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12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논쟁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갈 때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정죄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을 빗대어 말합니다. 다윗도 배가 고플 때 제사장들만 먹는 진설병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도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매여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율법주의 신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고 주일을 지킴으로 복음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안식일 논쟁(마 12:1-8)
1절 엔 에케이노 토 카이로 에포류데 호 이에수스 토이스 삽바신 디아 톤 스포리몬 호이 데 마데타이 아우투 에페이나산 카이 에륵산토 틸레인 스타퀴아스 에스디에인
마 12: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12:1
그 때에...안식일에 - 이삭이 익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일 년 전 4월의 유월절과 밀 추수를 기념하는 칠칠절(태양력으로는 5-6월에 해당)의 중간 어느 한 안식일이다. 그런데 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일을 취하신 날로서, 율법에는 이 날을 기념할 것과 쉴 것을 동시에 명하고 있다. 만약 이 명령을 어기는 자에게는 죽음과 같은 극단의 형벌이 예비되어 있었다(출 20:9 ff ; 31:14 ff ;신 5:12 ff).
밀밭 사이로 가실새 - 먼저 랑게(Lange)에 의하면 전답(田畓)으로, 루터(Luther)에 의하면 곡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밀밭'(스포리모스)은 파종한 밭 혹은 곡식 밭으로 이해되며, 그중에서도 특별히 '보리밭'으로 해석될 때가 많다. KJV에서는 '곡식 밭'(grainfieled)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 제자들이 이삭은 잘라먹은 일에 대한 시비가 논쟁의 초점으로 대두된 것으로 보아 이때 예수의 사건은 바리새인들이 규정하고 있는 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약 1.8km) 내에서 발생한 것이 분명하다. 한편 그 당시 팔레스틴에 있는 경작지들은 대부분 길고 좁다란 이랑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이랑 사이의 땅이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로 활용되었다.
제자들이 사장하여 - 그 당시 제자들은 안식일의 그지 조항을 간과해 버릴 만큼 몹시 배가 고파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 당시 예수의 선교활동이 매우 활발하고도 촉급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삭을 잘라 먹으니 - 율법에 의하면 이 행위는 추수하는 것과 동일한 일로 간주되었다. 한편 평행 구인 눅 6:1에 보면 '손으로 비비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타작(打作)에 해당되며 만약 그 이삭 껍데기를 입으로 불어 털어 버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미(精米)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신 23:25에는 시장할 때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잘라먹는 행위가 허용(許容)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은 행위 자체는 결코 죄가 되지 않지만 그 일을 안식일에 행했다고 하는 문제가 발생된 것이다. 실로 유대인들의 율법 주석서 미쉬나(Mishina)에 따르면 '안식일에 어린양이 한 입에 넣을 만큼의 이삭을 잘라 취하는 것도 죄가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M. Sabbath, 7:4).
2절 호이 데 파리사이오이 이돈테스 에이폰 아우토 이두 호이 마데타이 수 포이우신 호 우크 엑세스틴 포이에인 엔 삽바토
마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 이는 한순간의 동작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찰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칼끝 같은 눈초리로 예수의 무리들을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고하되...당신의 제자들이 - 바리새인들의 시선은 현상적으로는 제자들에게 머물러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께 고착(固着)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사사건건(9:14 ; 15:2) 제자들의 반 율법적 행위를 빌미로 예수께 도전과 비난을 일삼았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 여기서 '하지 못할 일'에 해당하는 '엑세스틴'는 '합당치 못한 일'을 의미한다. 한편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규정은 모세의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상의 유전에 의한 것으로 39개의 항목이 있다.
즉, 39개 항목이 기록된 할라카(Halakah)에 의하면 성전에서 예배드릴 경우나 기근(饑饉) 등으로 인해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에는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본문의 경우에서처럼 피할 수 있는 경우에는 밀 추수를 하는 일은 엄연한 범법(犯法) 행위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본 사건이 있은 때보다 훨씬 후에는 이 조항들이 다소 완화되어 안식일일지라도 손으로 곡식을 잘라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어떤 기구를 사용하는 것만큼은 금지하였다(The Gemara).
3절 호 데 에이펜 아우토이스 우크 아네그노테 티 에포이에센 다비드 호테 에페이나센 아우토스 카이 호이 메트 아우투
마 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12:3
다윗이...시장할 때에 한 일 - 이는 삼상 21:1-6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다윗이 요나단의 도움으로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을 피하여 호위병 몇 명과 함께 도망하다가 놉에 있는 하나님의 전(殿)에 들어가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는 거룩한 떡으로 그들의 주린 배를 간신히 채웠던 일을 말한다. 그런데 이 일은 제사장만이 그 거룩한 떡, 즉 하나님 전에 진열되었던 12개의 떡을 먹을 수 있다고 하는 모세의 율법(레 24:5-9)을 위배(違背)한 행위가 된다.
