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마태복음 예수님의 말씀] 예수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마 20:1-34)

복음의 능력 2021. 12. 1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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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백성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어차피 선택받지 못한 백성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이 믿습니다. 우리도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나의 대속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마 20:1-34)

 

1-16, 포도원 품꾼 비유

[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 . . .

주께서는 천국이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신약교회를 가리킨다. 신약교회는 다니엘 2:44에 예언된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 받음으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들어왔다(1:13).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다(벧전 2:9). 포도원의 집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집주인이 이른 아침에 나간 것은 포도원에 일할 품꾼들을 구하기 위해서이었다. 추수 시기에는 일꾼이 부족하여 포도원 주인이 사람들이 많은 길거리나 시장터에 나가 품꾼들을 구한다. 이른 아침은 시대적으로는 신약시대 초기를 가리키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사람의 어린 시절을 가리킬 것이다.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 . . .

포도원 주인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며 포도원에 들여보냈다. 포도원의 일은 포도열매를 따는 것이다. 성도의 일은 교회에 들어와 우선 자신의 영적 성장을 힘쓰는 것이다. 그는 예배에 잘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봉사의 일을 힘쓰고 다른 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헌금도 한다. 또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한다.

한 데나리온은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가리킨다. 품삯이라는 표현은 마치 구원이 행위의 대가(代價)처럼 들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2:8-9). 주인은 일방적으로 품꾼들을 불렀고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정하였다. 주인이 불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그 포도원에서 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데나리온은 온종일의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었다. 단 한 시간만 일하고서도 한 데나리온을 받은 자들이 있었다.

[3-7] 또 제3시에 나가 보니 . . . .

주인은 또 제3시 즉 오전 9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그들도 포도원에 들어갔다. 주인은 제6시 즉 정오와, 9시 즉 오후 3시에 또 나가 그같이 했다. 그는 제11시 즉 오후 5시에도 나가 보니 [게으르게](전통본문) 섰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주인이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라고 묻자, 그들은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고 대답했다. 주인은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네가 상당하게 받으리라(전통본문)”고 말했다.

오후 3시나 5시에 포도원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하루종일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놀기만 한 자들이었다. 오후 3시나 5시는 시대적으로는 신약교회시대의 마지막에 해당할 것이며,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노년기에 해당할 것이다. 주께서는 포도원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을 게으르게 노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 그가 우리를 부르시는 시점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포도원인 교회에 들어와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일은 바로 우리 개개인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가리킨다.

아직도 날이 저물지 않았다. 아직도 포도원에 일할 일거리가 남아 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일평생 허송세월하다가 생을 마치겠는가고 물으신다. 그는 우리에게 이제라도 자신의 구원과 영적 유익을 위해, 또 다른 이들의 구원과 영적 유익을 위해,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다가 생을 마치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재림이 가까운 이 시대에도 말씀하시고 청년들뿐 아니라, 노인들에게도 말씀하신다.

[8-9]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 . . .

오후 6시쯤이 되면 날이 저물고 하루 일과가 마친다.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품삯을 주라고 말했다. 11시 즉 오후 5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들은 1시간만 일했지만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그 주인은 참 후한 사람이었다. 한 데나리온은 천국과 영생을 가리켰다.

이 말씀은 천국과 영생이 인간의 수고의 대가(代價)로 얻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행위주의, 공로주의 관념은 성경 전체의 진리에 반대된다. 사람은 자기 행위의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에 미달한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사역으로만 또 오직 그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3:21-24).

[10-12]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 . . .

먼저 온 자들이 품삯을 받을 차례가 되었을 때, 그들은 더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들은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며 말하였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앞장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물었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품꾼들은 처음부터 사도로 부름받은 열두 제자들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들의 수고는 나중에 부름받은 자들에 비해 컸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이 받는 품삯은 약속된 한 데나리온뿐이지,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동일한 한 데나리온이 모든 품꾼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공로주의적 사고방식에 역행한다. 주께서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에게 영생과 천국이라는 동일한 선물을 주실 것이다. 먼저 믿는 자에게나 나중 믿는 자에게나 동일한 천국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름받은 시대나 나이를 관계치 말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하면 된다.

[13-15]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 . . .

주인은 그 품꾼들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의 처사는 공의로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인은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포도원에 늦게 온 자들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주인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주인의 재산을 주인의 뜻대로 하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아니며, 또 포도원에 늦게 들어온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 것은 선한 일이지 악한 일은 아니었다.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 . . .

주께서는,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일꾼된 자들은 이방인들, 먼저 일꾼된 자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며, 또 나중에 일꾼된 자들은 신입교인들을, 먼저 일꾼된 자들은 오래된 교인들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신앙생활에는 햇수보다 진지함과 성실함이 더 중요하다. 전통본문에는 16절 끝에 이는 많은 사람이 부름을 입으나 적은 사람이 택함을 입음이니라는 말씀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초청을 받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는 많지 않다.

1-16절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포도원에 빨리 들어가 일하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교회의 회원이 되어 예배 모임들에 힘써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교회를 분별하여 소속하고 그 교회에 충실한 교인이 되고 그 교회의 모든 집회들에 참석하고 말씀과 기도로 살며 주님의 일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 감사하며 남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자. 이방인이며 의가 없는 우리를 주께서 구원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영생과 천국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충성하자.

