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부활주일 설교말씀] “너는 나를 따르라(요한복음 21:15-23)

복음의 능력 2021. 5. 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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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부활주일 설교말씀 중에서 너는 나를 따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셔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선 듯 말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한다고 했을 때 자신은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목숨을 걸고 맹세했지만 상황과 환경이 부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놓이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알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풀어주면서 네가 나를 위해서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붙잡아 주지 않으면 나도 얼마든지 주님을 부인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제목: “너는 나를 따르라 Follow thou me!"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요 21:15-23

 

요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2)

 

주제: 부활의 증인으로서 새 출발하는 제자들처럼 우리도 부활의 주님만을 따르자..

 

할렐루야!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다시 일어나셨다”라고 증거 하며 살아오셨나요? 우리는 남은 평생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며 부활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매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기념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마다 부활의 승리를 합시다. 매주 주일날은 부활절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오후에 두 제자가 엠마오 고향 마을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눅 24:13)." 그들은 유대 민중과 함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혁명을 예루살렘에서 완성하고자 주님과 함께 입성했으나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베드로, 요한 등 극소수만 성내 남았고 대다수의 제자들은 피해버리거나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아마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체포가 두려워 고향으로 피하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30리(약 11킬로) 정도 떨어진 곳으로 아주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고 걸어서 하루거리쯤 되는 곳으로 두 제자는 피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에 갔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소문을 퍼뜨리는데 이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의에 빠진 두 사람이 허황된 마음과 깊은 슬픔을 지니고 길을 가면서 지난 주말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하고 있었습니다(눅 24:14~15). 이때 예수님께서 몸소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으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일어나신 예수님의 몸이 변형되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두 분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고 물으시니 그들은 침통한 얼굴을 하고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때에 그들 가운데 하나인 글로바(Cleopas)가 그분께 묻기를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서만 모른단 말입니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른 채 하시면서 그들에게 되묻기를 '무슨 일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피신하는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확인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나사렛 예수와 관련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법정에 넘겨주어서, 사형 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우리 가운데서 몇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일어나셨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베드로와 요한)이 돌무덤에 가서 보니, 과연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눅 24:15~24)."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가 부부라는 설도 있습니다. 엠마오 집에서 같이 사는 것 같아서 그렇게 추측합니다. 12 사도 외에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사도가 아니라 제자들 그룹에 속합니다. 글로바의 설명을 듣던 예수님께서는 “이 미련하고 대언자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이런 일들로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모세와 모든 대언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복음을 설명하실 때 두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눅 24:25-27, 32).

 

성경은 예수님이 주제입니다. 성경 66권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복음의 관점에서 성경말씀을 읽고 들으면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조명하셔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큰 은혜가 임합니다. 엠마오 도상이 성경공부의 길이 되었고, 낙심과 실망과 불행해 있던 두 제자가 은혜받고 기쁨과 소망과 평화가 가득 찼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그들은 엠마오에 도착했는데 더 멀리 길을 가려는 예수님을 자기들의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식사를 준비하여 주님을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그네를 초청하면 의례히 주인인 글로바가 식사기도(축사)하고 나그네에게 음식을 권하는 것이 관습인데, 도중에 복음으로 은혜가 충만한 그들이 나그네이신 예수님께 식사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이 순간만큼 예수님을 이 가정의 가장(주인)으로 대접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서 축사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이때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주님께서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뿐, 부활의 주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계셨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도 동행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집의 가장(家長,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오,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오,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라는 글을 거실에 침실에 주방에 걸어둡시다. 여러분의 식탁이 엠마오의 식탁이 되어서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시면 좋은 일이 생깁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The Imitation of Christ』를 쓴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약 1380~1471년)의 “주인님, 나를 바칩니다” 시를 읽습니다.

 

“-오, 나의 주인님!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가 소유욕이라는 전염병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고운 옷이 아니라 남루한 옷이 제 차지가 될 때에도 불쾌한 마음을 갖지 않게 하소서.

-멸시와 천대를 당할 때에도 나의 주인님을 의지함으로 제가 진정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주인님이 쓰신 가시면류관의 가시가 돌같이 굳은 저의 심장을 찔러 심장의 중심에 단단히 박히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그 상처를 통해 제 온몸의 해로운 피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주인님의 거룩한 사랑의 증거인 그 가시가 제 심장에 계속 박혀 있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제 마음은 악의 가시와 유혹의 엉겅퀴를 모두 뽑아버리고 아름다운 밭으로 바뀔 것입니다.

