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사도행전 7장 강해설교말씀]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행 7:1-60)

복음의 능력 2021. 11. 30.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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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장에는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대제사장 앞에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구원자라는 것을 증거 합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했던 잘못된 신앙의 형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순교당했습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다가 죽었습니다. 지금도 복음을 전할 때 율법주의자들은 싫어합니다.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아야 하는데 자기의 의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자들은 듣기 싫어합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을 믿음으로 구원받게 됩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행 7:1-60)

 

본장은 스데반의 설교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스데반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먼저 간략히 증거하였다.

1-16, 아브라함, 야곱, 요셉

[1-3]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스데반 집사는 구약성경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었으나, 사도들의 지식에 비하면 그의 지식은 불완전하여 보인다. 그는 당시 통용되는 헬라어역 성경과 당시의 유대인의 전통적 견해에 익숙해 있었다고 보인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즉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이 사실을 명확히 계시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에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가족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하란에 와 거하였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므로 그가 하나님의 명을 좇아 하란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11:31-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란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는 것이었음은 두말할 것이 없다. 창세기 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느헤미야 9:7,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우상숭배의 환경을 떠나 하나님 중심의 새 민족과 새 국가를 시작하라는 명령이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땅은 가나안 땅이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실 천국을 예표하였다. 이 세상은 우상숭배로 병든 장망성(將亡城)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 패역한 세상에서 구원받기를 원하신다(2:40).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죽은 후에](원문, NASB, NIV)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을 떠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창세기 본문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에 죽었고, 아브람은 75세에 하란을 떠났다고 기록한다(11:26, 32; 12:4). 아브람이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을 떠났다면 그는 데라가 130세에 낳은 아들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는 말씀에 조화되지 않는다. 아브람이 세 아들들 중 막내라고 가정해도 큰 형과의 나이 차이가 60년이나 된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차라리 아브람은 데라가 70세에 낳은 아들이었고 그가 75세에 하란을 떠날 때 데라는 아직 145세이었고 아브람이 그곳을 떠난 후에도 60년이나 더 하란에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창세기 11장 끝에 데라는 205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는 말은 그 사건이 12장의 사건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것을 의미하지 않고 단지 창세기 저자가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었다고 본다(25:17; 35:28 ).

[5-7]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약속하셨으나 아직 그곳을 차지할 때는 되지 않았고 단지 약속하셨을 뿐이다. 아직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의 자손들은 이방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해야 했고 400년 동안 종살이의 고통과 학대를 당해야 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학대했던 그 나라를 심판하시고 그들을 그곳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과 나라가 되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오랜 세월 후의 일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 신약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도 오랜 세월 후의 일에 대한 약속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표로서 할례의 규례를 주셨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를 덮고 있는 표피 끝을 베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죄악성을 잘라내는 성결을 상징하였다. 그것은 중생(重生)을 의미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먼저 죄씻음을 받아야 한다. 죄가 인간의 죽음과 불행의 원인이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요지는 사람이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죄성은 정결함을 얻어야 하고 거룩과 의의 새 마음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다.

[9-10]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는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다. 시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한 무서운 죄악이다(27: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하셨고 모든 환난에서 그를 건져내셨다. 물론 요셉은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나님께서는 성결한 삶을 기뻐하신다. 성결한 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복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죄짓지 않는 거룩한 삶을 지키려고 애쓴 요셉을 기이한 방법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다.

[11-14] 그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요셉을 먼저 애굽에 보내셔서 총리가 되게 하신 것은 가족들을 구원하시려는 뜻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것과 같았다.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든 큰 흉년에서 야곱의 자손들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통해 구원을 얻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이한 구원이었다. 요셉은 아버지와 형제들을 애굽으로 초청하였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거주하게 된 연유이었다. 이 점에서 창세기는 출애굽기에 꼭 필요한 역사적 배경이 된다.

스데반은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을 청하였다”고 말했다. 그것은 당시에 많이 사용되었다고 보이는 구약 70인 헬라어역 성경에 근거한 내용이라고 보인다. 그 헬라어역 성경 창세기 46:20은 야곱의 자손으로 애굽에 내려간 자들의 수의 도합을 75명으로 말하는데, 그 수에는 요셉의 손자 5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은 그들을 뺀 70명만을 말한다.

