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고린도전서 7장 복음 설교말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자(고전 7:1~40)

복음의 능력 2021. 12. 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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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7장에는 결혼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결혼에 대해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번성의 복을 주셨기 때문에 결혼을 하라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여 한 가정을 꾸려 살다 보면 부부간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성경은 이혼을 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준 사람은 버리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많은 성도들이 이혼한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결혼에 대해서 생각하고 배우자를 만나서 좋은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겠습니다.

 

제목: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자” (고전 7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고전 7:1~40

 

요절: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고전 7:19)

주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자.

고린도전서 7장은 독신생활, 결혼생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5-7장에서 정결한 가정생활을 다루고 있습니다.

 

1. 남편과 아내의 결혼의 원리들(고전 7:1-9)

 

1 이제 너희가 내게 쓴 것들에 관하여 말하건대 남자가 여자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둘지니라. 3 남편은 아내에게 합당한 애정을 베풀고 아내도 남편에게 그와 같이 행할지니라. 4 아내가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아내가 하느니라. 5 너희는 서로를 속여 권리를 빼앗지 말라. 너희가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동의를 구해 얼마 동안 그리하는 것은 예외이나 다시 함께하라. 이것은 너희가 참지 못함으로 인해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나는 명령으로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고 허용된 것에 의거하여 말하나니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사람마다 하나님께 받은 고유한 선물이 있어서 한 사람은 이러하고 다른 사람은 저러하니라. 8 그러므로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말하노니 그들이 나처럼 지내는 것이 그들에게 좋으니라. 9 그러나 그들이 억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게 하라. 불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1절. ‘가까이 하다’는 원어(합토마이 ἅπτομαι)는 ‘만지다, 붙잡다, 육체적 관계를 가지다, 결혼하다’는 등의 뜻을 가집니다. 본문은 남자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처럼 보이나 결혼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이 제정하신 좋은 제도입니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잠언 18:22,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결혼은 죄가 아니며(고전 7:28) 결혼을 금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생각입니다. 디모데전서 4:1-3, “하나님의 영(the Spirit)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마귀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바울이 사람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 까닭은 임박했던 환난 때문입니다. 26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심한 죽음의 환난이 닥치면 가족 관계는 즐거움과 행복이 아니라 근심과 짐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성도는 결혼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2-33절, “결혼하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하되 결혼한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오늘날도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기를 원하는 자는 독신(獨身)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2절. 독신(single)의 장점이 확실히 있지만, 사도바울도 결혼을 권하고 있습니다. 결혼의 목적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서로 교제하며 돕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교제하며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랑의 교제는 결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었습니다. 두 번째 목적은 자녀 출산을 위함입니다. 창세기 1:27-28,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결혼의 세 번째 목적은 음행의 방지를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며 성도는 세상에서 음행의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통해 이런 시험을 물리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결혼은 음행에 대한 최선의 방지책입니다. 잠언 5:18-19는,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하십니다.

 

3-4절. 결혼한 남녀는 남편과 아내로서의 자기의 의무들을 다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다정한 표정과 따뜻한 말로 그 사랑을 표현해야 하며 경제적 책임도 다해야 하며, 아내는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 양육, 식사 준비, 빨래, 집안 청소 등을 감당함으로 남편이 바깥일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의무들은 부부생활의 의무도 포함합니다. 아내도 남편도 이제는 자기 몸을 자기가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결혼한 자는 이제 한 몸이므로, 자기 몸을 상대방이 주장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부부의 감정은 항상 동일하지 않기에, 상대방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는 언제나 그의 필요를 만족시켜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부부 관계에 불만과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5절. 기도와 금식 외에는 ‘서로의 권리를 빼앗지 말라(defraud ye not)’는 말로서 상대방이 원할 때 거절치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위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금식과 기도하기 위해 분방할 경우도 부부가 서로 합의해서 할 것이며 기간도 너무 길지 않게 ‘얼마 동안’ 해야 합니다. 부부가 분방치 말아야 할 이유는 절제 못함을 인해 사탄으로 시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절제심이 많으면 좀 더 긴 기간도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사탄의 시험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사탄은 항상 인간의 약점을 공격합니다. 각 사람마다 다른 약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육신적인 감정과 욕망은 인간의 공통적 약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일에 있어서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신앙생활과 부부생활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 좋은 사람은 부부관계도 좋아야 합니다. 부부간에 다투는 일이 있더라도 각방을 쓰지 말고 속히 화합해야 합니다.