-오, 나의 주인님! 이제야 저의 전부를 주님께 바칩니다!”

 

또 복음찬양 가사를 음미하며 불러봅시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2번)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킨 후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3:14-15)고 담대히 설교했습니다. 믿음이란 내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회에서 자기가 주인 노릇 하려고 하는데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교회도 살고, 가정과 나라도 살아납니다.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면 우울해지고 근심이 많아지고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주님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눅 12: 42, 43) 오늘 이 시간 주님을 우리의 교회의 주인이요 우리 가정의 가장이며 내 인격의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엠마오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랍비에게 두 아들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외출한 사이에 두 아이가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 랍비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그는 두 아들의 시체를 방 안으로 옮겼습니다. 한참 후 랍비가 돌아왔을 때 아내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제게 귀중한 보석 두 개를 맡기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느닷없이 그가 찾아와서는 그것들을 돌려 달라는데 이럴 때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랍비는 별생각 없이 쉽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주인이 달라고 하면 당연히 돌려주어야지!” 그러자 아내는 랍비를 데리고 두 아들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놓으셨던 귀중한 보석들을 찾아가셨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과 삶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의 주인도 아닙니다. 우리는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자들입니다. 자녀도, 재물도, 직분도, 지위고하막론하고 지위도, 명예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오히려 허락지 않으시고,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자기들의 시야에서 예수님께서 사라지실 때 글로바와 다른 제자들은 서로 말하기를 '길에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던가?' 하고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러 단숨에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갈 때는 슬픔과 불행이었지만.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달려올 때는 두 제자가 기쁨과 희망에 찬 발걸음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이 그들에게는 삶의 전환점이 되어 그 후의 삶은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김두완 장로님의 작곡, 작사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 주셨네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을 막으나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새 소망 주심을 믿사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그의 삶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유대교의 차기 최고 지도자가 기독교의 부활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시간 부활의 주님을 만나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눅 24:34)."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엠마오에서 돌아온 글로바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를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눅 24:32~35).

 

이때 함께 동행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눅 24:36) 하시니 제자들이 변형된 주님을 못 알아봅니다. 주님께서는 찔리신 손과 발을 보이심에도 불구하고 의심하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주님의 요청에 제자들이 주님께 구운 생선 한 토막(a piece of a broiled fish)과 꿀(an honeycomb)을 드리니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눅 24:41-43). 그리고는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뤄져야 하리라 한 말씀들이 이것이니라.”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부탁하셨습니다(눅 24:44-48). 엠마오 도상에서처럼 부활절 날 제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구약성경 전체의 주제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즉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침 이 자리에 디두모(아람어로 “쌍둥이”) 사도 도마가 참석하지 아니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님을 만났노라”라고 하니 도마가 말하기를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했습니다. 여드레(8일) 지나서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문들이 닫혔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Peace be with you!).”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돼라”라고 하시니 도마가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지면서 대답하기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my God"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도 인도 첸나이에 있는 도마 기념 교회당 이름이 ”My Lord, My God" Church입니다. 예수님의 사도 가운데 최초로 도마가 주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으며, 그 후 요한이 주님을 태초부터 있었던 말씀(Logos), 곧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요 1:1-3).

 

이에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셨습니다(요 20: 24-29).

 

고린도 전서 15장을 부활의 장이라 부르는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부활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사도 바울이 쓴 것입니다(Q & A). 부활의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막달라 마리아, 베드로(게바), 열두 제자들, 500여 성도(승천 시), 야고보(주님의 육신 형제, 야고보서 저자), 모든 사도들,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 보이셨습니다(고전 15:5-8). 제자들이 모인 장소에 네 번 나타나셨는데 오늘 본문 말씀(요 21장)은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요 21:14).

요한복음 21장은 다른 복음서에 없는 내용인데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다(=갈릴리 호수, 구약에서는 긴네사렛, 긴네렛이라 부름)의 다브가(Tabgha=일곱 샘이라는 아람어, 이곳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새벽기도를 시작하시고,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주심)에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셨습니다(요 21:1).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전하신대로(마 28:7, 10, 16, 막 16:7) 일부 제자들이 갈릴리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가버나움, 막달라, 디베랴(Tiberias), 뱃세다, 고라신 등에 다니며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이곳에 오심을 알리고 환영 준비를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가 다른 여섯 사도들(디두모라 하는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바돌로매, 야고보, 요한, 또 다른 제자 둘)을 유혹하여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선동하니 “우리도 함께 가겠다”라고 모두 배에 올라 밤새 동안 고기를 잡으려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요 21:2-3).