[15-16]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스데반은 야곱과 그 자녀들이 다 세겜에 장사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략적 표현이었다. 야곱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산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되었고(50:13), 요셉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산 땅에 매장되었다(24:32; 33:19). 그 외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들은 아마 요셉처럼 세겜에 묻혔을 수도 있다. 또 스데반이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무덤을 샀다고 한 말은 정확하게 말하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샀다는 뜻으로 새겨 읽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스데반이 언급한 구약 역사 속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부르셨고 지금도 우리에게 불경건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 중심, 천국 중심의 삶을 살라고 명하신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며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요일 2:15-17). 우리는 하나님을 소망하고 섬기며 천국을 바라보며 오직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표요 죄씻음의 상징인 할례의 규례를 주셨듯이, 우리에게는 세례의 규례를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고 세례를 받은 자들일진대,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할 삶은 오직 한가지이니 곧 죄가 없는 성결한 삶이다. 우리는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시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죄가 많은 곳에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어떤 환난 속에서도 낙심치 말고 오직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힘써 행하자.

17-36, 모세를 부르심

[17-19]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요셉을 국무총리로 등용했던 애굽 왕은 애굽의 역사에서 중왕국시대(주전 2000-1780년경) 12왕조 중 아마 센우스레트 3(대략 주전 1888-1852년경)이었을 것이며, 본절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은 신왕국시대(주전 1546-1085년경) 18왕조 때를 가리킬 것이다. 그때 애굽 왕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그들을 학대하였고 산파들로 하여금 남자 어린아기를 나일강에 던지도록 명령하였다(1:8-22).

[20-22]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소피아)[지혜, 학문]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모세의 출생 시기는 이렇게 민족적으로 어려운 때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모세는 출생하자마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을 그의 기쁘신 때에 그의 기쁘신 방법으로 이루신다.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다. 그는 부모의 집에서 단지 석 달을 길리우고 나일강에 버림을 받았지만, 강에 목욕하러 나왔던 바로의 딸이 그를 발견하고 측은히 여겨 데려다가 자기 아들같이 길렀다. 모세의 어머니는 그의 유모로 소개되어 아기를 양육하게 되었다(2:1-10). 모세는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어머니의 품 속에서, 기도와 사랑 속에서, 또 경건한 교훈 속에서 자랄 수 있었다. 애굽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의 왕궁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양육시키셨던 것이다.

모세는 40년간 애굽 사람의 지혜와 학문을 다 배웠다. 그는 당시 가장 좋은 궁중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말과 행위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법을 배웠고 많은 신체적 훈련도 받았을 것이다. 그의 몸은 튼튼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 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었다고 보인다.

[23-25]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사람이 사명을 느끼는 때는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40세는 일반적으로 늦은 감이 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부족했다. 그는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그를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해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였다. 그는 몸이 건장하고 싸움도 잘했던 것 같다. 그에게는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의감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또 사람을 죽이는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없었고 이스라엘 동족들도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신다고 생각해주지 않았다.

[26-29]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그의 젊은 꿈은 여지없이 꺾이었고 좌절과 포기의 삶을 살아야 했다.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며 민족을 위해 고상한 꿈을 가졌던 그가 하루아침에 들판의 양치기로 변해 있었고 날마다 그 일에 전념했다.

[30-35]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긴 세월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것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자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특별 훈련의 기간이었다. 40년 동안 모세는 자신을 비우는 겸손 훈련을 철저히 받았음에 틀림없다. 또 그는 많은 인내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또 하나님과 많은 교제를 나눴을 것이다. 광야는 그에게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에게 기도하는 가장 적합한 장소이었다. 미디안 광야 40년은 모세에게 겸손과 인내와 기도의 훈련 기간이었다.

40년이 찬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모세는 그 광경을 기이히 여기며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려왔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지금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이었다. 그것은 모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르심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그의 기쁘신 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때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절했던 그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인도자와 구속자(救贖者)로 부르셨다.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였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40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한 자이었다. 많은 어려운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끝까지 사용하셨다.

17절로 36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자. 모세는 죽임을 당할 시대적 환경 속에서 출생했지만, 하나님의 기이한 보호와 양육을 받았다. 모세 시대의 하나님은 또한 오늘날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어렵고 힘든 환경에 위축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자.

둘째로, 우리는 겸손 훈련, 인내 훈련, 기도 훈련을 잘 받자. 모세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실패하였다. 그러나 40년간 미디안 생활을 통해 자신을 꺾고 겸손 훈련, 인내 훈련, 기도 훈련을 잘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셨고 그를 세우셨고 사용하셨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훈련된 자를 들어 사용하신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믿자.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자신이 그 일을 할 능력이 없다고 여러 번 사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셨고 세우셨고 보내셨고 사용하셨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신 일이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실 수 있고 이루실 것이다. 우리의 성화도, 우리의 봉사도, 전도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무능과 연약만 생각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그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자.