또한 삼상 21:5-6의 본문에는 진설병이 방금 대체(代替)되어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안식일에 발생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유대사가 요세푸스는 진설병은 금요일에 만들어져 다음날 안식일에 진설했고, 그 묶은 것은 대체되어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고 한다(Josephus, Antiq., III, 10:7). 여하튼 예수의 의도는 다윗이 시장할 때 모세의 율법을 어겼으므로, 시장한 그의 제자들이 조상의 유전을 어긴 행위도 용납될 수 있는 것이며, 어떤 예외(exception)들을 허용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들을 주장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다만 구약 자체는 다윗의 그러한 행위를 정죄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나치리만큼 무리하게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근본정신에 어긋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Cranfield).
즉 예수의 기본 관점은 '안식일이 너희에게 주어진 것이지, 너희가 안식일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Mek Exod 26:13 ; 2 Macc. 5:19)에 지나치리 만큼 매사에 적용하고, 유전을 사람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실로 아히멜렉이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서도 다윗과 그의 소년들에게 떡을 주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바리새인이라고 한다면 시장한 예수의 제자들의 행위를 당연히 용납했어야지 정죄해서는 안되었던 것이 아닌가(Hooker).
4절 포스 에이셀덴 에이스 톤 오이콘 투 데우 카이 투스 아르투스 테스 프로데세오스 에파겐 후스 우크 엑손 엔 아우토 파게인 우데 토이스 메트 아우투 에이 메 토이스 히에류신 모노이스
마 12: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12:4
하나님의 전 - 이는 솔로몬 때에 건축된 성전이 아니라 광야의 여행길을 앞서 가며 이스라엘을 인도했었던 그 회막을 가리킨다(삿 18:31). 그러나 '하나님의 전'이라는 이 표현은 신. 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이 거처(居處) 하시는 거룩한 곳이라는 보편적 의미로 흔히 사용되기도 했다(대하 5:14 ; 딤전 3:15).
진설병 - 이스라엘 12지파의 수(數)에 따라 성소의 금상 위에 두 줄로 배설했던 12개의 떡이다(출 25:30 ; 레 24:5-8). 이는 제사 제물이 아니라 여호와의 생명적 교제를 상징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주의 거룩한 성만찬을 예시(豫示)하고 있다.
5절 에 우크 아네그노테 엔 토 노모 호티 토이스 삽바신 호이 히에레이스 엔 토 히에로 토 삽바톤 베벨루신 카이 아나이티오이 에이신
마 12: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12:5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 다윗의 안식일 예외 조항에 이은 두 번째 예외 사례이다. 안식일 법은 출 20:8-11과 신 5:12-15의 십계명 중 제4 계명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도록 규정한 안식일 규례에도 불구하고 성전 안에서 매 안식일마다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의식(儀式)을 행할 때 몇 가지의 일들, 예를 들어 진설병은 대체시키는 것(레 24:8), 수양 둘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민 28:9-10) 등의 직무를 행한다.
이러한 율법의 규정은 안식일에 관한 법이 하위법이요, 성전에 관한 법이 상위법이며 또한 상위법을 지키기 위해 하위법을 범(犯) 해도 된다고 하는 사실을 구약성경 자체가 인정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 규정을 범한 것과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은 행위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존 칼빈(J. Calvin)은 '성전 법이 희생드리는 일과 모든 외적 제사에 관련된 제사장들이 안식일 범법행위를 거룩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한다면, 참되고 신령한 성전인 예수께서는 그 예배자들이 신성한 의무를 행할 때 그들이 범한 모든 과오(예를 들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를 보다 더 거룩케 하실 능력이 있다. 더욱이 제자들은 현재 복음으로 인해서 다소 거룩해진 그들의 영혼과 육신을 강건하게 하여 복음 전파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려고 하는 생각에 열중해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행위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대속 사업의 지속과 복음 전파를 돕는 것과 예배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때에 이는 결코 과오로써 인정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실로 제사장들이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성전 제사를 집례(執禮) 하기 위해 일을 하여도 율법적으로 아무런 하자(瑕疵)가 없었다면, 그 성전과 제사의 궁극적 존재이신 예수와 그의 사역을 위해 안식일을 범한 제자들의 행동도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 예수께서는 율법 자체가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안식일의 노동을 명시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레 24:8) 안식일에 대한 당신의 새로운(유대인의 고답적인 사고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위한 외적이고 통속적인 규례를 철폐(abolition) 하시고(F.R.Fay) 이제 하나님 중심의 내적이고 본질적인 규례를 깨우치고 계신 것이다.
6절 레고 데 휘민 호티 투 히에루 메이존 에스틴 호데
마 12: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12:6
성전보다 더 큰 이 - 성전 법이 안식일 법에 우선하듯이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활동은 성전 법보다 우선한다. 이 구절의 논쟁의 형식은 할라카(Halakah)의 매 규정들을 확립시키는 데에 있어서 이미 공인(公認)된 논증 절차인 '칼 와호메르'(qal wahomer)에 해당한다.
