들을 하나님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실 것이다. ‘이름을 흐린다는 말은 이름을 지워버린다는 뜻이다. 주님만 바라고 죄를 대항하고 의를 행하는 자들의 구원은 확실하여 주께서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워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흰옷을 더럽히는 자들 곧 범죄하는 자들의 구원은 보장될 수 없다. 사람이 죄 가운데 살면서 구원을 말하는 것은 헛된 소망이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믿고 구원받은 후에도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주의 뜻을 따라야 한다.

1절부터 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떠들썩한 외모나 평판만 가지지 말고 참 믿음과 선한 행위의 실질을 가져야 한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파악하고 굳게 지켜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기본적 내용을 보수하고 그것에 합당한 경건하고 선한 행위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흰옷 입은 자가 되는 것이요 흰옷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참으로 믿는 자들은 이기는 자들이 될 것이다.

7-13,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7-8]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이는]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아니하였음이라].”

주께서는 거룩하시고(7:26) 진실하시다. 또 그는 다윗의 열쇠로 천국 문을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14:6).

주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열린 문을 주셨다. 그것은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이다. 열린 문은 천국의 확실한 보장을 가리킨다. 주께서 여시면 닫을 자가 없고 주께서 닫으시면 열 자가 없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위해 주께서는 천국 문을 여신다. 주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신다.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주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열린 문을 주신 이유는, 그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린 문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인간 편에서 볼 때 그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수하고 실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다. 빌라델비아 교회 목사는 큰 재능을 가진 자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주의 말씀을 지켰고 주의 이름을 부인치 않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열린 문, 곧 천국의 확실한 보장이었다.

우리는 힘이 없다고 핑계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래서 두렵고 떨릴지라도, 힘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의 이름을 배반하거나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순결과 절개를 지켜야 한다. 그것은 깨끗한 신앙생활을 말한다. 그것은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경건하게 살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 세속의 죄악 된 풍조에 물들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교회 중심으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작은 힘으로도 주를 진실하게 믿고 따라야 한다.

[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주께서는 유대인들의 모임을 사탄의 모임이라고 부르셨다. 구약 교회인 유대인들의 모임은 부패되고 타락하여 사탄의 모임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였고 신약교회를 핍박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15-16,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러나 주께서는 그 유대인들 중 몇 사람이 빌라델비아 교회 목사 앞에 굴복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 신실한 목사에게 내리시는 보상이었다. 주께서는 자신이 빌라델비아 교회 목사를 사랑한다는 것을 이 일로 증거 하실 것이다. 주의 성도들과 종들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살아계심과 그들을 사랑하시고 위하심을 종종 현실 속에서 이렇게 나타내시는 것이다.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주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한 가지 더 복된 약속을 주셨다. 그것은 주께서 친히 그를 지키어 장차 온 세상에 임할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시험의 때는 대환난의 때를 가리키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은 그 목사가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고 하늘로 올리우는 것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대환난을 겪을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요한계시록 7:14,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시험과 환난의 때를 면하는 은혜가 예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옛날 애굽의 10가지 재앙 중에 그 재앙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고센 땅과 같은 은혜일 것이다.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주께서는 단지 한 가지를 그 목사에게 요구하셨다. 그것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른 신앙의 보수를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신앙을 굳게 잡아야 한다. 그것이 장차 우리가 받을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범죄하고 회개치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장차 받을 면류관, 곧 영광을 빼앗길 것이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고 우리에게 예비된 천국의 영광을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주께로부터 받은 말씀 안에 굳게 서고 유일한 복음인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을 굳게 잡아야 한다.

[12-13]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참된 성도를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2:21-22).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집이다. 또 그들은 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다. 또 주께서는 이기는 자들에게 세 가지 이름, 즉 하나님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 주의 새 이름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 예루살렘 성의 백성으로, 또 주 예수의 사람들로 불릴 것을 암시한다.