 

6-7절. 바울이 결혼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명령(commandment)이 아니고 허용(permission)하는 것뿐입니다. ‘허용’이라는 말은 명령보다는 약한 권면이나 충고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미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 말했고 또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8절). 이 말씀들에서 그는 분명히 독신(獨身)의 유익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결혼이 두렵다거나 귀찮아서가 아니고, 또 자유분방하게 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독신이 유익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독신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가 있어야 가능합니다(마 10:10-12).

 

8-9절.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나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고 권면합니다.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낫습니다.” 사람은 감정과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면 범죄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감정은 결혼을 통해 정당하게 해소되는 것이 좋습니다(딤전 5:14). 결혼의 한 목적은 음행을 방지하는 데 있습니다. 또 결혼한 자는 부부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절제의 은사를 주신 자라면 독신으로 하나님의 일들에 전념하며 주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2. 결혼한 자에 대한 추가적 교훈(고전 7:10-24)

 

10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령하노니 명령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주시니라. 아내는 자기 남편을 떠나지 말라. 11 그러나 그녀가 떠나거든 결혼하지 말고 지내든지 아니면 자기 남편과 화해하라. 또한 남편도 자기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주가 아니라 내가 말하노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않는 아내가 있는데 그녀가 그와 함께 살기를 기뻐하거든 그는 그녀를 버리지 말며 13 또한 여자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는데 그가 그녀와 함께 살기를 기뻐하거든 그녀는 그를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않는 남편은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히 구별되고 믿지 않는 아내는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히 구별되었나니 그렇지 않으면 너희 자녀들도 부정하였을 터이나 이제 그들이 거룩하니라. 15 그러나 믿지 않는 자가 떠나거든 떠나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그런 경우에 속박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느니라. 16 오 아내여, 네가 네 남편을 구원할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 남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부르심을 받은 대로 살라 17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대로, 주께서 각 사람을 부르신 대로 그는 걸을지니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같이 규정하노라. 18 어떤 사람이 할례 받은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냐? 그는 무할례자가 되지 말라. 누가 무할례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냐? 그는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요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뿐이니라. 20 각 사람은 자기가 부르심을 받을 때 머물던 그 동일한 부르심 안에 머물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그것을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한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으니 너희는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각 사람은 자기가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그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머물라.

10-11절. 결혼한 자들은 서로 나뉘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9: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이혼의 합당한 경우는 상대방이 음행했을 경우입니다(마 5:32). 그러나 정당한 이혼의 경우에는 재혼이 가능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5. “...결혼 후 간통한 경우에 결백한 사람이 소송을 제기하여 이혼하는 것은 합법적이고, 그렇게 이혼한 후에는 마치 죄지은 상대방이 죽은 것처럼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마 19:9; 롬 7:2-3)고 되어 있습니다.

 

12-13절. 부부 중에 한쪽만 믿고 다른 쪽은 믿지 않는 경우, 만일 믿지 않는 쪽이 함께 살기를 좋아하면 믿는 이는 그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가 믿는 자와만 결혼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기본적 원리입니다(고전 7:39; 신 7:1-4).

 

14절. 결혼을 통해 배우자를 전도하는 일은 좋은 것입니다. 믿는 배우자를 통하여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거룩하게 구별될 수 있습니다. 물론 본인이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지만, 그가 아직 믿지 않을지라도, 그와 그의 가정은 이미 세상 사람들과 또 그들의 가정들과 구별되었습니다.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 믿는 가정에 태어난 자녀들도 거룩하여질 수 있습니다. 부모 중 한쪽만 믿어도 그러합니다. 이것은 언약적인 의미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임이 증거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출생합니다. 여기에 유아세례의 근거가 됩니다. 성도의 자녀들이 세례를 통하여 내면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적인 의미에서 거룩한 자녀로 출생하였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15절. 결혼 관계라 하더라도, 부부 중 한쪽이 믿지 않는 경우, 믿지 않는 이가 헤어지기를 원하면 헤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부부 관계보다 우선적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되는 방편이므로 성도에게 절대적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백 년의 지상 생활에 속한 부부 관계보다 앞서야 합니다.