 

바로 이 장소는 3년 반 전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베드로를 제자로 삼던 곳입니다. 그때도 밤새 한 마리 물고기를 잡지 못했는데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배를 빌려 말씀의 강단으로 삼으신 후,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라”라고 말씀하셔서 베드로-안드레, 야고보-요한 두 배가 약 6킬로미터(갈릴리 호수의 동쪽과 서쪽의 폭이 13킬로임) 떨어진 깊은 곳(1시간 가야 하는 거리)에 가서 그물을 내리니 두 배에 만선이 되었던 곳입니다.

 

이번에도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부활의 주님께서 해변에 서서 그 광경을 다 보시고 이들이 해변으로 가까이 오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Children, have ye any meat?” 제자들은 이 분이 예수님이신 모르고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No" (요 21:4-5).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Cast the net on the right side of the ship, and ye shall find”(요 21:6). 피곤하고 추운 제자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그들의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니 많은 물고기가 바로 그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밤새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어부의 상식으로 여기저기 던져 보았지만 주님께서는 물고기들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곳에 모아 두신 것입니다.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바로 이 분께서 예수님이신 줄 제일 먼저 알아본 요한(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the beloved disciple of Jesus)이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 It is the Lord.”하니 베드로가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내려 제일 먼저 주님께로 갔습니다. 배에서 해변까지 약 50 간 = 200규빗 = 약 92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작은 배에 가득 찬 고기든 그물을 끌고 해변에 도착하니 해변에 숯불이 있었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이 잘 구워져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21:7-9).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준비한 아침식사 상(breakfast)이었습니다. 지금도 다브가에 있는 베드로 수임권 기념교회에 가보면 “주님의 식탁 Mensa Domini"이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준비하신 식탁입니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더라도 누가 대접하며, 누구와 함께 먹느냐에 따라 밥맛이 틀립니다. 주님의 식탁은 꿀맛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세(153) 마리였습니다. 이같이 많은 생선을 잡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그물을 교회의 예표로 본다면 차고 넘치는 부흥을 말합니다.

 

"153"의 뜻에 대해 몇 가지 설명을 소개합니다.

 

1) 사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47 사건을 통해 153명이 치유받고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1) 마태 23 사건을 통해 47명을 축복하심 (문둥병자 8:2, 베드로 장모, 야이로의 딸, 12년 혈루병 환자 가나안 여인의 딸 15:22, 막달라 마리아 27:56, 아리마대 요셉 등

(2) 마가: 3 사람(귀신 들린 자 1:23; 귀먹은 자 7:32, 눈먼 자 8:32)

(3) 누가: 14 사건을 통해 94명이 축복을 받았다.

70명 제자들 (10:1). 열 명의 나환자(17:12), 삭개오(19:2), 등

(4) 요한: 8개 기록을 통해 9명이 나음을 얻었다. 니고데모(3:1). 가나의 왕의 신하(4장), 간음한 여인(8:11), 나사로(11장)

 

이 모든 것을 합치는 47 사건을 통해 153명이 치유, 문제 해결, 기도응답으로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사역을 정리하시면서 제자들도 부활 신앙으로 153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는 메시지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153마리는 9X17이며, 1+5+3 = 9이다. 9는 인간의 하는 일은 헛된 것이란 의미이며, 17(12+5)은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는 숫자이다. 17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고 그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뜻이다.

 

(1) 요셉이 17세 때 두 가지 꿈을 주셨다. 야곱의 마지막 17년 세월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과 살았다. 130세(창 47:9)에 이집트 이민 가서 147세에 별세하였다(창 47:28).

(2) 로마서 8:35-39에 하나님의 사랑을 방해하는 17가지임

(3) 창세기 8:4 - 7월 곧 그 달 17 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

(4) 예레미야 32:9 -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었다.

(5) 구약성경 39권은 = 17(오경+역사서 12권) + 5(시문서) + 17(대선지 5+소선지 12)

그래서 9 x 17은 인본주의(9= 6+6+6=18의 절반)을 극복하고 신본주의(17)로 승리함.