37-50, 우상숭배에 떨어짐

[37-38]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주 우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한 자이었다. 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는 메시아를 가리켰다고 본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는 참 선지자이시다. 그는 모세보다 더 탁월하신 분이시다.

모세는 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하였다.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는 십계명을 선포하시고 율법을 주셨던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 같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동일시되시는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다고 본다. 스데반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교회라고 불렀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모세는 그들과 함께 있었고 생명의 도[살아있는 말씀]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글자나 소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친 음성이다(4:12; 23:29).

[39-41]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이스라엘 조상들은 모세에게 복종치 않았고 그를 거절했다. 그들의 마음은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였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보내셨고 그의 말씀을 전한 자이었으나, 부패한 백성은 그에게 복종치 않았고 그를 거절했다. 그들은 도리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애굽은 하나님 없는 세상이다. 애굽에서의 생활은 물질 중심, 쾌락 중심의 죄악된 생활이다. 거기에는 술취함과 방탕함이 있었고 경건함이나 거룩함이나 절제함이 없었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세상적인 삶을 좋아할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 시내산 위로 올라간 후, 이스라엘 백성은 40일을 참고 기다리지 못하여서 아론에게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청하였다. 아론은 모세의 동역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였다. 그들은 우상숭배에 떨어졌다. 그것은 십계명 중 제1, 2계명을 범하는 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제사하며 기뻐했다. 그들은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32:18-1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 크게 노하셨다. 그는 그들을 다 완전히 멸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그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가로막고 그들을 용서하시기를 간구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말을 들어 그들을 당장 다 멸하지는 않으셨으나, 그 날에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한 레위 지파 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3천명이나 죽임을 당했다.

[42-43]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시는 데서 돌이키셨고 그들을 우상숭배에 버려두셨다. 본문은 송아지 숭배가 하늘의 군대 곧 별 숭배의 일이라고 말한다. 광야의 송아지 숭배는 이스라엘 열왕 시대의 바알과 아세라 숭배와 일월성신 숭배로 이어져 내려갔다. 스데반은 구약 아모스 5:25-27의 글을 인용한다. 그가 인용한 구절은 히브리어 성경 본문이 아니고 당시에 사용되었던 헬라어역 본문이라고 보인다. 단지 맨끝의 말이 다메섹 밖에대신에 바벨론 밖에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어 본문은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어 식굿은 헬라어 몰록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바벨론 신을 가리킨다. 히브리어 기윤은 헬라어 레판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로마의 농업 신()인 토성(Saturn)을 가리킨다. 송아지는 농경 사회에서 풍년과 다산(多産)의 신으로 숭배되었고 별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송아지 숭배와 별 숭배에 떨어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히 진노하셨고 그들을 멸망시키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고 바벨론 밖으로 흩으실 것이다.

[44-47]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야곱의 하나님을 위하여 거처](전통본문)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거역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증거의 성막을 주셨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대로 시내산에서 본 모양대로 만든 것이었다. 그 성막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을 때 가지고 들어갔고 다윗 때까지 보존되었다. 성막은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가 있었고, 성막 제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그를 섬길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 중심, 성막 중심으로 살기를 원하였고 성전을 건립하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지 않으셨고 그의 아들 솔로몬 때에 그것을 이루도록 하셨다.

[48-50]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66:1-2)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며 땅은 그의 발받침이다. 천지만물이 다 그의 창조물이다. 창조자 하나님은 피조세계 속에 제한되지 않으신다.

그러면 성막과 성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구름으로 자신의 특별한 임재(臨在)의 표시를 나타내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제한되지 않으신다.

성막과 성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긍휼로 그 백성을 받으신다는 사실에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할 때부터 가나안 정착 후에도, 또한 왕국의 역사 끝까지 항상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막 제도, 성전 제도를 통해 제사장 곧 중보자를 주시고 또 제사를 통해 속죄 곧 죄사함을 주시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과 새 삶을 모형적으로 보여주신 제도이었다. 성막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근거해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말씀과 기도,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고 감사하며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아야 할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의 도() 즉 살아 있는 말씀이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 같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세세무궁토록 영원하다(벧전 1:24-25). 시편 119: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은 이 세상의 금은보화보다 귀하다. 그 말씀은 우리를 살리고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큰 힘과 위로를 주는 말씀이다.