 

16-17절. 믿지 않는 자가 정말 헤어지기를 원할 때, 믿는 자는 거기에 구애받을 것이 없습니다. 믿는 아내나 남편이 믿지 않는 쪽을 구원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날 내가 상대방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그때까지 참고 지내겠다는 것은 결코 최선의 생각이나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형편과 처지대로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18-19절. “어떤 사람이 할례 받은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냐? 그는 무할례자가 되지 말라. 누가 무할례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냐? 그는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요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뿐이니라.” 구약의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할례를 받고 안 받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오늘날 세례[침례] 의식도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은 세례[침례]가 외형적 행위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한다고 가르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침례]는 주 예수님께 대한 참된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참여할 때에만 효력이 있습니다. 참 믿음은 의식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 믿음과 순종의 마음에 있습니다. 로마서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거룩한 영 안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헬라어에 아디아포라(adiaphora, ἀδιάφορα)는 단어는 스토아주의에 의해서 형성된 개념으로, 선도, 악도 아니고, 명령받지도 않고, 금지되지도 않은 것. 비 본질(아=no, 디아포라=matter) 즉 “it dose not matter”(그것이 중요하지 않음)인데 사도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나 중요하지 않고” 진정한 본질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19절)이라고 강조합니다. 바울 서신에서 두 군데 더 아디아포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라디아서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우리는 신앙의 비본질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본질은 반드시 회복하고 집중해야 합니다. 19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오늘의 요절입니다.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요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뿐이니라.”

 

20-23절.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도가 가진 세상적 신분이나 어떤 육신적 조건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옛 시대에 그가 종의 신분이냐 자유인의 신분이냐 하는 것이 세상에서는 매우 중요하겠지만, 주님 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 안에서 다 동등한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골로새서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과거에 주인과 노예(종)이었으나 예수님을 믿고부터 형제가 되었습니다(몬 1:16).

 

전주와 김제 경계 부근에 모악산 기슭에 있는 금산교회(1905년 데이트=“최의덕” 선교사님이 설립)는 기역자(ㄱ) 교회로 지금도 보존되고 있습니다. 강대상에서 우측 마루에는 남성들, 좌측 마루에는 여성들이 앉아 예배드린 곳입니다. 이 교회에 출석하던 지주 조덕삼(1867-1919, 조세형 국회의원 할아버지)과 머슴 이자익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했는데, 이자익은 먼저 장로로 선출되고, 후에 조덕삼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조장로님은 자기 머슴이지만 교회에서 선임 장로로 이장로님을 존경하다가 그에게 신학 공부할 것을 권유하여, 이자익은 평양신학교에 진학하게 해서 공부할 때 조덕삼은 장학금을 제공하였습니다. 공부 마친 후 조장로는 이자익을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초청하여 섬겼다는 미담은 한국교회의 자랑입니다. 그후 이자익 목사님은 두 번씩 총회장을 지내셨고, 대전신학대학교를 설립하셨습니다.

 

23-24절.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사신 바 되었고 이제 그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3. 처녀와 과부에 대한 교훈(고전 7:25-40)

 

25 이제 처녀들에 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명령이 없으나 주의 긍휼을 받아 신실하게 된 자로서 내 판단을 주노라. 26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현재의 고난으로 인해 이것이 좋으니 내가 말하거니와 곧 남자가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 네가 아내에게 매여 있느냐? 벗어나려 하지 말라. 네가 아내에게서 놓여 있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 그러나 네가 장가를 가도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며 처녀가 시집을 가도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들에게는 육신 안에 고난이 있으리라. 오직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29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때가 단축되었으므로 남은 것은 이러하니라. 곧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되고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되며 기뻐하는 자들은 기뻐하지 않는 자같이 되고 사는 자들은 소유하지 않은 자같이 되며 31 이 세상을 이용하는 자들은 남용하지 않는 자처럼 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사라지느니라. 32 그러나 나는 너희가 염려 없이 지내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께 속한 일들을 염려하여 어떻게 주를 기쁘게 할까 하되 33 장가간 자는 세상에 속한 일들을 염려하여 어떻게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4 또한 아내와 처녀 사이에도 차이가 있나니 시집가지 않은 여자는 주의 일들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여자는 세상의 일들을 염려하여 어떻게 자기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5 내가 너희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 말을 하노니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올무를 놓고자 함이 아니요, 다만 합당한 것을 추구하게 하며 너희가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36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의 처녀 딸이 꽃다운 나이를 넘기면 자기가 그 딸에게 합당하지 못하게 처신한다고 생각하며 또 그렇게 할 필요가 있으면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하라. 그가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그들이 결혼하게 하라. 3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음이 확고히 서고 부득이한 일도 없으며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어서 자기의 처녀 딸을 간직하기로 마음속에 그렇게 정하여도 잘하느니라. 38 그런즉 이와 같이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느니라. 39 아내는 자기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법에 의해 매여 있으되 자기 남편이 죽으면 자유롭게 되어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시집갈 수 있거니와 오직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40 그러나 내 판단대로 그녀가 그대로 지내면 더 행복하니라. 또한 나는 내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줄로 생각하노라.