이 '칼 와호메르'는 문자적으로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즉 어떤 애매모호한 논리에 대해 더 분명한 논리를 제시하는 논쟁 법이다(Daube). 한편 성전보다 '더 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이존'은 남성 명사일 수도 있고 중성 명사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메이존'에 대한 견해는 (1) '예수가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이 성전에서의 '제사장 예배'보다 더 위대하다는 의미라고 하는 게하르트슨(B. Gerhardsson)과 힐(David Hill)의 주장, (2) 성전보다 더 크다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의미한다고 보는 시갈(Sigal)과 콘 쉐어봐(Chon Sherbok)의 견해가 있다. 이들은 7절의 '자비를 원한다'는 말씀을 근거로 삼고 있다.
또한 (3) 성전보다 더 큰 것이 굶주림에 대한 긍휼의 생각 혹은 사랑의 운동이라고 여기는 슈티엘의 견해가 있으며, (4) '메이존'은 바로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보른캄(Bomkamm)과 그랜더(Georfges Grander)의 견해가 있다.
이중 (4)의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 주장에 따르면 성전은 안식일보다 더 크고 예수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이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율법 이해에 의해서도 알 수 있는데, 율법은 바로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서 율법은 비로소 완성된다고 하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5:17-48).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이는 예수의 권위가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은 행위를 무죄(無罪)케 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Lohmeyer). 따라서 예수가 그의 모든 제자들이 바로 신약 시대에 있어서 제사장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크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예수가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의 권위와 제사장들의 권위를 대조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Carson). 사실 성육신(Incamation)하신 말씀으로서의 신인(神人), 즉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의 절대적이고 여원한 권위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인간 제사장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한편 성전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 다음가는 최고의 존재였었다. 그런데 예수의 이 견해에 의하면 건물로서의 성전은 한낱 예수 자신을 예표, 상징(히 8:5)하는 일시적 모형일 뿐, 예수 자신의 등장 이후에는 결코 존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성전 속에서 그의 임재와 현현(顯現)을 나타내어 보이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성전인 예수 안에서 임재하시고 그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요 12:45). 따라서 예수가 모세보다(5:21-28), 아브라함보다(요 8:58) 성전보다 더 큰 이임은 당연하다.
7절 에이 데 에그노케이테 티 에스틴 엘레온 델로 카이 우 뒤시안 우크 안 카테디카사테 투스 아나이티우스
마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12:7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 이미 앞에서(9:13) 인용된 바 있는 호 6:6의 말씀으로 '자비가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비의 헬라어인 '엘레오스'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친절과 구제 행위로써 중심에 사랑과 자비와 헌신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 경건한 행위이다.
그리고 제사를 뜻하는 '뒤시아'는 연기로 제사를 올리는 희생 제물이나 제사 행위를 말한다. 물론 여기서는 단순히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무의미한 종교 행위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자비를 원한다'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제사 행위를 부인하거나 중단해 버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종교적 의무를 배격한 채 온전히 인본주의만을 주장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 곧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실천하는 자비의 행위를 율법의 의무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자비와 제사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피치 못한 경우가 생겼을 때에는 제사보다는 오히려 자비가 먼저 베풀어진다고 해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예배가 소홀해졌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알았더면 - 예수는 또다시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책망하셨다. 즉 율법을 대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호세아 시대 사람들이 피상적(superficial)이고 위선적으로 종교의식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그들의 유전인 할라카가 바로 이를 입증한다고 하는 것이다.
실로 종교의식에만 관심을 갖는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모든 세대 사람들의 공통된 과오'에 속한다고 피력한 칼빈(Calvin)의 견해는 깊이 음미해 볼 만한다.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 이로써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무죄(innocent)하다고 하는 선언을 받은 셈이다. 물론 제자들이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배가 고픈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로르도르프(Rordorf)의 견해보다는 오히려 성전보다 큰 이가 그들과 함께 게시며 그들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카슨(Carson)의 주장이 더 적절한 해석이 될 수 있다.
8절 퀴리오스 가르 에스틴 카이 투 삽바투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마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 막 2:27에는 안식일 제정(制定)의 근본 목적을 정의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마태와 누가는 이를 생략하고 있다.
마태는 1-7절의 말씀의 요점을 제사와 자비의 대조적 비교나 안식일의 기원은 사람의 안식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두지 않고 오히려 기독론(Chriistology)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였다. 랑케(Lange)에 의하면 주님은 그 자신이 신령한 안식이 되시므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안식일 준수(observance)가 되며 그를 떠나는 것은 바로 안식일의 파괴가 된다고 하였다.
특히 '주인'이라는 말은 어떤 일에 대한 주체적 운용자(運用者)라는 측면에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는 안식일을 소유하고 주관하며 안식일 규례를 해석하며, 지금까지 가려워졌던 안식일이 지닌 참 자유함과 참 평안을 들추어내 모든 이들에게 그것들을 향유(enjoyment)할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칼빈(Calvin)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는 말씀은 바로 안식일에 얽매여야 하는 의무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권세를 예수께서 받으셨다고 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율법을 멍에에서 벗어나서, 멍에를 대신 져 주시는 주님에게로 와서 쉼을 얻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였다. 실로 인간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종말론적 메시아이신 인자, 곧 예수는 그 인간들을 위해 안식일을 개방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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