 

3) "하나님의 자녀"라는 히브리어 글자의 숫자 값이다

 

중세 기독교의 수비학인 '게마트리아'는 문자를 수로 사용하는 방법과 이것으로부터 나오는 수비학의 광대한 해석체계를 말한다. 즉 게마트리아의 본질적인 요소는 문자가 수를 나타내고 수가 문자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숫자에 의한 문자 풀이법은 바벨론의 사르곤 2세(B.C.723-705) 시대의 비명을 통해 알려져 있다. 숫자에 의한 문자 풀이법은 유대 전통에서 각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A.D.1세기경 유대고 랍비였던 엘리에제르는 경전 해석의 32가지 방법 중 29번째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BC 3세기 이후 헬라 문면의 영향 속에서 히브리인의 숫자 표현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알파벳 순서를 수의 기호로 사용하는 헬라 방식에 따라 유대인들도 히브리 자음 순서로 수의 기호를 표현했다. 유대인들이 문자를 수의 기호로 사용함에 따라 특정한 단어가 특정 수로 나타나는 일이 벌어졌다. 성경이 모든 낱말과 각 글자는 일정한 숫자를 갖고 있어 서로 풀어지거나 얽힐 수 있으며 신비스러운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 즉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단어들이 '코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영향은 성경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랍비들이나 필사자들에 의해 구약성경의 문자 자음이 의도적으로 조작되는 경우가 일어났다. 단어와 숫자를 혼용하는 방식은 신약성경에도 종종 나타난다.'하나님의 아들들'(Beni ha-Elohim)이란 낱말이 맛소라 구약성경에서 일곱 번만 나오며, 히브리어 낱말 수의 값은 153 =2+50+10+5+1+30+5+10+40이 된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 부활 후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의 수가 '153마리'라는 점을 들어 구약 하나님의 아들들과 연결시켜 교회(그물) 속에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헬라어 '물고기'의 단어 수의 값이 '153×8'(1224)로 나오는데 '그물'도 '153×8'의 값이 나온다. 특히 '노타리곤'으로 물고기 '익두스(ΙΧΘΥΣ)'는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테르(Ιησουs Χριστοs Θεου Ύιοs Σωτερια),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라는 의미를 만들기도 한다.

 

4) 모나미 153 (monami= 프랑스어로 ‘나의 친구’ 뜻) 볼펜은 1963년 5월 1일 처음 판매되기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계속 만들어지고 팔리고 있는 베스트셀러 볼펜입니다. IMF 당시에도 모나미는 해외 수출을 통해 915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송삼석 초대 회장께서 예수님께서 잡게 하신 물고기의 수를 이곳에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르면 상상을 초월한 선물을 받는다는 것에 아이디어를 얻어 기도하는 가운데 이름을 정했다고 합니다.

 

5) 미국 캘리포니아 주 토렌스에 있는 코헨대학교 신학대학원(설립총장: 강신권 박사, 명예총장: Gary G. Cohen, 총장: H. Ronald Vandermey)의 학훈(Motto)이 “Vision 153 Project”입니다. 전 세계에 나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153개국에 신학교를 세우는 목표로 선교에 힘쓰고 있습니다. 프로젝트는 세계 153개 나라 현지에 신학교를 세우고 이 신학교 주변의 10개 도시에 분교를 세워 총 1530개 신학교를 세계 각지의 선교 전초기지로 삼는 것이 그 주 내용이다.

 

베드로가 잡은 153마리 물고기를 주님께 가져오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와서 조반을 먹으라 Come and dine”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십니까?’라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비록 외모는 변형되셔도 하시는 말씀과 행동은 분명히 주님이심을 의심하는 제자들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아침에 다소 쌀쌀하며 온기가 필요할 때 모닥불로 몸을 따뜻하게 하셨고, 주리고 피곤한 제자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여 먹이셨습니다. 식탁에 둘러앉은 제자들이 먹으며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포근한 사랑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1) 식사 후 주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agapas me=ἀγαπᾷς με)”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주님, 그러하외다(Ναί Κύριε).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philō se = φιλῶ σε)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Boske ta arnia mou = Βόσκε τὰ ἀρνία μου Feed my lambs)”하십니다.

