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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4장 강해설교말씀] 요나단이 블레셋을 물리침(삼상 14:1-52)

복음의 능력 2022. 3. 2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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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4장에서는 요나단이 믹마스에서 승리한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블레셋을 물리치게 됩니다. 사울은 잘못된 명령을 내려 금식을 선포하게 됩니다. 전쟁 중인데 병사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잘못된 판단을 하여 명령을 내리면 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단이 블레셋을 물리침(삼상 14:1-52)

 

1-23, 요나단이 블레셋을 물리침

[1-5]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 병기를 든 . . . .

전장(前章)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침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침공을 불러일으켰고 지금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대치 상태에 있다. 블레셋 군대는 병거가 3만대이며 마병이 6,000명이며 보병은 무수히 많았고, 이스라엘은 보병 3,000명 중 두려워 돌아간 자들이 많고 겨우 600명 가량이 남은 상태이었다. 이스라엘은 매우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요나단이 자기 병기를 든 소년에게 말했다.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요나단은 믿음이 독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을 먼저 공격하고자 하는 믿음의 소원을 가졌다. 그는 그 일을 아버지께 고하지 않았다. 사울은 기브아 변경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 머물러 있었고 함께한 백성은 600명 가량이었다.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증손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에 사울과 함께 있었다. ‘에봇을 입었다는 말은 대제사장의 직무를 행하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백성들은 요나단이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간 줄을 알지 못하였다.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의 부대로 건너가려는 어귀 사이에는 이편에도 험한 바위가 있고 저편에도 험한 바위가 있었다.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고 하였다. 한 바위는 북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에서 게바 앞에 일어서 있었다.

[6-10]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 . . .

요나단은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요나단은 블레셋 사람들을 하나님의 언약의 표인 할례가 없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할례 없는 자들은 곧 하나님 없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할례의 표를 지니고 있는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시고 그들을 도우실 것을 기대하였다. 그것은 결코 주제넘은 신념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결코 외면치 않으실 것이다. 또 요나단은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했다. 당시의 군사력을 비교할 때 이 말은 인간적으로 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참 믿음이 아닌가? 이것이 옛날 가나안 정탐 때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이 아니며, 골리앗과 대항하여 싸운 소년 다윗의 믿음이 아닌가?

병기 든 자는 요나단에게 말했다.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의 마음을 따라 당신과 같이 하리이다.” 그는 일치된 마음으로 요나단을 도왔다. 그것은 돕는 자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때 요나단은 한 표증을 구하며 말했다.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그들이 만일 이같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그들이 만일 이같이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증이 되리라.”

[11-15] 둘이 다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 보이매 블레셋 . . . .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의 소원대로 그에게 표증을 주셨다. 두 사람이 다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 보이자 블레셋 사람이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고 말하며 그 부대 사람들은 요나단과 그 병기 든 자를 대하여,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한 일을 보이리라”고 말했다. 요나단은 그 표증이 나타난 것으로 판단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표증이었다. 요나단은 자기 병기 든 자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그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표증이라고 깨달았다.

요나단은 손발로 붙잡고 올라갔고 그 병기 든 자도 따랐다. 블레셋 사람들은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졌고 병기 든 자는 따라가며 죽였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단과 함께하셨다. 요나단과 그 병기 든 자는 반나절 일할 만한 넓이의 들판에서 처음으로 약 20명을 죽였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단과 함께 계셔서 그로 이기기 시작하게 하셨다. 들에 있는 진과 모든 백성 중에 떨림이 일어났고 블레셋 부대와 그 노략군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떨림이었다. ‘큰 떨림이라는 원어(케르닷 엘로힘)하나님의 떨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블레셋 진영뿐 아니라, 땅에도 진동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요나단과 이스라엘을 도우셨고 블레셋 사람들을 치셨다.

[16-19]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 . . .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보니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사울은 자기와 함께한 백성에게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고(點考, 점을 찍듯 수를 셈)하여 보라”고 말했다. 점고하니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가 없어졌다. 사울은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었다. 사울이 그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의 진에 소동이 점점 더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적진에 큰 소동과 혼란을 주셨다. 사울은 제사장에게 네 손을 거두라”고 말했다.

[20-23] 사울과 그와 함께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 . . .