7절부터 13절까지의 본문은 무슨 교훈을 주는가? 우리는 본문에서 한 가지 분명한 교훈을 받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이미 가진 복음 신앙을 굳게 잡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능력이 크든지 적든지, 우리는 주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말씀을 지켰고 주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사도들과 선지자들로부터 받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 즉 개혁신앙을 잘 파악하고 끝까지 지키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보수신앙이나 옛 신앙은 바로 그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간직하자.

14-22,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4-16]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 . .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편지하라.] 아멘[진실]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주님은 진실하시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다. 그는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하셨고 그 모든 말씀을 참되게 증거 하셨다. 주께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 목사에게 교훈하시는 뜻이 있어 보인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주께 충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표현하셨다. 고대의 헬라 철학자들은 우주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근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며 철학자들의 근본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시다.

주께서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셨다. 차거나 덥다는 것은 주의 복음과 일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주의 복음을 거절하거나 대항하지는 않았으나 주의 복음과 일을 위해 열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주께서는 이런 미지근한 태도보다는 분명한 태도를 원하신다. 즉 믿는가, 믿지 않는가 확실한 태도를 취하고 믿으려면 확실히 믿으라는 것이다. 미지근한 태도는 믿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고, 오히려 참 믿음에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자신을, 믿는 자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이런 미지근한 태도를 미워하신다. 미지근한 태도는 일종의 위선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짓과 위선을 가장 미워하신다. 주께서는 우리의 바르고 진지한 믿음과 확신을 원하신다.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적으로 즉 교인 수나 재정에 있어서 부요했던 것 같다. 그 교회 목사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고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네가 가난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물질적으로 부요하였으나 영적으로 빈곤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곤고함과 가련함과 가난함과 눈멂과 벌거벗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서머나 교회의 목사의 경우와 정반대이었다.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외적으로는 빈곤하였으나 내적으로는 부요하였다(2:9).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외적으로는 부요하였으나 내적으로는 빈곤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물질적 부요를 크게 여기시지 않고 우리의 영적인 부요를 크게 여기신다(눅 12:21).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불로 연단한 금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 곧 확신을 가리킬 것이다. 베드로전서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다. 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안약은 영적 세계, 하나님의 세계, 진리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성령의 지혜와 지식을 가리킬 것이다.

이 모든 처방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살 수 있다. 주님에게서 산다는 말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소유라는 것을 나타낸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들을 사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보화를 다 드려야 살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내가 나를 부인하고 그에게 그것들을 요청할 때 그는 그것들을 값없이 은혜로 내게 주신다. 이사야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 . . .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책망과 권면, 회개의 촉구는 다 주의 사랑에서 나온다. 주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많은 부족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오래 참고 또 책망하시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버려두시거나 아니면 벌써 쳐서 데려가셨을 것이다. 부모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매를 때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친구에게 충고한다. 만일 우리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종에게 열심을 품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12:5-6,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20-22]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님을 문밖으로 쫓아낸 그는 문을 열고 그를 영접해야 했다. 목사인 그는 주를 마음 중심에 모시지 못했다. 주께서는 그의 몸을 성전 삼지 못하시고 그를 떠나 계신다. 그것은 매우 비정상적 경우이다. 그러나 회개한 자는 즐거운 식탁 교제, 즉 교제의 회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또 우리는 이기는 생활을 할 때 심판 날에 주의 보좌에 함께 앉고 그와 함께 아들로서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14절부터 22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해야 한다. 라오디게아 목사의 문제는 미지근한 데 있었다. 그는 확신이 없었음에 틀림없다. 그에게는 주님께 대한 불신앙과 의심이 있었다. 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지 않고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시력이 없었다. 그는 세상적인 가치관과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미지근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과 그의 복음 진리를 확신하고 의롭다 하심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무슨 잘못이 있을 때 그것을 즉시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열심으로 회개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주님과의 교제의 회복, 즉 말씀의 깨달음과 기도의 문의 열림을 경험할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성경 좋은 말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갈 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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