둘째로, 우리는 옛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거역하여 세상으로 돌아가거나 우상숭배에 떨어지지 말자. 우리는 돈이나 명예나 육신적 쾌락에 큰 가치를 두고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다. 요한일서 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우리는 오직 경건하며 절제하며 자족하며 살자.

셋째로, 우리는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안에 거하며 그의 피로 죄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 안에서 힘을 얻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감사하며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는 성전답게 모든 죄악된 행위와 습관을 버리고 거룩의 열매를 맺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실천하자.

51-60, 스데반의 순교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거슬러]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목이 곧다는 말은 교만하고 마음이 완고하다는 뜻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반복해서 이런 책망을 받았다(32:9; 33:3, 5; 34:9; 9:6, 13; 10:16; 31:27; 대하 30:8; 36:13; 17:23).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없고 깨닫는 마음이 없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중생하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 스데반은 그들이 바로 그런 자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항상 성령을 거슬러 그 조상들과 같이 한다고 말했다. 교만과 무지(無知)는 하나님을 거역케 하고 그의 말씀을 불순종케 만든다. 하나님의 바른 종들은 옛날부터 책망의 설교를 많이 하였다.

[52-53]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본문이 말하는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 중에 유일하게 죄 없는 분이시다(4:15; 7:26; 요일 3:5). 메시아는 죄 없는 자이어야 많은 사람들의 대속 제물이 될 수 있다. ‘잡아준 자라는 원어(프로도타이)는 ‘배반한 자들이라는 뜻이다(KJV, NASB, NIV). 유대인들은 그에게서 3년 동안 많은 말씀을 들었고 많은 기적과 병고침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인 예수를 거절하고 배반하였고 정죄하여 죽게 하였다.

[5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렸다. 예수님은 사형당할 만한 악인이 아니셨다. 그들은 예수를 시기함으로 그를 죽였다. 만일 예수께서 그들을 정죄하지 않고 높여주셨더라면,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도 양심으로는 예수께서 좋은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다. 그들의 악한 감정은 이미 그들의 이성과 양심을 어둡게 만들었다. 얼마 전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회개하여 3천명이나 세례를 받았었으나, 지금 스데반 앞에 있는 공회원들은 도무지 회개하지 않았다.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는 결코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55-56]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성경은 계시 사건 때에 하늘이 열렸다고 종종 증거한다(겔 1:1; 3:16; 10:11; 19:11). 스데반은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9번이나 말하였으나(8:34; 1:20; 3;1; 1:3; 8:1; 10:12; 12:2; 벧전 3:22; 3:21), 그가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다는 표현은 본절뿐이다. 이것은 주께서 핍박당하는 스데반을 후원하심을 나타낸다.

[57-58]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공회원들에게는 들을 귀도, 깨닫는 마음도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스데반이 순교당하는 날에 사울은 가까이에서 그의 죽음을 보았었다.

[59-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누가는 스데반의 최후에 대해 두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 스데반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였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하나님을 확신했고 천국과 내세를 확신했다. 둘째, 스데반은 원수의 죄의 용서를 하나님께 빌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교훈과 모범을(5:43-44; 눅 23:34) 실천한 것이었다.

본문에 잔다는 말은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죽음에 대한 표현이다. 밤에 잠자는 자들이 아침이 되어 깨듯이,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부활할 때가 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이다. 그때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고전 15:51-52; 살전 4:16-17).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겸손함과 진리의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자.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겸손함과 진리의 깨달음이 없다면, 유대인의 공회원들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순종을 원하신다. 사무엘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둘째로, 우리는 스데반의 순교를 본받자. 하나님과 주 예수께 대한 참된 믿음과 충성은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할 것이다. 순교는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천국과 내세와 우리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며 우리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할 때 가능하다.

셋째로, 우리는 스데반의 사랑과 용서의 실천을 본받자.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하였다. 그것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교훈과 모범을 지키고 본받은 것이다. 우리도 원수까지 사랑하고 원수들의 죄의 용서를 하나님께 구하자.

[신년 예배 새해 주일 설교말씀] 산 소망으로 거듭납시다(벧전 1:1~25)

 

[신년 예배 새해 주일 설교말씀] 산 소망으로 거듭납시다(벧전 1:1~25)

우리가 한 해를 마무리가 하고 오늘은 신년 새해 주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올 한 해를 하나님 뜻 안에서 온전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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