사울과 그와 함께한 모든 백성은 모여 전장(戰場, 전쟁터)에 가서 보았다. 그들은 요나단을 돕는 지원군과 같았다. 그런데 그들이 와 보니 블레셋 사람들은 각각 칼로 그 동료를 치므로 크게 혼란해 있었다. 또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하던 히브리 사람들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와서 진에 들어왔었는데,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과 합하였다. 또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들의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 그들을 추격하였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을 도우셨고 블레셋을 패하게 하셨다. 본문은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고 기록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는 가족 관계를 초월한다. 사울은 믿음의 결함을 가진 자이었으나, 그의 아들 요나단은 믿음이 독실한 자이었다. 믿음은 반드시 가족 관계에 의지하지 않는다. 열왕의 역사를 볼 때에도, 경건한 히스기야에게서 므낫세라는 심히 악한 왕이 출생했으나, 반면에 악한 므낫세의 손자인 요시야는 매우 경건하고 선한 왕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족 관계를 초월한다. 경건한 가정에서 믿음의 사람이 나오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 중에는 불신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고 구원받고 독실한 믿음의 자리에 들어온 자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부모는 경건하고 믿음이 있으나 자녀는 믿음이 없는 자도 있을 수 있다. 요한복음 1:12-13, “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구하자. 우리의 구원에도, 성화에도 그러해야 한다.

둘째로, 믿음은 인간의 조건, 세상적 조건, 외적 조건을 넘어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요나단이 그러하였다. 군사력을 비교한다면,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은 틀림없이 패배할 전쟁이었다. 그러나 요나단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능력을 믿었고 의지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믿음은 인간의 조건, 세상적 조건, 외적 조건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요나단의 믿음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전에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열두 정탐꾼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이 그러하였고, 후에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싸웠던 다윗의 믿음도 그러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능력을 믿자.

셋째로, 전쟁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요나단으로 인해 시작된 이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요나단과 이스라엘을 도우셨고 승리케 하셨다. 그는 먼저 요나단에게 표를 주셨다. 또 그는 그에게 믿음으로 블레셋과 접전하게 하셨고 그로 이기기 시작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진영에 큰 떨림을 주셨고 땅도 진동케 하셨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큰 혼란에 떨어지게 하셨다. 또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 연합했던 히브리 사람들이 사울과 요나단의 편으로 돌아서게 하셨고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용기를 내어 내려와서 이스라엘을 돕고 도망가는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케 하셨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도우시며 역사하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임의로 주관하시고 모든 환경까지도 임의로 섭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을 도우셨고 승리로 이끄셨다. 그 전쟁의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얼마 후 다윗도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확신하고 증거했다(삼상 17:47).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능력을 깨닫고 믿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만 바르게 살고 순종하자.

24-52, 요나단이 죽음을 면함

[24-30]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 . . .

앞에서 읽은 대로, 요나단이 블레셋 진영에 들어가 치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블레셋 진영에 큰 혼란이 일어났고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날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다. 왜냐하면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사울의 행위는 경솔한 행위이었다. 백성들은 그 맹세 때문에 몹시 피곤하였다. 백성들은 식물을 맛보지 못하였고 그들이 수풀에 들어갈 때에 꿀이 흐르는 것을 보고도 맹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그 입에 대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 아버지가 맹세로 백성에게 말할 때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꿀을 찍어 입에 대니 눈이 밝아졌다. 그때에 백성 중 하나가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부친이 맹세로 백성에게 엄히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오늘날 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요나단은 말했다. “내 부친이 이 땅으로 곤란케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았거든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라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않았겠느냐?”

[31-35] 그 날에 백성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 . . .

그 날에 백성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이르기까지(20킬로미터) 블레셋 사람을 쳤으므로 그들이 심히 피곤했다. 그들은 요나단의 말에 힘을 얻고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취하여 피채 먹었다. 무리가 사울에게 고하였다.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채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은 너희가 무신(無信)[불신실]하게 행하였도다. 이제 큰 돌을 내게로 굴려 오라고 말했고, 너희는 백성 중에 흩어져 다니며 이르기를 사람은 각기 소와 각기 양을 이리로 끌어다가 잡아먹되 피 있는 채 먹어서 여호와께 범죄치 말라”고 했다. 피채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금하신 일이었다(3:17; 7:26-27; 17:10, 14; 19:26). 그 밤에 모든 백성들이 각각 자기의 소를 끌어다가 거기서 잡았다. 거기서 사울은 여호와를 위해 처음으로 단을 쌓았다. 사울은 분명히 경건성이 부족하였다.

