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갈라디아서 3장 성경 좋은 말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갈 3:1-29)

복음의 능력 2021. 12. 9.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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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율법과 믿음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율법으로는 자유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입니다. 율법은 정죄가 있을 뿐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달았다면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구절이 한 구절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납니다. 원죄의 죄인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려야 합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이 가능합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갈 3:1-29)

 

1-14, 율법주의는 잘못이다

율법주의란 사람이 율법을 행해야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생각이다. 바울은 율법주의의 잘못에 대해 일곱 가지 반론을 제시한다.

[1-2]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증거되었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누가 너희를 꾀어 진리를 복종치 못하게 하더냐?]

율법주의에 대한 첫 번째 반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이다. ‘진리는 은혜의 복음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며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완전케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엑스 아코에스 피스테오스)[믿음의 들음으로]?

율법주의에 대한 두 번째 반론은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복음을 듣고 믿을 때이었다는 사실이다. ‘믿음의 들음으로라는 말은 사람이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을 가지고 듣는 것, 혹은 들을 때 믿음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고넬로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성령께서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고 증거한다(행 10:44).

[3-4]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율법주의에 대한 세 번째 반론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친다는 원어(에피텔레이스데)는 영어성경들처럼 완전케 된다(KJV) 혹은 완전케 되고 있다(NASB)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보인다. 한 영어성경은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한 후에 지금 육신적 노력으로 너희의 목표에 도달하려고 애쓰고 있느냐?”(NIV)는 뜻으로 번역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케 되려느냐?”는 말씀은 사람이 육신적 노력으로는 도덕적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한다. 성령으로 시작된 성도의 신앙생활은 육신적 노력으로 완전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갈라디아서 5:16에서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더욱이, 갈라디아 교인들은 은혜의 복음을 받은 후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했다. 그들이 이제 은혜의 복음을 포기하고 율법주의로 나아간다면 그들이 당했던 많은 고난이 헛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받을 가치가 있는 고난을 받았지 헛된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다.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율법주의에 대한 네 번째 반론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성령의 기적들을 행하신 것이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을 때이었지, 율법을 행할 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본절의 능력이라는 원어(뒤나메이스)는 ‘기적들이라는 뜻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율법을 지킬 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주어졌었다(3:12, 16).

[6-7]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율법주의에 대한 다섯 번째 반론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15: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증거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은 성경 원리에 맞다.

[8-9]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본절은 다섯 번째 반론에 대한 보충적 설명이다. ‘의로 정하신다는 원어(디카이오오)의롭다 하신다는 뜻이다. ‘너를 인하여라는 원어(엔 소이)네 안에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네 안에서] 복을 얻을 것이니라”(12:3)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복이 이방인에게도 적용될 것을 암시했다. 예수님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의롭다 하심의 복을 받는 것이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주의에 대한 여섯 번째 반론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 즉 율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27:26). 이 세상에서 율법을 항상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성도들이라도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11-12]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율법주의에 대한 일곱 번째 반론은 성경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2:4). ‘믿음으로라는 말은 행위로 혹은 법을 지킴으로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이다. ‘산다는 말은 영원한 삶을 가리킨다. 이 성경말씀은 복음의 원리에 맞고 율법주의에는 맞지 않는다. 율법은 믿음과 근원이 다르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율법으로 인해 살 것이나(18:5),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 살 것이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한마디로, 율법주의의 오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역사적이며 객관적이며 대리적이며 완전한 사역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는 완전한 의이었다(10:4).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은 의는 완전한 의, 곧 도덕적 완전이며 거기에 무엇이 더 첨가될 것이 없다. 그 의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속박과 저주와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누린다.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결과를 보인다. 그것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믿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둘째는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죄인들 속에 거하실 수 없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속에 들어오셔서 거하시게 되셨다. 이 두 가지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결과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큰 복이다.

본문은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는 생각에 대하여 일곱 가지의 반론을 제시한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사람이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심은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전제한다. 셋째로, 사람은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 그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며(64:6; 13:23; 17:9) 또 우리가 경험하는 바이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성령의 기적들을 베푸신 것도 신자들이 단지 예수님을 믿을 때이었다. 다섯째로, 아브라함은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여섯째로,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 일곱째로, 성경은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율법주의 곧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생각은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죄인들의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 안에 거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만족해야 하며, 그 의 안에서 자유와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그 의 안에서 의롭고 선한 삶을 추구하며 실천해야 한다.