17-19,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 예언하심

[17-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決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3일에 살아나리라.

20-28,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

[20-21]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 . . .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자 예수께서 무엇을 원하느뇨?” 하고 물으셨다. 그는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말하였다. 여기에 어머니들 속에 그리고 모든 사람 속에 있는 욕심이 보인다. 자기와 자기 자녀들이 남들보다 더 나은 자, 더 높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욕심이다. 그것은 세상적 욕심이요 헛된 명예심이다. 그것은 부패된 허영심이다. 사람이 이런 세상적 욕심을 제거하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그러나 성도는 이런 욕심을 품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단속해야 한다.

[22-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 . . .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은 말하였다. “할 수 있나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 나라의 명예는 세상적 욕심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은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이었다. 그와 같이, 주의 나라에서의 명예는 이 땅의 방식과 다른 방식, 곧 주와 함께 고난을 받는 방식에 의해 얻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것을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주의 마시려는 잔을 자기들도 마시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들의 중심은 그 점에서 순진했던 것 같다. 십자가의 고난을 잘 모르는 채 그들은 그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용감하게 대답하였다. 주께서는 그들이 주의 고난에 참여할 것을 암시하셨다. 그러나 주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지금 그것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작정이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의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감추어진 것을 알려고 할 것이 없다. 그런 관심 자체가 올바르거나 선하지 못하다.

열 제자는 그 말을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해 분히 여겼다. 그것은 그들 속에도 같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보다 높아지려는 욕심이 없는 곳에는 그런 유의 분노가 있지 않을 것이다.

[25-27]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다가 말씀하셨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집권자는 통치자들, ‘대인’(大人)은 고위 관리들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세상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일이요 방식이다. 남을 지배하려는 태도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적 행위인 것 같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전혀 다른 원리와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교회에는 남을 지배하는 자들이 없어야 한다. 주께서는 그런 유의 권위를 부정하신다. 모든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한 목표인 주의 영광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교회 안에 큰 자가 있다면 남을 섬기는 자가 그러하다. , 얼마나 세상과 다른 원리요 방식인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회에서 큰 자가 되려고 하거나 으뜸이 되려고 하면, 다른 성도들을 겸손히 섬겨야 한다. 교회에서 훌륭한 자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고,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이다.

사실, 이렇게 하면 거기에는 갈등이나 분쟁이나 분노가 결코 없을 것이다. 인간 공동체의 갈등과 분쟁과 싸움은 불의와 거짓, 그리고 교만에서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님의 법을 힘써 지키며 자신을 낮추고 서로 섬기려 한다면, 그런 곳에는 아무 싸움이나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이 곧 천국의 모형이다.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 . . .

주께서는 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자신의 모범으로써 그의 교훈의 무게를 더하셨다. 그는 섬김을 받으려고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도리어 많은 사람들을 섬기시며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 주님의 사역의 핵심은 대속물로 자신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이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부수적으로 그의 낮아지심과 섬김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믿고 따른다면, 우리도 남을 섬기며 남을 위해 우리의 목숨도 바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29-34, 소경들을 고쳐주심

[29-30]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 . . .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 가까운 마을이다.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렀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들은 불쌍한 소경이었지만 놀랍게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아라는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 들리는 소문을 통해 또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지식과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 . . .

무리들은 그 불쌍한 소경들을 동정하기는커녕 그들을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비록 예수님을 좇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을지라도 그의 동정심을 갖고 있지 못했다. 소경들이 고침을 받는 데는 예수님 측근에 둘러서 있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는 자들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거리였다. 그러나 그 소경들은 더욱 소리질러 말하였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주께 나아가는 자는 사람의 방해 때문에 낙심치 말아야 한다.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소경들의 낙심치 않는 부르짖음은 마침내 주님의 관심을 끌었다. 예수께서는 머물러 서셨고 그들을 부르셨다. 주께서는 이전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고 가르치셨다. 그때에나 지금에나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얻는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무엇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기도하면, 그리고 낙심치 않고 계속 또 더욱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가 그의 시선을 우리에게 돌리시고 우리의 기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기를 힘쓰며 기도할 때 낙심치 말아야 한다.

[33-34]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 . .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은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소경들의 소원은 분명하였다. 그들은 눈을 뜨기를 원하였다.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우리의 소원을 분명하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중언부언하지 말고 명확하고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또한 확실한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민망히[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을 만지셨다. 그는 인생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그러자 그들은 곧 보게 되었다. 그는 인생의 연약함을 치료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시다. 사랑과 능력이 함께할 때 치료와 구원이 가능케 되었다. 주의 능력의 치료와 구원은 신속하고 완전하였다. 여기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신적 영광이 나타났다. 치료받은 그 소경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다.

[다니엘 8장 성경 좋은 말씀] 숫양과 숫염소의 이상(단 8:1-27)

 

[다니엘 8장 성경 좋은 말씀] 숫양과 숫염소의 이상(단 8:1-27)

다니엘 8장에서 다니엘은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을 통해서 한 나라가 망하고 한 나라가 흥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숫양은 메대와 바사가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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