 

(2) 또 두 번째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agapas me = ἀγαπᾷς με)” 하시니 그가 대답하기를 “주님, 그러하외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philō se = φιλῶ σε)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말씀하시기를 “내 양을 목양하라 (Poimaine ta probata mou Ποίμαινε τὰ πρόβατά μου Shepherd my sheep)”하시고

 

(3) 세 번째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phileis me = φιλεῖς με, Lovest thou dearly me?” 하시니 주님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예수님께서 두 번은 아가페 사랑하느냐로 물으시다가 여기서 필리아 사랑하느냐고 물으니 베드로가 근심하여 말하기를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philō se = φιλῶ σε, I dearly love thee.)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양을 먹이라(Boske ta probata= Βόσκε τὰ πρόβατά Feed my sheep)”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두 번 아가페(헌신적인) 사랑을 하느냐고 물었지만 베드로는 한결같이 필리아(친구의) 사랑을 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목양하라” “내 양을 먹이라”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어린 양을 먹이고, 목양하여 양이 자라도 계속 먹이라는 것입니다. 왜 세 번씩 질문을 했냐고 하면 쉐마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연결되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 질문에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아가페)”는 마음을 다해(with all thine heart) 나를 사랑하느냐?, 둘째 질문에 “나를 사랑하느냐?(아가페)는 목숨을 다해(with all thy soul) 사랑하느냐?”, 셋째 질문에 “나를 사랑하느냐?(필리아)”는 힘을 다해(with all thy might) 사랑하느냐? 질문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비록 필리아 사랑을 한다고 고백해도 주님께서는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반드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자세로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 가르칠 때, 청소할 때, 예배 순서를 맡아 감당할 때, 말씀을 선포할 때 반드시 세 번씩 주님의 사랑을 고백하고 그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주님의” 양을 내가 돌보며 먹이고 목양해야 합니다. 내 양이 아니고 주인은 주님의 성도며 양입니다. 주님께서 목자(shepherd 시 23:1)라면 목회자는 목동(pastor) 일뿐입니다. 우리 목회자는 양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돕고 심부름하고 협력하는 목동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자기 성도들을 자기의 양으로 착각하며 소유권을 가진 것처럼 다루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의 양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의 소유권, 사용권, 회수권은 모두 주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큰 교회를 담임하든 작은 교회를 담임하든 어차피 내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들입니다. 더 많은 양을 맡을수록 더욱 겸손하게 성실하게 정직하게 목양하며 먹이고 돌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요 21:18-19). 베드로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띠를 띠고 원하는 곳으로 선교하고 목양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하지만 [필리아 사랑], 늙어서는 그의 팔을 벌려 남이 그에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아가페 사랑]는 순교의 현장으로 끌려가겠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순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베드로는 주님만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나를 따르라”(Follow me)

 

베드로가 돌이켜 주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사도 요한]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입니까?” 묻던 자였습니다(요 13:23).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님께 묻기를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Follow thou me" 하셨습니다(요 21:22)

 

1602년에 쓴 Annibale Carracci의 소설 “쿠오 바디스”에서 베드로는 박해과 핍박이 너무 극심한 로마를 떠나서 도망가고 있을 때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무런 말씀이 없이 그를 지나갈 때 베드로는 얼른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틴어로 도미네 쿠오 바디스) Domine quo vadis? = Where are you going?”라고 물으니 주님께서는 “네가 순교의 현장을 떠난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려고 간다 ("I am going to Rome to be crucified again")”고 하는 음성을 듣고, 베드로는 회개하고 다시 로마에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being crucified upside-down) 순교를 당했는데, 베드로와 예수님을 만난 기념교회가 서 있습니다(외경 베드로 행전에 나옴). 폴란드 작가인 시엔키비취(Henryk Sienkiewicz)가 1895년 소설을 쓴 것으로 190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1951년에 영화 <쿼바디스>가 나와 8개 부문 아카데미상을 받았습니다. 과연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서 순교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우리의 여생을 “예수님만”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입니다. 돈이나 명예나 인간이나 이념을 따랐던 지난 생애이라면 이제부터는 부활의 주님의 손을 꼭 붙잡고 주님만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예수님을 따라가도록 솔선수범합시다.

 

[오늘의 기도]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오늘 메시지를 마음 비(心碑, in fleshly tables of the heart, 고후 3:3)에 새겨 말씀이 100배, 60배, 적어도 30배 맺히게 하옵소서. 주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게 하시고,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을 다해 감당하게 하옵소서. 이 생명 다하도록 주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도와주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마태복음 12장 헬라어 주석 강해]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논쟁(마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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