 

25-26절. 독신에 대한 생각은 주님께 받은 계명이 아니라 사도 본인의 견해(판단) 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의견과 판단도 신적 권위를 가집니다(살후 2:15). 이것은 마치 율법을 재 강론한 모세의 신명기가 신적 권위를 가지는 것과 같고 또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은 성도의 찬양과 간증인 시편이 신적 권위를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당면한 환난 때문에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견해를 밝힙니다. 왜냐하면 환난 중에는 아내와 자녀들의 의식주 문제로 인한 많은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19).

 

27-28절. ‘아내에게 매였다’는 말은 결혼의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결혼한 자는 결혼의 의무를 짐스럽게 생각하여 거기로부터 해방되기를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혼한 자는 결혼한 자로서 최선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내는 아내로서 가장 좋은 아내가 되기를 힘쓰고, 남편은 남편으로서 가장 좋은 남편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29-31절. 초대 교회는 환난과 핍박을 당한 교회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에게서,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정부로부터의 핍박이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쓸 때 고린도 교회에는 환난이 닥치고 있었습니다. 자유와 안정과 평안의 때는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짧아졌다는 의식은 주님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을 믿는 모든 성도에게 언제나 필요합니다. 이런 시대에서 볼 때, 아내를 소유한 것이나 소유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또 우는 것과 울지 않는 것, 기뻐하는 것과 기뻐하지 않는 것, 물건을 사서 소유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세상 물건을 쓰는 것과 다 쓰지 못하는 것의 차이도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불같은 환난이 닥칠 때에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이 무슨 좋은 것이 되겠나요?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 속에서 맡겨진 자기의 의무에 충실해야 하지만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거나 그것들에 의존되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1:24-25,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요한일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지나가는 세상이 전부인 양 분주하나 결국 허무한 것뿐이지만,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이 헛된 줄 알고 이 세상 위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내세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32-35절. 결혼한 남녀 성도는 주님의 일을 전적으로 생각하거나 염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일을 염려하고 아내나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이것은 결혼한 자로서 정상적인 행위이며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성도는 결혼한 성도보다 더 주님의 일을 위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고 한다’는 말은 몸으로 범하는 죄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으로 범하는 죄도 짓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독신(獨身)의 유익을 언급합니다. 그가 독신의 장점을 가르침은 성도에게 시험의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요 오직 마음의 흐트러짐 없이 전심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려 함입니다. 그것은 진실한 성도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때가 짧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진실한 성도마다 주님의 일에 전심전력하기 위하여 독신(獨身)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36-38절. 부모가 처녀 딸을 결혼시키는 것은 정당한 일이요 죄짓는 것이 아니지만, 결혼시키지 않고 그로 하여금 주님의 일에 전적으로 힘쓸 수 있게 하는 것도 잘하는 일입니다. 후자가 더 잘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부모는 자녀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며 자녀 스스로가 원해야 할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억지로 하는 것은 자신에게 복이 되지 못합니다. 믿는 일은 더욱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원함으로 그를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39-40절. 부부의 관계에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내가 법적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으나 그 남편이 죽으면 재혼(再婚)할 수 있습니다.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간다’는 표현은 ‘자기가 원하는 자와 결혼할 자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단지 덕을 위하여, 교회 헌법에는 “부부간 일방이 별세한 후에 재혼하려면 별세한 후 6개월이 지나야 결혼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는 말씀은 성도의 결혼의 기본적 원리를 증거 합니다. 성도는 반드시 믿는 자와 결혼해야 합니다. 40절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뜻’이라는 원어는 ‘의견, 판단’입니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는 말씀은 그의 교훈이 한 개인의 의견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깨달은 교훈임을 증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지나갑니다. 결혼 생활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들로 인하여 너무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의 결혼은 당사자들의 행복과 평화의 길로 인도합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독신으로 산다면 철저히 정결하고 거룩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할례를 받든 받지 아니하든 오직 주님의 계명을 지킵시다. 아멘.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저희들의 가정에 천국의 행복을 주옵소서.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자녀들을 믿음으로 키우게 하시고, 뜻이 있어 독신으로 사역을 감당할 때는 주님의 거룩한 신부처럼 단장하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의 말씀만 순종하고 실천하게 하옵소서. 오늘 창조절을 맞이하여 “빛이 있으면 좋겠다” 하신 주님의 소원이 제게도 이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욥기 9장 강해설교말씀] 욥-하나님과 쟁변 할 자 없다(욥 9:1-35)

 

[욥기 9장 강해설교말씀] 욥-하나님과 쟁변할 자 없다(욥 9:1-35)

욥기 9장에서 욥은 빌닷의 인과응보적 말에 대답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쟁변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입니다. 인간은 그릇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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