15-22,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

[15-16]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사람의 언약도 한 번 맺으면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한다. 집이나 땅을 사기 위해 맺은 계약은 그대로 효력을 가지며, 아무나 그것을 임의로 폐하지 못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이 얼마나 더 확실하게 시행될 것인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들은 그와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창세기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세기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여기에 네 씨[자손]’라는 말(단수명사)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가리켰다.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메시아 약속 곧 그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복을 주시려는 약속이었다. 약속된 복은 의와 영생이다. 율법이 언약보다 430년 후에 세워졌다는 것은 야곱 때로부터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때까지 계산한 것일 것이다. 출애굽기 12:40-4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 430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아브라함 때로부터 계산하지 않고 야곱 때로부터 계산한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창세기 26:4,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세기 28:13-14, “(하나님께서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사람의 계약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지 못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친히 열조들에게 세우신 언약을 430년 후에 주신 율법이 폐하거나 헛되게 하지 못한다. 율법은 어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었지 430년 전에 세워진 언약을 폐지시킬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18] [이는]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아닐 것이나].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은혜로 주신 그 유업은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었다(12:7; 13:15; 15:18; 17:8).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얻은 것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은혜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들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약속으로 그 땅을 얻었다. 이 사실은 후에 주신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사람들의 범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자의 손을 빌어주어졌다. 여기에서 중보자는 모세를 가리켰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 신명기 5:5, “그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천사들로 말미암아주셨다. 이것은 신명기 33:2의 말씀을 가리킨 것 같다: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거룩한 자들]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 ‘일만 성도는 천사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신약성경은 본절 외에도 몇 곳에서 율법이 천사들을 통해 주어졌음을 증거한다. 사도행전 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히브리서 2: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율법의 유효 기간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이다. ‘약속하신 자손이란 메시아 곧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킨다. 율법은 구약시대를 위한 것이었고 메시아가 오실 때 폐지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율법 제도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도 않다. 그 이유는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셨고 그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건져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중보는 한편만 위하지 않고 양편을 위하여 중간 역할을 하는 자이다. 그 양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다.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는 말씀은 약속을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율법을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라고 본다.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거스르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는]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말미암았음이니라].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지할 수 없고 율법 제도가 일시적이라 하여,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모순된 것은 아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럴 수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아 왔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다른 목적이 있으셨다. 그러므로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모순되다고 생각할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율법의 참 목적을 알아야 한다.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율법의 목적은 사람으로 죄를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 모든 것속에는 모든 인류가 포함된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특히 율법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하다. 또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사람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여기에 율법의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과 430년 후에 주신 율법은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니고 그 목적이 서로 달랐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장차 오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와 영생의 복을 은혜로 주실 것을 보였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이 그것을 행하여 의와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 아니고, 사람들로 죄를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은 그 목적과 의도가 각각 서로 달랐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주의에 서서는 안 된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행위는 항상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그것에 의지하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 우리의 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23-29, 율법과 믿음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오기 전에,’ 즉 신약시대 이전을 가리킨다.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믿어 구원얻는 진리를 계시하신 때를 의미한다.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는 말은 구약시대의 성도들의 상태를 가리킨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율법 제도 아래 있었고 또 율법의 정죄 아래 있었다.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하였다(27:26).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감옥에서 형 집행을 기다리듯이, 모든 사람은 율법 아래서 사형 선고를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저주의 벌을 기다리는 자들과 같았다. 물론 구약 백성도 의식법에 암시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누렸다고 보지만, 율법의 엄격한 요구와 조건 아래서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죄의 형벌에 대한 공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죄의 완전한 속죄와 영원한 의는 아직 미래의 것이었다.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몽학선생’이라는 원어(파이다고고스)는 ‘주인의 어린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또 데려오는 종을 가리킨다(BDAG). 사도 바울은 이 비유에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아이의 시절에 비유하고,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선생이 필요치 않은 성장한 나이에 비유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의 어린아이 시절에 필요했던 제도이었다.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한 자이다. 그것은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함을 통해서이었다.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는 의가 없는 자이다, 나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깨닫지 못한 자는 결코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올 수 없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 함이다. 율법을 통한 정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에 이르는 길이다. 사람에게 두 가지의 의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자기의 의로운 행위들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간주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간주되는 길이다. 행위로 의에 이르는 길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또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불가능한 길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뿐이다.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믿음이 온 후라는 말은 시대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즉 신약시대를 말하며, 개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후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혜가 선포되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를 믿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했고 기껏해야 도덕적으로 최선의 삶을 추구했었다. 그때의 우리의 삶은 범죄와 실수와 불완전한 행위로 인하여 죄책과 불안과 공포 아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율법의 저주와 공포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은 율법의 제도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는 더 이상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율법의 명령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또한 성막 제도 아래 있지 않고 제사들이나 절기들을 지킬 의무 아래 있지도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의 의를 완성하셨고 의식법들이 상징하는 바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신약 아래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 안에 있고 그의 대속 공로 안에 있다.

[26-27] [이는]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되었음이니 이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안으로]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옷 입었음이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문구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라고 읽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요한복음 1:12의 말씀과 같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더 이상 율법이라는 선생님 아래 있을 필요가 없다. 또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고 확증하는 예식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더 이상 율법 아래, 즉 율법 제도와 그 속박 아래 있지 않다.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본절을 직역하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없고 종이나 자유자가 없고 남성이나 여성이 없도다.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임이니라이다. 이것은 구원의 복, ()의 복,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림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고 종이나 자유자가 차별이 없고 남성이나 여성이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는 다 동등한 복을 받았고 다 동등한 영적 특권을 누린다. 이 말씀은 물론 가정이나 교회에서의 남녀의 역할의 구별을 부정하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다른 곳에서 그런 구별을 분명히 가르쳤기 때문이다(고전 14:34-38; 딤전 2:11-15). 그러나 믿음 안에서의 영적 특권은 동일하다.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그와 연합한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기업을 상속받을 자이다.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손이 상속받을 기업은 가나안 땅이었으나, 그의 영적 자손인 우리가 상속받을 기업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이다. 베드로전서 1:3-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증거한다. 여기에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믿음이 오기 전에, 즉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그리고 우리가 아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았을 때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여 있었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 있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였고 우리로 하여금 의()를 갈망케 함으로써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이제 믿음이 온 후로는,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우리가 그를 알고 믿은 후에는 우리가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시시때때로 자신에게 질문하고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의 뜻과 교훈에 복종하고 있는가?

[예레미야 12장 하나님 말씀] 악한 자의 형통을 보고 피곤치 말라(렘 12:1-17)

 

[예레미야 12장 하나님 말씀] 악한 자의 형통을 보고 피곤치 말라(렘 12:1-17)

예레미야 12장에서 예레미야는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더 잘되고 형통하게 되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런 자들이 잘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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