[36-42] 사울이 가로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을 쫓아 . . . .

사울은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가서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고 말하자, 무리는 왕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소서라고 대답하였다. 그때에 제사장이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라고 하자, 사울은 하나님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겠나이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대답지 않으셨다.

그래서 사울은 말했다. “너희 백성의 어른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뉘게 있나 알아보자.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그의 말과 그의 맹세는 여전히 경솔하였다. 모든 백성은 한 사람도 사울의 말에 대답지 아니하였다. 사울은 온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저편에 있으라. 나와 내 아들 요나단은 이편에 있으리라”고 말하자, 백성은 그에게 왕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소서라고 말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원컨대 실상을 보이소서라고 구하였는데, 요나단과 사울이 뽑혔고 백성은 면하였다. 또 사울이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뽑으라”고 했는데, 요나단이 뽑혔다.

[43-46] 사울이 요나단에게 가로되 너의 행한 것을 내게 . . . .

사울은 요나단에게 너의 행한 것을 내게 고하라고 말했다. 요나단은,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라고 말했다. 요나단이 과연 잘못했는가? 그가 사울의 맹세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잘못은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을 것이며, 또 결과적으로 사울의 경솔함과 요나단의 무고함이 드러났다고 본다. 그러나 요나단이 꿀을 찍어먹은 행위는 사울의 경솔한 맹세와 저주에 관계되어 있었던 것 같다.

사울은 말했다.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원문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고 또 더하시리라. 이는 요나단아, 네가 정녕 죽을 것임이니라(KJV)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사울의 뜻을 거스르며 말했다.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同事)하였음이니이다.” 백성들의 주장은 강경했다. 그들은 요나단에게 잘못이 없고 오히려 그가 하나님과 함께 일했음을 인정했고 그를 구원해 죽지 않게 했다.

[47-52]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나아간 후에 사방에 있는 . . . .

사울은 이스라엘 왕위에 나아간 후에 이웃 나라들을 이겼다. 그는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용맹 있게 아말렉 사람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다. 그의 아들은 요나단과 리스위와 말기수아요 두 딸의 이름은 메랍과 미갈이며 그의 아내는 아히노암이었다. 그의 군장은 그의 사촌 아브넬이었다.

사울의 사는 날 동안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왕의 경건과 의는 나라의 평강을 가져오고 왕의 불경건과 죄는 나라의 근심과 걱정을 가져온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위해 힘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경솔한 맹세를 삼가야 한다. 사울은 백성에게 경솔히 맹세시켰고 또 자신도 백성 앞에서 성급하고 경솔하게 맹세하였다. 우리는 맹세를 함부로, 경솔하게 하지 말고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맹세뿐 아니라, 모든 말을 신중히 해야 한다.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둘째로, 우리는 맹세한 것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사울은 경솔히 맹세하였고 그 맹세를 그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사 입다는 하나님께 한 무지한 서원을 그대로 시행하였다. 그는 그의 서원한 대로 무남독녀인 딸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다(11:35, 39).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향한 입다의 경외심을 귀하게 보셨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동사(同事)하는 자가 되자. 요나단은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은 도구가 되었다. 백성들은 그를 하나님과 동사(同事)한 자로 인정하였다(45).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들어 함께 일하신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했다. 고린도전서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고린도후서 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하나님과 동사(同事)하며 동역(同役)하는 자가 되려면, 하나님과 뜻을 같이하고 굳센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아모스 3:3, “두 사람이 의합(意合)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깨끗한 자를 들어 쓰실 것이다(딤후 2:21).

[창세기 25장 주일설교말씀] 이삭의 두 아들(창 25:1-34)

 

[창세기 25장 주일설교말씀] 이삭의 두 아들(창 25:1-34)

창세기 25장에서는 이삭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죽음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서는 자신의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게 됩니다. 이삭의 두 아들(창 25:1-3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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